10년이 넘게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지 못하는 로스쿨생 시절 경험한 한 대형로펌 인턴 면접이 있다. 여러 이야기를 하던 중 면접관이신 변호사님께서 내게 갑자기 물어보셨다. '00님은 행복하지 않으신가 보네요. 계속 어떻게 하면 행복하겠다는 말을 하시네요.' 내 얼굴도 보지 않고, 서류를 보면서 했던 차가운 말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고, 나는 그렇게 면접을 마쳤다.
당연히 그 로펌에서 인턴은 하지 못했다. 다른 대형로펌에서 인턴은 했지만, 그 과정에서도 내가 너무 철이 없다고 자책했다.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까지 다니다 왔으면서도 전략적으로 접근하지 못한, 너무나도 나이브했던 내 모습에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민망히 여겼다.
어느 강의실에서, 어떤 구도로 면접관들이 앉아있었는지, 심지어 그날의 공기까지도 기억을 하지만 당시 면접장에서 내가 한 말들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달라졌다. 내가 만약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간다면 면접관이었던 변호사님께 물어볼 것이다. '변호사님은 왜 행복하지도 않은 일을 하느라 밤늦게까지 일하시나요?'라고.
물론, 그 변호사가 행복한 지 여부는 나도 알 수 없다. 밤을 지새워가며 일을 해도 자신이 겨우 먹고 살 정도의 돈만 벌더라도 그 일에 보람, 의미, 가치를 느낀다면 그 사람은 행복할 수도 있지만, 매일 수천 만원을 벌어도 본인이 노예처럼 일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처럼 행복에 대한 우리의 기준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행복한 지 여부를 놓고 획일적인 기준을 제시한다. 수많은 유튜브 채널들과 방송에서는 돈이 많으면, 여행을 다닐 수 있으면, 유명해지면, 하고 싶은 일들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을 것처럼 말한다.
전쟁을 경험하고 절대적 빈곤을 경험한 세대의 어르신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고 당연할 지도 모른다. 그런데 최소한 1980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 중 상당수는 그런 경험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는 돈, 권력과 명예가 곧 우리의 행복을 담보해 줄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있다.
행복한 상태를 만들어 주는 객관적인 조건이란 것이 존재할까?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런 게 존재한다면 재벌이나 정치인 부모를 둔 자녀나 연예인들은 모두 행복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우리는 그런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굳이 마약을 하고, 사고를 치면서 살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듣는다. 돈과 명예는 확실히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셀럽들 중 상당수는 시간이 지나고 나서 공황장애나 우울증을 경험했다는 것을 고백하기도 한다.
최소한의 물질적인 필요는 충족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절대적 빈곤 상태에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건, 더군다나 우리나라처럼 지하철 몇 정거장만 지나가면 수십 억대 아파트를 볼 수 있는 사회에서도 '가난해도 행복할 수 있어'라는 건 마치 '네가 예수나 석가모니처럼 되지 못하는 건 네 탓이야'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의 욕구와 욕망, 그리고 다른 사람의 비교를 하게 되는 존재이기에 무조건 행복하라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건 거짓말을 넘어 폭력에 가까운 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우리가 모두 정말 간절히 원하는 몇 가지 정도는 엄청나게 갈망하다 손에 쥐어보는 경험을 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걸 갖게 되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것을 갖게 된 이후에 그 효능감이 얼마나 가는 지를 직접 경험하고, 그 뒤에 몰려오는 허망함을 느끼고 나면 물질, 권력, 명예가 우리에게 지속적인 행복을 담보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머리가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경험할 때야 비로소 우리는 조금 더 본질적인 고민을 하기 시작할 수 있다.
그렇다. 물질, 권력, 명예와 새로움이 주는 행복에는 분명한 유통기한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비슷한 수준의 그러한 유통기한이 있는 행복을 경험하고 싶으면, 우리는 더 강력한 자극이 필요하게 된다. 진통제에 내성이 생기면 더 강한 진통제가 필요하고, 마약을 하는 사람이 중독될수록 더 강한 마약을 원하듯이, 그리고 운동을 하면서 드는 무게를 늘릴수록 더 무거운 무게를 들고 싶어 하듯이.
그러한 큰 성취나 물질, 권력, 명예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게 해주는 것을 넘어서 내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베풀 수 있게 해 주고, 내가 귀찮은 작은 것들에서 해방될 수 있는 자유를 준다. 그리고 명예는 자신이 스스로 '내가 나쁘지 않게는 살았구나' 정도의 자존감은 가질 수 있게 해 주고, 권력은 잘 사용할 경우 많은 사람들의 삶을 조금 더 낫게 만들어 줄 수 있다. 이처럼 물질, 권력, 명예는 분명히 유용하다.
다만, 그것이 목적이 되고 우리가 우리 자신만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하려 하는 우리는 물질, 권력, 명예를 향해 질주하는 경주마가 되고, 그 안에 매몰되는 것을 넘어 중독이 되어 자신이 망가지는지도 모르고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다. 물질, 권력, 명예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유용한 수단이지만, 그것이 목적이나 목표가 되는 순간 우리를 망가뜨린단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선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그 첫 단계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깨닫는 데 있다. 똑같은 여행도 누군가는 바닷가를, 누군가는 산을, 누군가는 도심을 좋아하고 누군가는 유명한 곳을 찍고 다니는 여행을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르며 느긋함을 좋아한다. 여행만 해도 그런데, 하물며 인생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군가는 대기업에서 일정 수준의 안정을 보장해 주는데서 행복감을 느끼겠지만, 누군가는 큰 기계의 부품과 같은 일만 하는 게 지루할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업을 하면서 느끼게 되는 불안감으로 인해 병을 앓게 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은 그 불확실성 속에 있는 가능성을 보고 가슴이 뛸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람들 중에는 자신이 무엇이 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지금 당장 재미있고 행복하게, 자신이 느끼는 가치를 실현해 내는 게 가장 중요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그러한 성향과 자신이 맞는 환경과 상황에 처했는지 여부에 따라 누군가는 단칸방에 살아도 아침에 일어나 콧노래를 부르며 행복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방이 수십 개인 집에 살아도 불행할 수도 있기에 우리는 지속가능한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설사 지금 당장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그 가능성이 있다면, 아니 그 가능성이 높지 않아 보이더라도 지금 당장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온전히 누릴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조금이나마 덜 불행하고 더 행복해질 수 있다. '원영적 사고'가 밈처럼 돌면서 그 표현이 가끔은 비아냥거림처럼 사용되기도 했고, 혹자는 그 정도 돈과 명예를 얻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사고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궁핍해서 지금 당장의 생계가 힘든 상황만 아니라면, 우리 주위에는 항상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행복감을 누릴 수 있는 지점들은 분명히 있다.
로스쿨 재학생 시절, 나는 내가 변호사가 되어야만 덜 불행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사과정 때는 박사학위를 따면 최소한 불행하지는 않을 것이라 믿었다. 그런데 변호사가 된 수많은 동기들을 보니 변호사가 된 것 자체가 보장해 주는 행복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해서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더라.
실패로 점철된 어두운 터널을 지나, 본의 아니게, 어쩌다 운이 좋아서 그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좋아하고 잘할지도 모르는 일들을 하게 되면서 나는 덜 불행해지고, 조금은 더 행복해질 수 있었다. 변호사시험을 합격해 대형로펌에서 수억 대 연봉을 받는 동기도, 박사학위를 나보다 늦게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교수로 빨리 임용된 지인도, 나보다 불행할 수 있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달으면서야 비로소 나는 다른 사람과 내 삶을 덜 비교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변호사가 되어, 본인이 보람과 의미와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내 주위에는 실제로 그런 변호사, 판사, 검사들도 많이 있으니까. 돈은 자신의 제자들보다 적게 벌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에 집중하고 학생들을 만나면서 보람을 느끼는 교수님들도 내 주위에 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행복하기 위해 기억해야 할 건, 행복하기 위한 절대적인 조건 같은 건 없단 것이다. 모든 사람은 다르고, 누군가는 행복하지 못한 상황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을 위한 유일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군가가 행복하다는 말을 함부로 불신하거나 판단해서도 안되고, 경주마처럼 세상이 말하는 행복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할 필요도 없다. 행복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