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카미노 가이드 1
2015년 1월.
10년간 버킷리스트 1번으로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 품고만 있던 순례길을 실제 걷던 그 순간까지, 그리고 걷고나서도 2019년 현재 우리나라에 찰랑이는 순례길의 인기를 예측하지 못했다. 아니 2015년이 시작되던 무렵에도 순례길을 사랑하는 한국인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사람없던 휑한 스페인 겨울 벌판을 걸으면서 같은 질문을 수차례 받았다.
"카미노에 한국인이 왜 이리 많아?"
알베르게 호스피탈레로는 물론이고 걷다가 마주치는 다른 나라 순례자들, 가끔은 레스토랑이나 바 주인들도 같은 질문을 해댔다. 한국인이 도대체 왜이리 많냐고. 그들 대개는 유럽인들이었고 확실히 한국인보다는 훨씬 많은 수였어서 보통은
"니네 나라 사람들이 더 많잖아"
라고 응수했는데,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뻔했다.
"우리는 가깝잖아. 항공료도 얼마 안 해."
그도 그럴 것이 스페인에 수십년 만에 폭설이 내려 떠들썩했던 2015년 1월. 인적 드물었던 프랑스 순례길에서 한국인 순례자 비율이 깨나 높았다. #리오하 지역에 들어서고, #나헤라 알베르게에서였을까.
자원봉사하던 호스피탈레로가 아마도 전날에도, 또 그 전날에도 한국인 순례자에게 물어봤을 법한, 한국인 순례자가 왜 이리 많냐는 질문을 내게도 했다. 그리고 순례자 일지를 작성한 장부를 보여주었는데 자국민인 스페인 사람이 1위, 한국인이 2위로 수가 많았다.
브라질 소설가 파울로 코엘료의 까미노 산티아고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한국에서 방영되며 한국에 까미노가 알려졌고, 본격적으로 걷는 사람들이 많아진 건 아마도 까미노를 혼자 걸었던 여자 여행작가의 책이 발행된 이후일 것이라고 답해주었다. 그때 떠올렸던 사람은 단연 김남희 씨였다. 지금이야 순례를 다녀온 후 자신의 감성을 모아 발행한 순례 에세이가 제법 많지만 2006년에 발행되었던 김남희 씨의 책은 아마도 우리나라에 최초 발행된 순례길 에세이였을 것이다.
내가 카미노 산티아고를 접하게 된 건, 2006년 늦가을 자정이 가까운 어느 밤이었다. 당시 여행잡지에서 일하고 있던 내겐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잔뜩 쌓여 있었지만, 그에 앞서 후배들이 먼저 써서 넘긴 원고를 읽으며 여기저기 빨간 줄을 죽죽 그어대고 있던 참이었다. 산산이 부서져가던 멘탈 한 귀퉁이를 겨우 부여잡고 원고에 집중하려고 애쓰던 그때, 컴퓨터 모니터 화면보호기가 꺼지며 MSN 메신저가 깜박였다(아 옛날사람...;).
바쁜 와중에 히죽 웃으며 메신저를 열었다.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친구로 지냈지만 마음 한구석엔 분명 그 이상의 마음이 있었을 J였다. 서로의 가족과 연애사를 꿰고 있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었지만 대화체는 그리 곱지 않았다. 툴툴대면서도 좋아할 법한 음악을 잔뜩 보내주며 마감 때 원고 쓰며 들으라거나, 전자기기에 문제가 생기거나 새로 구매해야할 땐 기꺼이 검색해 내게 맞는 모델을 선뜻 골라주던 J는 딱 츤데레였다. J가 어떤 마음이었는 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모호하지 않은 감정 사이에서 줄을 타며 항상 J와의 대화가 즐거웠다.
그날 역시 마감 중인 걸 알곤 왜 일을 미뤄두냐, 일찍 끝내고 일찍 집에 가지, 밤길 무서운 줄을 모른다며 일단 싫은 소리를 한바탕 늘어놓고서는 존 메이어의 음악과 함께 영상 파일을 하나 보내왔다. 마감 끝나면 보라는 잔소리까지 덧붙여서. 받자마자 플레이. 화면은 온통 황톳빛이었다. 스페인 시골길을 배경으로 마을 아낙들과 대화를 나누고, 들과 숲을 지나며 마치 <연금술사>나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구절인마냥 영적인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은 파울로 코엘료였다. 산티아고 순례길과 처음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매달 짐 꾸려 새 여행지로 떠나고, 긴 출장 기간 내내 빡빡한 일정을 보내며 취재수첩 가득 온갖 얘깃거리를 담아와 날밤 지새며 원고에 옮겨쓰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삶을 살고 있었지만, 스페인은 낯선 여행지였고 순례길은 더 생소했다. 대체 얼마나 튼튼한 사람이라야 8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걷는단 말이야? 차를 타지 않고 오롯이 걸어서 스페인 땅덩어리는 지난다는 게 말이 될 법이나 한가 싶었다. 더군다나 한달이나 되는 여행 기간을 어떤 직장인이 언감생심 계획할 수 있었을까.
까미노 산티아고는 여러모로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J가 얘기한 곳이니만큼 막연하게 '좋은 곳'일 거라는, 긍정적인 느낌으로 다가왔음은 물론이다. 언젠가 나랑 이곳에 가자는 말일까? 착각을 한바가지 하는 한편, 함께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막연한 기대감과 함께 파울로 코엘료의 영상은 꽤나 오래 드라이브 구석에 잠들어 있었다.
10년간 잊고 있었던 일종의 버킷리스트는 9년 뒤, 느닷없이 현실로 다가왔다. 공교롭게 한달이 넘는 까미노 여정에 투자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생업에 대한 스트레스 없이 스페인에서 한달을 걸어도 될만큼, 그리고 한국에 돌아와 급히 다음 직장을 찾지 않아도 될 만큼의 작은 여유도 확보되었다. 일이 되려니 마치 오래 계획한 것처럼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같은 시점에 다가왔고, '여행'은 내게 언제나 우선순위였던 만큼 대단한 결심이나 두려움 같은 게 있을 리 만무했다.
잠 안 오던 어느 새벽, 시간과 여유가 생겼으니 '나도 까미노란 걸 가보자' 생각했고 누워 아이폰을 뒤지니 금세 바르셀로나행 항공권이 확보되었다. 차곡차곡 적립만 했을 뿐 전혀 사용하지 않았던 마일리지를 꺼내 쓸 시점이었다. 출발은 2주 뒤. 계획에 없던 순례를 떠나게 생겼는데 주어진 시간은 2주가 전부였다. 누운 자리에서 배낭이니 침낭, 우비 같은 것들은 검색, 바로 구입했다. 32인치 짜리 배낭과 춘추용 침낭, 방수 기능 있는 겨울 재킷(기능성 바람막이 아님), 경량 패딩, 기능성 티셔츠를 구매하기까지 2주는 충분했다.
신발은 여행잡지에서 출장 갈 때마다 신고다녔던 운동화를 신기로 했다. 새 신발을 신으면 발이 아플 게 뻔했다. 양말도 신다가 버릴 요량으로 신던 양말, 속옷 역시 빨아 입고 버릴 용량으로 입던 속옷 두세벌, 잘때 입으려고 챙긴 티셔츠도 역시 입던 거, 이마트에서 7천 원에 구입한 노란 비옷은 눈에 잘 띄어 좋을 것 같았다.
온라인 순례자 카페에서 필수템으로 지목됐던 항목 중 빨래집게와 물통, 지퍼백은 포기하고 옷핀만 서너 개 챙겼다. 현지에서 생수를 사 마시고 남은 빈 통을 며칠 주기로 바꿔쓰고, 역시 현지에서 쇼핑하며 받을 비닐봉지를 지퍼백 대신 사용하면 굳이 챙겨갈 필요는 없을 듯 했다.
단, 순례자 카페에서 추천하지는 않았지만 고심 끝에 추가한 물품도 있었다. 끝까지 신경이 쓰였던 베드버그를 물리쳐줄 나프탈렌과 비오킬, 그리고 알베르게에 세탁기는 있어도 세제는 없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에 종이 세제를 구입했다. 그외 몇 가지 물품들.
2주만에 휘뚜루마뚜루 준비하고 떠났지만 첫 순례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그 정도면 특별히 부족한 점 없이 괜찮은 편이었다. 큰 도시는 물론, 몇 가구 살지 않는 작은 마을에도 웬만하면 작은 마트가 있어 필요한 먹을거리며 물품들을 살 수 있었다. 인적 드물었을 겨울 순례길에서도 마음 맞는 일행을 만나 안전하게 함께 다녔고, 혹시 혼자 걷다가 눈 덮힌 산길에서 길을 잃어 조난당할 뻔한 지경에 두어번 처했었는데 그땐 마치 누가 각본이라도 짠 것처럼 인적없던 길에 누군가 나타나 나를 불러주었다. 그야말로 '까미노 매직'이라고 부를 만한, 그 외엔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소소하지만 비현실적인 몇 가지 에피소드들이 채워졌다.
까미노를, 순례를 준비하고 있다면 정작 필요한 건 값 비싸고 고급스러운 캠핑 용품이나 아웃도어 용품이 아닐 지도 모른다. 반드시 필요한, 먹고 입고 자는데 필요한 도구를 계절에 맞게 갖추는 건 정말 기본이어서 누구에게라도 필요하다. 그 외에는 까미노에, 순례 자체에 자신을 던져보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다. 어떤 일이 일어날 지 기대하면서.
갑자기 너무 영적이었나? 그리 독실한 카톨릭 신자도 아니면서. 현실적인 몇 가지 준비사항이 더 있긴 하다. 시간날 때마다 걷기 연습하며 다리에 근력을 키울 것. 그리고 순례길에서 신을 신발을 미리 신고 다니며 발에 익숙하게 길들일 것. 그 정도면 노력해야할 필수 준비 요건으론 충분하다.
까미노 정담회 알림
오프라인에서 순례길, 까미노 얘기하는 자릴 만들어볼까 해요.
순례 후 일종의 '까미노 블루'에 걸렸거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과 까미노 후기를 공유하고 싶다거나
아니면 곧 걸을 건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준비해야할 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이 모여
오롯이 까미노에 대한 얘길 나누면 어떨까 싶어요.
- 나이, 성별 중요하지 않아요.
- 모여 얘기하고, 궁금한 거 있음 질문하고, 경험자는 또 팁을 공유하고.. 그럼 좋을 것 같아요.
- 신청하고 갑자기 빠지시면 안될 것 같아 참가비(1만 원)를 받겠습니다.
- 전 차와 간단한 간식을 준비할 게요 :)
- 2019년12월 13일 (목) 오후 7시 또는
- 12019년2월 15일 (토) 오후 2시 생각중이예요.
- 장소 : 을지로 모처
*참석을 원하시면, 아래 링크로 신청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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