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에 있는 서점>, ‘그림이야기’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사람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한 가지만 물어 보면 알 수 있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무엇입니까?” (p.113)
- 개브리얼 제빈, <섬에 있는 서점> 중 발췌
한 여자가 바다에 몸을 던졌습니다. 마을에 아무 연고도 없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날, 연고 없는 두 살짜리 아이 하나가 서점 어린이책 코너에서 등장합니다. 분홍색 스키 점퍼를 입은 연갈색 곱슬머리 아이. ‘마야’라는 이름의 소녀는 연한 베이비로션 향을 풍기며, 그렇게 느닷없이 서점 주인 에이제이의 삶에 불시착해 버립니다.
앨리스 섬의 유일한 서점 주인인 에이제이, 그는 사실 얼마 전 책을 도둑맞았습니다. 노후 자금으로 여기며 애지중지 아껴 오던 <태멀레인> 초판본이었죠. 몇 년 전 아내를 여의고, 인스턴트 카레와 싸구려 술로 매일을 가까스로 연명하는, 시들어가는 삶을 살면서도 그는 그 책만큼은 애지중지 관리해 왔습니다. 어찌나 귀하게 여겼던지 서점 주인이면서도 책을 서점 대신 자신의 집 거실, 습도 관리기 안에 보관할 정도였죠. 하지만 어느 날, 책은 사라져 버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아이가 서점에 등장했습니다. 마치 책과 아이를 바꿔치기 당한 것처럼,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져 버렸죠.
중년의 위기를 누구보다 거칠게 겪으며, 밤마다 술독에 빠진 채 사경을 헤매는 서점 주인과 일면식도 없는 외딴 섬에서 하루아침에 고아가 되어 버린 아이. 두 사람의 기이한 동거의 결말을, 독자인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매 챕터의 서두마다 등장하는 짧은 메모로 작가는 이미 둘의 관계를 밝히고 있거든요. 책은 매 챕터 시작 전, 아버지가 딸에게 적하는 책 추천사를 마치 ‘텍스트화된 간지’처럼 삽입해 두었습니다. A.J.F(에이제이 피크리)가 딸 마야에게 적은 이 메모들은 묘하게 후술되는 챕터와 맥락을 같이 하며, 앞으로 등장하 내용을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소설적 장치로 작용합니다. 그래서 후반부쯤 가면 챕터 제목만 읽어도 뒷 내용을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죠. <고자질하는 심장> 책을 소개한다면 ‘누군가가 고자질을 하겠구나’ 혹은 ‘어떤 고자질이 마침내 밝혀지겠구나’라면서, <서적상> 책을 소개한다면 ‘이번 챕터의 주인공은 서적상이겠구나’라면서요.
하지만 매 챕터 서두에 등장하는 메모는 어딘가 석연치 않습니다. 모든 메모는 과거형이고, 하나같이 삶을 회상하는 어투입니다. 아버지가 딸에게 전하는 애정 어린 메모라고만 생각하기에는 어쩐지 비약이 있죠. 타인에게 전하는 형식을 한, 자신에게 전하는 메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써 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테지만, 타인에게 보내는 말들은 사실 자신에게 하는 말들이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남기는 조언과 훈수는 사실 높은 확률로 젊은 날의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인 경우가 많죠.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왜’입니다. 왜 서점 주인은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등장한 어린아이에게 책을 소개하는 메모를 적기 시작했을까요? 왜 갑자기 그는 책을 더듬어가며 기록을 남긴 걸까요? 왜 그는 이토록 지나온 삶과 아이에게 집착하며 글을 쓰게 된 걸까요?
그 답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책을 직접 읽어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남기는 문장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에이제이가 삶의 끝자락에서 마주하게 되는 굵직한 사건은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반전’ 빙산의 아주 작은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섬에 있는 서점>은 그만큼 작은 반전들과 비밀, 그리고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재미있는 건, 이 소설이 겉보기에는 그저 서점 주인과 섬에 있는 서점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하루하루를 그리는, 잔잔한 일상물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챕터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비밀, 유의미한 해를 가하지 않는 선에서 서로에게 전했던 거짓말과 말 못했던 진실들이 하나씩 밝혀지며, 점차 이 책이 일상을 다루는 소설인지, 마이크로한 사건들이 반복되는 추리물인지 혼동되기 시작합니다. 등장인물들의 평온한 일상에 안주하려 할 때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한 번씩 불쑥 등장하거든요. 하루아침에 에이제이의 삶에 불시착한 마야처럼 말이죠.
그래서 소설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작은 문제들이 반복되는 전형적인 미국 드라마 시리즈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일상극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일상을 사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든, ‘TV 드라마용 일상’이 반복되는 ‘일상물’ 말이죠. 그래서 소설은 상당한 흡입력이 있습니다. 재미의 관점에서 특히 훌륭하죠. 미국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들이 전 세계적으로 넘쳐나는 이유는 미국 드라마가 ‘재미’ 부문에서 독보적인 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책장이 훌훌 넘어가고, 어느새 끝을 향해 달리게 되는, 정석적인 이야기의 매력을 지니고 있죠.
소설의 매력을 굳이 구체적으로 상술해 보자면, <섬에 있는 서점>은 ‘체리 스파클링 티’ 같은 책입니다. 체리의 달콤한 로맨스와 인류애, 탄산의 자글자글한 기포처럼 톡 쏘는 반전들, 그리고 차가 주는 안락함이 동시에 담겨 있는 이야기죠. 따뜻하지만 박진감 넘치고, 평온하지만 사건이 잇따라 벌어지는, 긴장의 끈과 인류애를 전부 놓을 수 없는, 신기한 다면성을 가진 책. <섬에 있는 서점>은 따뜻한 일상물을 좋아하지만, 마냥 잔잔하게만 진행되는 건 취향이 아닌, 스토리가 흥미로운 책을 선호하는 분께 꼭 추천해 드리고 싶은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