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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장 Jun 25. 2022

[단편소설] 필연

방콕에서 생긴 일

나는 여자친구를 태국의 방콕에서 2019년 12월에 만났다.

그리고 2020 3 초에  단편소설을 여자친구에선물했다.


이 소설의 대부분이 사실이다.

당시만 해도 코로나19가 팬데믹까지 불러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기 때문에

소설의 내용이 지난 2년여간 인류가 겪어온 일들과 맞지 않는 부분도 있다.


여자친구와는 올해 결혼한다.

우리의 첫 만남이 담긴 글을 브런치에 남겨두고 싶었다.


사랑해.

공간의 광막함과 시간의 영겁에서

행성 하나와 찰나의 순간을

그대와 공유할 수 있다는 것.

나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2019년 12월 26일 저녁 9시 20분경이었다. 나는 수쿰윗 소이 18에 위치한 렘브란트 호텔 로비 1층에서 그랩카를 호출했다. 이 시간의 방콕은 지옥의 교통체증이 풀려 30분만에 Adhere 13th Blues Bar에 도착했다. 이곳은 작년에 처음 와보고 반해버린 곳으로, 블루스 락을 라이브로 공연하는 펍이다. 나는 이번 휴가에서 꼭 다시 가야할 곳 1순위에 이 펍을 꼽곤 했다.


방콕의 Adhere 13th Blues Bar


실내 자리는 이미 사람들로 가득차 있고, 실외 길거리까지 펼쳐 놓은 테이블에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난 투명한 문을 빼꼼히 열고 가게 직원에게 손가락 1개를 펼치며 1명 자리 있냐고 물었다. 직원은 약간의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여기라도 괜찮다면 앉으라고 손짓했다. 4명 테이블에 3명이 앉아있고 의자 하나만 비어 있었다. 난 그 자리에 앉으며 레오 맥주를 주문했다. 10시 공연 밴드는 악기를 세팅하고 있었다.


10시 공연 밴드는 작년에도 봤던 밴드였다. 멤버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다.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다. 나에게 지난 1년은 힘든 일도 좋은 일도 있었다. 그들이라고 안 그랬겠는가. 그 1년을 각자의 자리에서 잘 버티고, 여기서 또 만날 수 있음에 나는 감사했다.


라이브 음악은 특별하다. 청각에만 의존한 감상이 아니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감각으로 즐기다보니 멜로디, 리듬, 공기의 진동, 연주자의 표정과 몸짓, 공간, 현장의 분위기까지 음악이 되고 하나의 복합 예술이 된다. 또 지금 이 순간 존재하고 지나버리면 휘발되는 딱 한번의 음악이라는 매력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펍에 방문한 사람들은 어느 무명 카피밴드의 블루스 락을 들으며, 술을 마시며, 발로 박자를 맞추며, 고개를 까닥이며 12월의 여름밤을 보내고 있다.


방콕의 Adhere 13th Blues Bar


첫 타임 공연이 끝나자 11시가 됐다. 10분간의 쉬는시간 동안 나는 잠시 실외로 나와 도로를 보고 지나는 차들을 보고 가게에 앉아 대화하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역시 올해도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난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가 꽉 차서 옆 테이블에 올려놨던 맥주병을 집어 마시려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다른 맥주병이 쓱 나오더니 건배를 제안했다. 예쁘고 귀여운 얼굴에 숏커트를 하고 하얀색 티셔츠에 트로피컬 무늬의 오버핏 반팔 셔츠를 걸친 여자였다.

“방콕에 얼마나 있어요?” 그녀가 영어로 물었다.


나는 그녀의 억양을 듣고 한국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영어로 답했다. “6일동안 있어요” 그리고 바로 이어 물었다. “어디서 오셨어요?”

한국에서 왔다고 대답하는 그녀에게, 내가 한국어로 “저도 한국사람이에요”라고 하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그녀는 내가 중국사람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리고 옆의 친구를 가리키며 30살 되는 것을 기념해 함께 여행을 왔다고 했다.


11시 10분이 되자 공연이 다시 시작됐고, 연주 소리로 가게 안이 대화하기에 적당하지 않았음에도 그녀와 대화를 이어 갔다. 어디서도 해보지 못한 주제의 대화를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해본 적 없는 특별한 대화였다. 겉핥기나 탐색을 위한 대화가 아니었다. 그녀의 질문은 심연에 닿았고, 나는 나를 그대로 보여주는 대답을 했다. 처음 만난 사람이고 오늘 이후에 볼 거라고 생각을 안하니 일부러 멋있게 보이려고 꾸밀 필요도 없었다. 나도 그녀를 깊이 알고 싶어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녀도 자신을 솔직하게 보여줬다.


하지만 그렇게 한시간이 지나자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돼있었다. 오늘 이후 못 볼 거라고 생각하자 너무 아쉬웠다. 나는 알아버렸다. 그녀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내가 이해받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귀하고 고결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사랑스럽다는 것을. 그녀는 귀엽다는 것을. 그녀는 좋은 사람이기에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정성과 따뜻함으로 대하고 싶어지는 것을.


난 이제 어떻게 하면 그녀와 더 시간을 보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됐다. 평생을 모르고 산 사람을 지금은 가장 궁금해하고 있다.


12시에 Adhere 13th Blues Bar의 공연은 끝났다. 나와 그녀와 그녀의 친구는 가게 밖으로 나와서 오늘 정말 좋았다, 숙소는 어디인가, 내일 일정은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던 와중에도 나의 머릿속은 그녀에게 오늘 밤 더 놀다가 들어가자고 제안을 할까 말까를 수백번 고민하고 있다. 잠깐 얘기 좀 했다고 오버하는거 아닐까. 친구끼리 잘 놀고 있는데 방해하는건 아닐까. 그녀의 호의에 내가 너무 질척거리는건 아닐까.


나는 그녀의 표정을 봤다. 그녀는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그녀 친구의 표정을 봤다. 피곤해 죽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용기를 내기로 한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그에 맞는 액션을 취해야 한다.


“색소폰이라고 라이브 공연하는 펍이 있는데요, 혹시 괜찮으시면 거기 가서 같이 좀 더 놀까요?”


그녀는 좋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친구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 친구는 5초 정도 생각하더니 한시간만 놀다 가자고 했다. 나는 설레이는 마음으로 그랩을 불렀다. 그랩은 3분만에 왔다.


세상 인연이라는 것이 묘하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만나 한시간만에 마음을 뺏기고, 이 새벽에 함께 더 놀러가다니. 이 차에서 내려서 어떤 공연을 보고 어떤 술을 마시며 우리는 또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까.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원하게 됐다. 마치 오늘 이 만남을 위해 평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오직 그녀를 만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기다려 방콕에 온 사람처럼. 나는 생각한다. 내게 기회가 주어져 그녀에게 행복을 줄 수 있길. 그녀의 행복한 순간에 나도 함께 할 수 있길.


방콕의 색소폰



***


2020년 12월 26일. 나는 크리스탈과 함께 방콕에 있다. 지금은 밤 11시. Adhere 13th Blues Bar다. 한시간 공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다. 딱 일년 전 우리가 만난 그 장소의 그 시간이다.


“우리 벌써 처음 만난지 일년이 됐네요.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나도 사랑해요. 정말 신기하죠? 그 때 여기서 만나고 일년을 연애하고 또 여기를 오다니”

우리는 가볍게 입을 맞춘다.


“우리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어요. 우연히 만난게 아니에요. 2019년 12월 26일에 여기서 만나기로 정해져 있었던 거에요. 필연이죠. 그리고 우리는 매년 겨울에 방콕에 같이 오며 우리의 만남을 기념하게 될 거에요” 내가 말했다.

“지미를 만난건 행운이에요” 그녀가 내 볼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크리스탈을 만난건 축복이에요” 나는 크리스탈의 왼손에 입을 맞췄다.

“내가 아주 총애해요”

“내가 더 총애해요”

우리는 또 입을 맞춘다.


공연 준비를 마친 밴드가 연주를 시작한다.

그녀가 맥주병을 들어 내 쪽으로 뻗으며 물었다. “방콕에 얼마나 있어요?”

“6일동안 있어요”

우리는 깔깔 웃는다. 우리는 그 때 그날처럼 대화한다. 나는 크리스탈과의 대화가 정말 즐겁다.


“지금 여기서 지난 일년을 돌아보면 어때요?” 내가 물었다.

“잘 알다시피 다이나믹 했죠. 지미와 방콕에서 만났고, 곧 연애를 시작했죠. 정말 행복했어요. 연초에 다른 부서로 발령 받아서 적응하느라 힘들기도 했죠. 그래도 노력했더니 점점 업무파악도 됐고, 이제는 그때 막막하던 일들을 잘 해나가고 있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해요. 돌아보면 2020년엔 기쁨이 더 많았어요. 지미와 함께 해서 그 시간들을 잘 통과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크리스탈이 미소지었다.


그녀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그녀의 웃음을 보는 지금 이순간, 나는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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