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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달 모나 Monah thedal Mar 09. 2024

당신의 시간을 기록해 드립니다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 책방, ‘책방공책’

당신의 시간을 기록해 드립니다,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 책방, ‘책방공책’


오늘의 서점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 책방, ‘책방공책’     


책방 3줄 요약      

1. 미로의 끝에서 펼쳐지는, 환상의 동화 나라
 : 표지판을 따라 걷는 좁은 미로 같은 길, 알전구로 장식된 신비로운 복도, 포스터와 엽서가 붙어 있는 오래된 문구점 같은 입구. 책방은 길목부터 환상의 동화 나라를 연상케 한다.

2. 단골과 함께 상생하는 서점
 : 단골이 정말 많으며, 탄탄한 코어 팬층을 둔 책방이다. 4번의 이사를 했음에도 여전히 건실하게 살아있는 이유는 전부 단골들 덕분.

3.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 비어 있는 책
 : 책방에는 책장 가득 빼곡하게 비어 있는 책, 공책들이 있다. 손바닥 만 한 공책에는 누군가의 시간이 기록되어 있다. 책방의 손님과 취향이 기록된 작은 책들. 그들은 곧 책방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늘의 서점은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 서점, ‘책방공책’이다.

공책이 있는 책방. 스파게티가 있는 칼국수 집이나 막걸리가 있는 호프집같이, 한 번쯤 되짚게 되는 말이다. 책과 공책은 전혀 이질적이진 않지만, 흔히 책방을 생각하면서 가장 먼저 공책을 떠올리는 이는 많지 않다. 공책은 문자 그대로 ‘비어 있는 책’이다. 내용 없이 새하얀 속지만 반복되는, 책으로서의 가능성을 품고 있는, 책 이전의 책이다.      


그런 책이 몇백 권 있다고 했다. 책장 한 면이 빼곡하게 공책으로 가득하다고 했다. 상호에도 ‘공책’이 있을 만큼, ‘공책’이 큰 존재감을 지니는 책방이라고 했다. 책만큼이나 공책을 중요하게 여기는 서점. 내용이 없는 빈 종이 뭉치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하는 곳. 그런 서점은 대체 어떤 곳일지 궁금해졌다.     


알다시피 나는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다.

그래서 당장 갔다. 책방으로.     



미로의 끝에서 펼쳐지는환상의 동화 나라     


당연한 말이겠지만, 어른에게도 동심이 있다. 어른의 동심은 심연에 가라앉은 여의주처럼, 자주 포착되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수면 위로 떠 올라 심장을 간질인다. 쉽게 말해 환경이 갖추어질 때만 발현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어른에게서 동심을 자극하려면 몇 가지 판타지적인 요소가 필요한데, 그중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가 ‘미지의 비밀스러움’과 ‘따뜻함’, 그리고 ‘향수의 자극’이라고 생각한다.      


책방공책으로 향하는 길에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있었다. 구로구의 성공회대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의 오래된 상가 건물. 이름부터 어느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할 것 같은 ‘그린빌라’ 상가 2층에는 어른의 추억을 자극하는 한 책방이 있다. 곳곳에 붙은 표지판과 햇빛에 색이 바랜 종이 안내판, 사람 하나가 겨우 걸을 수 있는 좁은 미로 같은 길, 알전구가 사선으로 걸린 어둑한 상가의 복도에는 미지의 비밀스러움이 있다. 따뜻함과 묘한 신비감이 공존하는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이세계와 이 세계를 잇는 어느 상점이 등장할 것만 같다. 상점의 주인의 주된 업무는 장사가 아닌 상담이며, 그가 하는 일은 둘 중 하나이다. 기억을 지워 주거나 시간을 되돌려주거나.     


그 정도로 독특한 분위기였다는 뜻이다. 어른을 위한 동화, 혹은 한국형 판타지 영화나 드라마가 펼쳐질 것만 같은 곳. 책방공책은 입구부터 범상치 않았다.      



책방으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서부터 현실이 조금씩 깃들기 시작한다. 책방공책으로 이어지는 계단참에는 널찍한 합판 구조물이 세워져 있는데, 나무판 위에는 책방의 후기가 빼곡하게 붙어 있다. 전부 책방의 단골들이 적어 준 책방에 대한 인상이다. ‘힐링, 휴식 공간, 따스함, 쉼, 동화 속 세상’ 등, 서점의 단골들은 입을 모아 ‘책방공책’이라는 공간을 칭찬한다. 뒤에서 다시 이야기할 테지만, 이들, 그러니까 단골들은 책방을 지탱하는 척추 같은 존재다. 그래서인지는 그들의 에너지는 책방의 초입부터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시 계단을 오른다. 마침내 등장한 책방의 입구. 아. 우와. 절로 모르게 감탄이 나온다. 오랜만에, 정말 너무 오랜만에 어떤 풍경을 마주해서다. 향수를 자극하는 상가 건물 풍경.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갈색 철제 문틀과 힘껏 밀어야만 비로소 열리는 그 옛날 그 시절의 문. 피아노 학원과 보습 학원, 혹은 불량식품을 가득 쌓아 놓고 아이들을 이끌었던 어느 슈퍼나 문구점이 자꾸만 떠오른다. 낡음이라는 단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희소하고도 귀중한 가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건물과 인테리어. 책방은 시작부터 가슴 뛰게 흥미로웠다.      

  


책방 문을 열자 책방 내부가 펼쳐진다. 아늑하고 따뜻하며 아기자기하다. 빈티지한 소품들과 그림, 타자기와 인형, 장난감과 식물들, 하얀 김이 올라오는 나무 부엌과 유리 케이스에 담긴 쿠키들. 책방을 이루는 크고 작은 요소들은 한 데 모여 ‘책방공책’만의 짙은 공기를 만든다. 몸을 푹 담그고 싶을 정도로 안락하고 포근한 분위기다.     


책방지기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맞이해 주셨다. 책방공책은 기본적으로 손님들이 드나드는 서점으로 운영되지만, 프라이빗 공간 예약 서비스 ‘오롯이’로도 이용할 수 있다. ‘오롯이’는 2시간 동안 책방 전체를 홀로 대관해서 쓸 수 있는 서비스로, 예약 손님들에게는 차가 담긴 ‘공책 한 상’이 제공된다. 난 책방에 가기 전에 미리 ‘오롯이’를 예약하고 간 터라, 책방지기님은 내가 도착하자마자 이 시간의 유일한 손님인 나를 위해 준비한 다과상을 내어 주셨다.      


‘공책 한 상’이 나오는 순간 얼굴에는 미소가 감돈다. 티가 담긴 쟁반은 참으이 정성스럽다. 동그란 나무 쟁반 위에는 차를 우리고, 내리고, 담을 수 있는 갖가지 유리 용기들과 마시는 이에 따라 농도와 온도를 조절할 수 있는 찬물과 더운물도 준비되어 있다. 곁에는 계절마다 달라지는 다과도 있다. (내가 갔을 때는 독일의 성탄절 케이크, 슈톨렌을 내어 주셨다.)      


마시기 아까울 정도로 소담스러운 다과상을 보고 있자니, 이 서점이 어째서 이토록 사랑받고 있는지를 알 것만 같다. 이곳은 작은 것 하나에도 섬세함과 따스함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단골과 함께 상생하는 서점     


책방공책은 4년의 역사를 가진 책방이다. 동시에 4번의 이사 경력이 있는 서점이기도 하다. 4년 동안 4번의 이사를 거듭하면서도 책방을 쉽게 놓지 못했던 건, 전부 단골들 덕분이다. 책방을 이사하며 난관에 부딪칠 때도, 그만 포기할까 잠시 고민했던 시절에도, 책방지기님을 붙든 힘은 책방을 지키는 단골들이었다.     

 

손님들의 흔적은 책방 곳곳에서 눈에 띈다. 책방 전경을 그린 수채화 그림, 책방의 분위기와 소품을 녹여낸 굿즈들(스티커와 마그넷)은 책방에 드나들던 손님들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책방은 운영 또한 책방지기님 혼자서 하지 않는다. 주에 며칠은 ‘스페셜 책방지기’들이 책방지기님을 대신해 책방을 지킨다. 그들은 급한 일이 생길 때면 언제든지 달려온다. 덕분에 책방지기님은 쉬어갈 수 있다. 쉽게 넘어지지 않을 수 있다. 그들이 그토록 책방지기님을 응원하는 이유는 하나다. 그들은 책방이 계속되길 바란다. 따뜻하고 아늑하며 소담한 분위기를 가진 특색 있는 서점이 사라지지 않길 바란다.     



그들 중 몇몇은 책방의 시작부터 함께 한 이들이다. 책방공책은 본래 구로구 천왕역 근처에서 그림책 전문 책방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그림책을 애정하며, 그림책 감상집도 출판한 이력이 있는 책방지기님은 취향을 한껏 담아 첫 책방을 그림책으로 가득 채웠었다. 당시의 흔적은 지금의 책방에도 남아 있다. 책방은 공간의 1/4을 온전히 그림책에 할애한다. 그림책 코너에는 신스케, 버닝햄, 앤더슨 등 명작들이 빼곡하다. 곁에는 그림책의 감성을 더해 주는 일러스트들도 있다. 고전 명작, 초판 <곰돌이 푸>의 삽화 일러스트들이 특히 눈에 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몽글해지는 그림들이다.      


책방의 나머지 공간에 있는 책들 또한 그림책과 결이 비슷한, 서정적인 책들이다. 소설, 시집, 에세이, 극본 등 그림책처럼 삶의 한가운데로 깊이 밀려가게 되는 책들. 함께 울고 웃게 되는 이야기들이 담긴 서적들이 유독 많다. 책장의 아랫부분을 할애해서 만든, 책방지기의 책들을 정리해 둔 ‘꿈이 서가’는 그런 책들만을 압축해 모아 둔 곳이다. <나의 해방일지>, <가재가 노래하는 곳>, <아몬드>,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등, 책방지기님의 책들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간과하게 되는 섬세한 감성이 밀도 깊게 담겨 있었다.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는비어 있는 공책     


책방지기님의 섬세한 감성은 책이 아닌 것들에서도 엿볼 수 있다. 책방을 조금만 둘러봐도 알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는, 책방지기님께서 어마어마한 ‘사부작러’라는 사실이다. 책방에는 책방지기님의 손에서 탄생한 소품들이 많다. 책방의 이곳저곳에서 눈에 띄는 아기 모양의 천 인형들은 전부 책방지기님께서 당신의 아이들을 모델로 해 직접 만든 것들이다. 이 외에도 책방의 뜨개 소품들과 책방의 로고인 ‘책 읽는 사람’ 또한 책방지기님의 작품이다. 책방지기님은 또한 자신과 같은 ‘사부작러’를 위해 책방에 가지각색의 도장들을 잔뜩 마련해 놓으셨다. 도장은 본래 책방지기님께서 손님이 구매한 책이나 봉투에 찍기 위해 제작한 것이지만, 손님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더 찍어도 괜찮다. ‘다꾸’를 하듯이 필사를 마친 종이에 도장을 인장처럼 찍어 장식할 수도 있다.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도장은 책방을 방문하는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좋다고 한다. 하지만 비단 아이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동심을 지닌 어른들과 책방을 기억하고픈 이들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책방에 놓인 여러 수공예 관련 물품들 중 단연 돋보이는 건 책방공책만의 시그니처인 ‘공책’이다. ‘북 멤버쉽 공책’이라고도 불리는 손바닥 만 한 공책들은 책방에서 책을 구매한 이들에게 부여되는 일종의 멤버십 카드다. 초창기 시절에는 출근 카드 모양이었던 북 멤버쉽 기록 용지는, 책방지기님의 ‘사부작’이 첨가되며 공책의 형태로 바뀌었다. 책방에는 작은 공책을 위한 책장도 따로 마련되어 있다. 공책의 크기에 맞게 짜인 책장은 이름이 쓰인 공책들로 빼곡하다. 그건 손님의 기록이자 동시에 책방의 기록이다.     


책방에 있는 모든 공책들은 책방지기님께서 손수 제작한다고 한다. 책방지기님은 직접 종이를 접고, 마스킹테이프를 골라서 붙이고, 표지에 책방 로고가 새겨진 도장을 찍고, 손님들의 이름을 적어 넣으며 한 명, 한 명을 기억한다. 책방의 공책에는 책방을 드나드는 이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시간이 기록된다. 속지에 적히는 건 단지 구매한 책과 책을 산 일자뿐이지만, 기록이 한 줄씩 쌓이다 보면 누군가가 지나온 시간이 된다. 언제 어떤 책을 읽었는지를 되짚으며, 당시의 나를 되돌아보게 만들어 주는 ‘책 기억 저장고’가 된다.      


책방의 공책에는 또한 손님들의 취향이 집약되어 있기도 하다. 구매한 책이 한 권씩 늘어나다 보면, 손님이 선호하는 장르와 경향들이 점차 선명해진다. 책방의 공책만 훑어도 그가 좋아하는 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책방의 단골들은 그래서 서로의 공책을 컨닝페이퍼처럼 이용하기도 한다. 책 선물을 주고 싶을 때 실패할 확률을 현저하게 줄이기 위해서다. (물론, 개인 정보 때문에 손님이 직접 남의 공책을 열람할 수는 없지만, 책방지기님께 살짝 부탁하면 대신 공책을 확인해 알맞은 책들을 귀띔해 주신다고 한다.) 책을 주는 이도, 받는 이도, 책방의 오랜 단골들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책방에는 그렇게 단골들의 이야기가 하나 더 늘어 간다. 추억이 하나 더 쓰인다.      



당연하게도 나는 책방에서 공책을 만들었다. 책을 구매한 후 나만의 공책을 골랐다. 책방공책에서 구매한 책은 헝가리 소설 <도어>. 디자인이 아름답고 독특해, 책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속 눈길이 가던 책이었다.  

    

책방지기님께서는 구매한 책의 첫 장에 책방의 로고와 구매한 날짜를 도장으로 찍고서, 책의 좋은 문구를 적을 수 있는 책방의 미니 공책과 필사 노트를 책 사이에 꽂아 주셨다. (선물로 주신 노트들 역시 책방지기님께서 직접 만든 것이다. 책방에는 온통 책방지기님의 손길이 가득하다.) 마지막으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한 장 건네받았다. 폴라로이드 사진에는 책방공책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무언가에 몰두한 나의 뒷모습이 담겨 있다. 프라이빗 공간 예약을 이용한 모든 손님에게 주어지는 작은 선물이라고 한다. 책방에 다녀간 손님의 시간은 그렇게 이미지로도 기록된다. 손님은 책방의 역사가 되고, 책방은 손님의 기억이 된다.      



누군가의 시간을 소중히 기록하는 이곳의 이름은 책방공책, ‘비어 있는 책’이다. 

나는 이제 이곳 책방의 이름이 어째서 ‘공책’인지를 알 수 있다. 책방은 책으로만 이루어진 공간이 아니다. 독자가 없는 책이 가능성을 상실한 문자들의 나열인 것처럼, 책방 또한 드나드는 손님이 없다면, 그곳은 ‘책’이라고 불리는 물건들이 있는, 먼지 쌓인 창고에 불과하다. 책이든 책방이든 어떠한 물질을 완성하는 마지막 조각은 결국 ‘사람’이다. 그래서 책방은 언제나 공책처럼 비어 있다. 책들뿐인 공간은 늘 부푼 가능성을 품은 채, 자신을 완전하게 할 누군가를 기다린다. 공책과 책방은 그렇게 닮아있다. 자신을 채워 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비워 놓는다는 점에서 서로와 완벽하게 같다.      


책방공책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손님의 시간을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오늘은 어떤 손님이 책방의 가능성을 완성했을까. 그림책을 즐겨 읽는 아이였을까, 서정성을 사랑하는 단골이었을까, 아니면 책방만의 따스하고 아날로그적인 공기에 반해 찾아온 새로운 이였을까. 오늘은 또 어떤 이가 책방의 지면이 풍요롭게 했을지, 궁금해진다.      



책방공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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