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옥재 작은 도서관, 공간 휘도
계획이 매번 어그러지는 날이 있다. 경복궁에 갔던 날이 꼭 그랬다. 원래 계획은 궁 내에 있는 집옥재 작은 도서관에 갔다가 근처 북카페에서 힐링하는 것. 궁 산책을 한 번 하고, 차 한 잔을 마시고 느긋하게 도시를 누비다가 복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든 바뀌지 않는 사실은,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일은 단 하나도 없다는 것. 나의 허술하고도 대범한 계획은 ‘궁 산책’부터 어그러졌다. 주중에 궁을 방문하면 그래도 편안하게 관람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나의 얕은꾀는, ‘주중’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크지 않은 이들에 의해 무너져 버렸다. 현장학습을 온 학생들, 휴강일에 놀러 온 대학생들, 관광을 온 외국인들과 궁 나들이를 온 여행객들까지. (심지어 몇 가지가 복합된 이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수학여행 온 일본인 고등학생들 같은 경우.) 52시간(+a)가 만연한 노동 강국에서 주중과 주말의 구분이 크지 않은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던지. 궁은 주말과 다른 것 없는 모습으로 정신없이 북적였다.
넘쳐나는 인파 속에 홀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나의 첫 번째 미션은 ‘장애물 피하기’였다. 기록용으로 촬영하는 것이 아닌, (물론, 절반 이상은 기록용이긴 하지만) 공공 플랫폼에 올리는 영상을 찍을 때 가장 중요한 건 ‘사람 얼굴’을 최대한 담지 않는 것이다.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일단 눈코입이 달린 무언가가 영상에 찍혔다면, 편집 시 가려주는 것의 예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넘실대는 사람들 사이에서 카메라를 들고 걸어 다니는 건 그야말로 고역이었다. 프레임에 얼굴 하나가 잡힐 때마다 노동 시간이 10초씩 덧붙기 때문에 (10초면 차라리 다행일지도 모른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는 얼굴과 비슷한 무언가를 최대한 담지 않는 것이었다.
광장에서의 촬영은 그래서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내가 원하는 프레임 안에서 사람이 빠질 때까지, 그나마 적은 수만 남아 있을 때까지, 계속 서 있으며 기다리는 것이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뭐가 문제냐 할 수 있지만, 매번 한 장면을 위해 2-3분가량 멀뚱히 서 있어야 한다면, 기다림은 문제가 된다. 특히나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이 타이트하고, 도와주는 이 하나 없이 모든 일들을 홀로 해야 하는 영세 1인 아마추어에게 시간은 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익명의 행인 1의 사정에 누가 그리 큰 관심을 가질까. 다들 자기 구경하기 바쁘지. 덕분에 나는 예상보다 1시간 30분 정도 더 궁에 머물러야 했다. 1분씩, 3분씩 기다리던 시간들이 모이고 쌓여 90분에 이른 것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뭐, 푸념처럼 늘어놨지만, 늘 일상처럼 벌어지는 일이니까. 사실 그리 큰 문제도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궁에서 나온 순간에서부터였다. 앞서도 설명했다시피, 궁에서 나온 순간부터는 나름의 힐링 타임을 계획했었다. 길을 쏘다니며 평소 가 보려고 노리고 있었던(?) 책방과 북카페를 가 보는 게 전부였으니까. 그런데 맙소사. 가려고 했던 공간들이 전부 모종의 이유로 나를 밀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선 첫째,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since 1934)이라는 ‘통문관’은 운영을 하고 있지 않았다. 분명 영업시간 중에 들렸고, 휴일도 아니었는데, 서점은 아예 셔터를 내리고 문을 닫아버렸다. (폐점은 아니었고, 무슨 사정이 있어 하루를 쉬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인사동을 따라 즐겁게(?) 걸어 올라오던 나는 약간의 실망을 안고 다음 목적지로 향해야 했다. 한낮의 땡볕에 경복궁에서 인사동까지 패기 있게 걸어갔던 나는, 약간의 허탈함과 저린 다리를 안고서 망설임 없이 버스를 탔다.
다음 계획은 북카페 ‘파이키’. 최근 들어 힙해진 ‘서순라길’에 있는 아기자기한 북카페였는데, 여기도 시작부터 쉽지 않았다. 서순라길이 유명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주중 한복판에도 그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각종 카페들과 맛집, 캐리커처 작업실 앞에 줄줄이 사람들이 서 있는 걸 보면서 약간씩 불안이 몰려왔다. 두 집 건너 한 집씩 이렇게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 것이라면, 분명 내가 가려는 카페에도 사람이 많을 터. 촬영은 둘째치고 북카페 앞에서도 줄을 서야 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되었다.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더 식은땀이 났다. 특히나 이날은 집에 반드시 제시간에 도착해야 하는 모종의 사유(?)가 있던 날이라, 발걸음은 빨랐지만, 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또 한 번의 실패! 북카페 파이키는 발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다. 실내에 자리가 없어 인도까지 나와 자리를 잡고 앉아 있던 이들이 있었을 정도로. 유럽도 아닌 대한민국에서 손님들이 내부가 아닌 밖에 나와 앉아 있다면, 얘기는 이미 끝난 거다. 카페 어디에도 내가 앉을 자리는 없었다. (기껏해야 테이크아웃 정도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난 두 번째 장소에서도 그렇게 시도조차 해 보지 못하고 거절당했다.
이때부터 멘붕이 시작됐다. 경복궁, 통문관, 파이키. 세 장소들은 생각보다 가깝지 않았고, 이미 길에서 1시간 정도가 날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1시간 중 버스를 타는 10여 분을 제외하고는 내내 걸었던 터라, 더 걸어갈 힘도, 의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미 궁에서 3-4시간 정도를 내리 걸었다는 점도 참작해 주시라.) 목도 마르고, 배도 고프고, 날은 덥고, 되는 일은 없었다. 그냥 다 포기하고 그 길로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래도 한 번 찾아보기라도 하자. 다 포기하기 직전, 들었던 생각이었다. 그냥 찾아만 보고, 정 없으면 집에 가자. 그렇게 다 내려놓은 심정으로 마지막 장소를 검색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공간이 을지로 세운상가 뒷골목에 있던 ‘공간 휘도’였다. 북카페는커녕 ‘카페’라는 공간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좁고 번잡한 전자상가 거리. 기계 부품들이 제멋대로 굴러다니고, 가끔은 기름 냄새도 나고, 불꽃 파편도 튀는 좁다란 길에 그렇게 낭만 있는 공간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80년대 홍콩 느와르 감성을 그대로 옮겨와 재건해 놓은 반지하의 오묘한 공간. 적당히 알려져 있고, 고유의 선명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며, 신나게 설명할 요소들이 많은 북카페인 그곳은, 내가 본래 가려던 통문관, 파이키보다 더 내게 필요했던 공간이었다. (‘공간 휘도’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이 궁금하다면 아래 ‘2) 공간 휘도’를 참조하시라) 무계획, 무에너지, 무희망 상태였던 나를 구제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촘촘한 계획이 아니라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였던 막무가내의 선택이었다.
막다른 벽에 다다라야지만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높이 솟은 막다른 벽만 보고 지레 겁을 먹어 뒤돌아 도망치기보다, 막다른 벽에 부딪혀도 좋다는 각오로 마지막 한 발자국을 디뎠을 때 보이는 것들이 있다. 벽 그림자에 가려 눈에 띄지 않던 샛길이나, 바닥에 나동그라져 보이지 않던 접이식 사다리 등, 막다른 벽 코앞에서 발견하게 되는 예상치 못한 해결책들. 그런 해결책들은 우리를 종종 의외의 방향으로 이끈다. 여태껏 한 번도 생각지 못했기에 감동적인, 그런 유익한 방향으로.
궁에 갔던 날 나는 그렇게 세상의 묘한 흐름에 이끌려 더 좋은 장소에 당도하게 되었다. 계획이 전부 틀어져 한 시간도 넘게 길바닥에 허비했고, 에너지는 바닥을 쳤고, 망연자실함의 연속이었지만, 결국 그 절망이 있었기에 을지로의 좁디좁은 골목을 파고들 결심을 할 수 있었다. 막다른 벽을 만난 덕분에, 같은 장소를 보고도 더 감동할 수 있었고, 전화위복의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기뻐할 수 있었다. 고통스럽지만, 고통에 상응하는 쾌감을 함께 안겨 주는 막다른 벽. 생각해 보면, 막다른 벽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 듯하다.
물론, 언제든 가장 베스트는, 막다른 벽을 마주치지 않는 것일 테지만. :]
1) 집옥재 일원 : 집옥재, 팔우정, 협길당
집옥재는 ‘옥처럼 귀한 보배(서책)를 모으는 곳’이라는 뜻으로, 고종의 개인 서재이자 외국 사신들의 접견 장소로 사용되었던 공간이다. 본래 창덕궁에 있던 집옥재는, 고종이 경복궁으로 거처를 옮기며 함께 경복궁으로 옮겨왔다. 고종의 개인 서재로 이용되었던 공간이라 경복궁에서는 가장 안쪽 공간, 향원정 뒤편이자 건청궁 서쪽에 자리해 있어서, 궁의 정문인 남문(광화문)보다 북문(청와대 방향)에 더 가까이 있다.
집옥재는 총 세 채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는데, 세 채의 전각은 분리되지 않고, 긴 복도를 따라 이어져 있다. 일반적으로는 세 건물을 통틀어 ‘집옥재’ 혹은 ‘집옥재 일원’으로 통칭해 부르지만, ‘집옥재’는 중앙 서재만을 지칭하는 이름이며, 좌측 전각은 ‘팔우정’, 우측 건물은 ‘협길당’라고 이름 붙여져 있다.
집옥재에서 단연 눈에 띄는 점은 궁의 여타 건물들과는 확연히 다른 건축 양식이다. 특히나 팔각형에 2층짜리 누각인 팔우정은 한눈에 보기에도 조선의 전통적인 그것과는 다른 이색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집옥재 역시 궁 내 여타 건물들과는 다른 몇 가지 특징을 보이는데, 우선 중앙의 현판이 여타 건물들과 달리 세로로 걸려 있으며, 용마루 끝에 놓인 용 장식은 궁 내 다른 건물들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장식적이다. 실외의 장식적인 특징은 실내까지도 이어지는데, 집옥재로 들어서는 순간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건 벽과 천장의 강렬한 단청이다. 고풍스러운 청록색을 타고 이어지는 오방색의 무늬와 연꽃, 팔각으로 움푹 들어간 천장과 그 안에 그려진 용과 봉황 장식. 집옥재 내부는 경회루와 향원정을 포함해 경복궁 내에서 가장 화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한껏 폼을 내어 꾸며져 있다.
집옥재가 이토록 겉보이는 것에 힘을 쏟은 이유는, 개혁을 국가의 중차대한 과제로 여겼던 고종의 의지와도 관련이 있다. 집옥재는 고종의 개화정책 추진을 위해 탄생한 공간으로, 서재에 있던 4만 권의 장서들은 대부분 해외에서 들여온 서적들이었다고 한다. 국제 정세 파악과 개혁 추진 등 정책 추진에 앞서 임금의 식견을 넓히기 위한 도서들이었다고. 또한 앞서 언급한 바 있듯, 집옥재는 고종 개인만을 위한 서재가 아니라, 외국 사신들과 한 나라의 임금이 대면하는 접견 장소이자 외교적인 담론의 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새 시대를 도모하고, 외지인에게 국격을 보이는, 왕실의 얼굴과 같은 장소다 보니 고종도 분명 공간의 생김새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종은 당시 청나라 최신 트렌드를 반영해 집옥재를 건설했다고 한다. 새 시대를 맞이하고자 하는 다짐을 건축물을 통해 표현한 것이다. 조선 궁궐에서는 생경한 2층짜리 누각이 있고, 용마루 장식이 유독 화려하고, 현판이 세로로 걸려 있는 것은 전부 이 때문이다. 특히나 팔우정은 기존 누각과 달리 창문을 창호지 대신 유리로 마감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대단히 ‘현대적인’ 시도였다.
만백성과 전 세계에 조선 왕실의 위엄을 보이고자 지어진 건물은, 몇백 년이 지나 다시금 본래의 역할을 수행 중이다. 한동안 폐쇄되었던 집옥재가 몇 해 전부터 대중이 드나들 수 있도록 개방되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히 박물관식으로 보존해 눈으로 구경만 하도록 하는 게 아닌, 무려 대중들이 자유롭게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왕실의 작은 도서관’의 형태로 개편되어서 말이다. 관람객들이 직접 앉아 책을 꺼내 읽을 수 있게 하는 궁궐 도서관이라니. 정말 ‘센세이션’한 계획이다. 내 나라 궁이라서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생각을 해 보시라. 한 나라 핵심 문화 유적 안에 공공 도서관을 만드는 나라가 대체 몇이나 있을까? 그것도 방문객을 위한 별도의 건물을 신설하는 것이 아니라. 궁 안에 있는 ‘예전 그 건물’ 안에서 자유롭게 돌아디니며 읽을 수 있게 하는 곳이? 분명 전 세계를 다 뒤져도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리라. 그러니 이건 정말 혁신적인 기획이 맞다. (더군다나 그런 혁신적인 시도를 하는 공간이 조선 왕실 개혁의 상징과도 같았던 ‘집옥재’라니. 건물 본래의 의도와 정말 잘 어우러지는 기획처럼 느껴졌다.)
‘집옥재 작은 도서관’의 서가는 ‘조선시대 왕궁’이라는 공간에 맞는 책들로 꾸려져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영인본), 일성록(조선시대 왕의 일기), 규장각 및 장서각 자료들과 같이 조선시대 사료 원문이 담긴 두툼한 금장 도서들은 물론이고, 조선시대 예술, 문화, 역사를 설명하는 전문적인 역사서들도 찾아볼 수 있었다. 조선의 생활 풍속과 의복(그러니까 ‘패션’), 문학 등 조선시대 사람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책들도 있었으며, 한국 문학의 경우 외국인들도 읽을 수 있도록 외국어 번역판도 준비되어 있었다. (외국 관람객까지 고려한 건 누구 머리에서 나온 센스인지 정말 천재만재다.) 수많은 역사서들 곁에는 일반 도서들도 있었는데, ‘요즘 책’들로 구성된 몇 칸의 책장은 정독도서관 사서들이 큐레이션한 것들이라고 한다.
* 영인본 = 원본을 사진으로 촬영해 복제한 책, 원문을 그대로 살려 엮었다는 장점이 있다
집옥재 도서관의 책들은 대여할 수 없으며, 현장에서만 읽을 수 있는 것이 원칙이기에, 모든 책장 앞에는 방문객이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도록 독서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독서 공간은 집옥재와 이어진 팔우정에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고풍스러운 목재 책상과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아 있노라면, 한때는 왕이 머무르며 책을 읽었던 공간에 똑같이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이 밖에도 집옥재에는 또 하나의 볼거리가 있는데, 바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그곳만의 풍경이다. 집옥재에 오랜 시간 가만히 서서 그곳을 관찰하다 보면, 눈앞의 풍경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희귀한’ 모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오랜 전통의 목조 건물과 그 안에 들어선 현대식 책장과 책들, 책상과 의자들. 창틀 너머로 보이는 고궁의 풍경과 그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현대의 사람들. 절반은 한복을 입고, 절반은 요즘의 옷을 입고 있으며, 절반은 한국인이지만, 절반은 외국인인 그들. 과거와 현재, 국내와 국외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복합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 그곳만의 풍경은, 오직 집옥재에서만 목도할 수 있는 또 다른 관전 포인트다.
2) 공간 휘도
‘힙지로’라 알려진, 을지로4가역에 있는 홍콩 느와르 감성 북카페다. 힙지로라는 지리적(?) 특성에 맞게, 공간 휘도 역시 방산시장 골목 안쪽에 숨겨져 있다. 각종 공구와 기계, 조각과 조명 관련 ‘상사’들이 늘어선 좁은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아니, 이런 곳에 카페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뜬금없는 곳에서 카페 간판이 등장한다. (아니, 사실 등장하지 않는다. 카페 위치를 알리는 입간판조차 건물 안쪽 계단참에 서 있어서,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카페를 못 보고 지나칠 확률이 200%다. 그러니 혹시 카페에 찾아갈 예정이라면, 지도 어플 꼭 켜고, 두 눈 활짝 뜨고 가도록 하자.)
공간 휘도는 1층에 있는 카페지만 계단을 따라 반 층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입구에 올라서자마자 올라온 거리만큼 다시 철제 계단을 타고 내려가야 한다. 공간 휘도는 이렇듯 1층에 있지만, 1층에 있지 않은(?) 묘한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단을 오르내리는 의식(?)은 의외로 카페의 분위기에 적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공간 휘도는 카페라기보다는 영화 세트장이나 연극 무대 같은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머금고 있었는데, 현실에서 멀어지는 듯한 계단의 퍼포먼스는 그런 공간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거부감 없이 적응할 수 있도록 해 주었기 때문이다. (만약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고 바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면, 카페의 분위기에 쉽게 젖어들지 못하고 거부감부터 불쑥 들었으리라.)
범상치 않은 ‘공간 휘도’만의 분위기를 짧게 요약하면, ‘8-90년대 홍콩 영화의 낭만’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어둑한 분위기와 강렬한 붉은 조명, 천장에서부터 내려오는 쉬폰 커튼과 검정색 소파, 을지로 밤거리 풍경을 감각적으로 담은 고해상도 사진들과 영화 포스터. 신비롭고 이질적이지만, 동시에 묘한 자유분방함이 짙게 깔린 그곳에는 <영웅본색>, <중경삼림>, <화양연화> 등 전성기 홍콩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특유의 감성이 배어 있었다. 억압에 낭만으로 투쟁하고, 탄압에 예술로 저항해야 할 것만 같은, 현재는 사라진 그 시절만의 감성. 감독이나 배우, 작가들이 아지트 삼아 들락거리며, 담배를 하나씩 입에 물고서 커피를 안주 삼아 밤새 토론을 나눌 것 같은, 동양의 살롱 같은 분위기. 공간 휘도는 ‘지금은 없고, 홍콩 영화에만 있는’ 희부연 안개 속의 자유로움을 현실로 옮겨 놓은 공간이었다.
두서없게 질서정연한 가구와 책들은 ‘공간 휘도’만의 이런 분위기에 디테일을 더했다. 두서없고, 질서정연하다. 모순된 말 같지만, 모순된 두 표현만큼 이곳의 정체성을 잘 설명하는 단어는 없다. 서구식 앤틱 가구와 현대식 가죽 소파, 동양식 좌식 테이블과 평상, 한문이 빼곡하게 적힌 병풍과 둥근 테이블, 안락의자와 키 낮은 협탁까지. 전부 다른 카페에 있어야 할 것만 같은 가구들이지만, 공간 휘도에서는 이 가구들을 한 공간에서 전부 만나볼 수 있다. 말 그대로 ‘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가구들의 테마가 계속해서 달라지는 것이다.
공간 휘도에서는 책들마저 특별한 규칙이 없었다. 얼마나 규칙이 없었냐면, 이곳에서는 붉은 조명 아래, 그림책과 철학책이 한 책장에 꽂혀 있었다. 그 곁에는 소설과 에세이, 잡지가 있었고, 또 고개를 돌려 보면 독립출판 서적들이 있으며, 그중 몇몇 표지에서는 귀여운 캐릭터가 몽글몽글한 얼굴로 빙그레 웃고 있다. 을지로의 느낌 있는 밤거리를 포착한 고해상도의 사진들과 상반되는 과도한 깜찍함. 책방지기의 개인 취향으로 꾸려진 책장인가 보다, 생각하려다가도, 그렇다면 대체 책방지기의 취향은 무엇일까 되묻게 되던 아리송한 두서없음. 이곳은 책장마저도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통일성이 없다는 사실이 이곳에서는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책이든, 가구든, 인테리어든 ‘공통점이 없다’라는 규칙만큼은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으니까. 한결같은 질서 없음은 오히려 묘한 질서가 되어 ‘자유’라는 공간만의 주제 의식을 감각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하나 정돈되어 있지 않지만, 정제되지 않은 날 것이 오히려 아름다움으로 느껴지는 홍콩의 밤거리처럼, 이곳에서는 같지 않음이, 서로와 다르다는 사실이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그런 공간 휘도만의 규칙 없는 조화로움, 질서정연한 자유분방함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주었던 사물이 입구 근처에 있었던 고장 난 시계다. 카페의 입구 근처 책장에는 고장 난 시계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시침과 분침 모두 오래전에 갈 길을 잃은 모습이었다. 시간을 알리는 숫자는 존재하지만, 어디에도 시간은 없었던 둥그런 나무 시계. 제 기능을 하지 않는 시계였지만, 오히려 그 사실 때문에 공간 휘도와 더욱 잘 어울렸다. 세상의 규칙에 얽매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질서 그 자체를 뭉개버리지는 않는 ‘공간 휘도’만의 정체성. 자유와 비자유의 경계에 서 있는 회색지대의 뒤섞임. 멈춰 선 시계는 이곳만의 형용할 수 없는 분위기를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카페에 고장 난 시계 외에 또 다른 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좋았다. 멈춰 버린 시계가 진짜 시계를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공간의 정체성이 더 극대화된 느낌이었다.)
그런 공간의 분위기에 스며들었던 탓일까, 공간 휘도에서 나는 카페인이 듬뿍 들어간 커피를 시켰다. 카페 가서 커피 주문한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냐 코웃음 칠 수도 있겠지만, 카페인을 마시면 오만 부작용을 겪는 사람에게 커피 주문이란, 사실상 굉장한 일탈(?)이다. 특히나 논커피 옵션이 있음에도 설탕 한 스푼 들어가지 않은 쓰디쓴 커피를 시킨다는 것은 오늘 한 번 마시고 죽어보겠다(?)는 결의의 표현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쩐지 공간 휘도에서만큼은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곳의 분위기가 이끄는 대로, 짜릿함(?) 일탈을 감행해도 별 탈 없을 것 같았다. (차마 위장을 내다 버릴 수 없었기에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시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유는 내게 남은 마지막 이성이었다.)
한 시간가량 땡볕 밑에서 걸어 다녀서 에너지가 빠질 대로 빠졌던 것도 한몫했다. 에너지가 하나 없이 흐물대던 나는 공간의 분위기를 평소보다 더 쉽게 흡수했고, 힘아리 하나 없이 축 처진 혈관들은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카페인!(아니면 나 집에 못 가! 여기서 한 발자국도 더 못 움직여!)’을 외쳐 댔다. 그래서 나는 오랜 불문율을 깨고 커피를 주문했다. 그것도 진하디 진한 더치 커피로. 덕분에 집에 돌아가는 길 내내 심장이 두근거려 혼쭐이 났지만, 머리가 핑핑 도는 어지러움과 온몸에 피가 빠르게 도는 느낌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 휘도만의 감성을 기념품처럼 지니고 가는 느낌이었달까.
‘공간 휘도’는 불확실성과 불규칙성이 편재하지만,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기에 더 매력적인 곳이었다. 앞선 계획들이 전부 어그러져서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방문한 공간이었지만, 오히려 우연히, 즉흥적으로 찾아갔기 때문에 ‘공간 휘도’만의 자유분방한 오묘함에 더 절절하게 녹아들 수 있었다. (분명 철저하게 계획하고 찾아갔다면, 그날의 그 감성을 다시 느낄 수는 없으리라.) 그러니 만약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예술적인 분위기를 좋아한다면, ‘공간 휘도’는 꼭 한 번 가 보라 권하고 싶다. 공간 휘도가 선사하는 예측불허의 아슬아슬한 스릴을, 그대도 꼭 한 번쯤 경험해 봤으면 좋겠다.
막다른 벽에 다다르더라도 샛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던 북카페. ‘공간 휘도’는 깨달음의 순간과 색다른 경험을 안겨 준, 개인적으로도, 콘텐츠적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었던 공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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