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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롱 Dec 12. 2020

연차는 의미 없는 프리랜서 노브랜드 잔혹사

나도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까

오랜만에 고향집에 내려갔더니 집앞에 ‘노브랜드’가 생겼다. 노브랜드는 이마트에서 설립한 자체 브랜드다. 차별화된 PB를 지향하면서 질 좋은 상품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는 가성비를 전략 포인트로 삼았다. 서울 외 지역에는 대용량 제품을 싼 가격에 살 수 있는 코스트코가 많지 않은데, 이런 니즈를 표적 삼아 노브랜드가 들어온 것 같았다. 롯데슈퍼나 이마트 대신 코코마트나 큐마트가 지키고 선 우리 동네에 노브랜드가 생겼다. 대기업의 촘촘한 그물이 여기까지 내려오다니! 이 정도면 가히 저인망어선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하여간 그 작은 동네에 들어 선 노브랜드를 보며 나는 엉뚱한 상념에 잠겼다. 노브랜드라니. 브랜드가 없다니. 이마트라는 브랜드가 버젓히 있지 않은가. 왜 이름을 저렇게 지었을까. 그러고보면 노브랜드라는 이름은 참 인기 없는 프리랜서의 인생을 닮았군. 대중에게 알려진 이름도, 초록창에 검색하면 나오는 검색결과도 없는 프리랜서야말로 노브랜드지. 그러고보면 무명의 프리랜서야말로 노브랜드처럼 저가에 대용량의 작업물을 제공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 식으로 싼 값에 노동력을 잔뜩 갈아 넣고 나면 프리랜서에게 남는 건 최저생계비에 가까운 돈과 망가진 몸뿐일텐데 말이다. 프리랜서가 저 가격에 자신의 작업물을 후려치면 삼 년 안에 무너질 일인데, 대체 노브랜드는 어떻게 버티고 있지?


노브랜드는 당연히 잘 버티고 있었다. 노브랜드 전략이 마케팅에서 연구될 정도로. 대기업이 가진 유통망에, 갈아 넣을 충분한 인력과 자본이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름이 없는, 그야말로 노브랜드의 프리랜서가 그렇게 자신을 갈아 넣으면 오래 버티지 못하고 곧 무너지고 만다. 프리랜서는 고작 한 명의 개인이다. 기계식 생산을 가능하게 할 설비도 없고, 그들이 맡은 일이 이미 구축해 놓은 시스템으로 일을 계속 만들어나갈 수 있는 작업도 아니다. 그런 일이었다면 프리랜서에게 맡기기 전에 클라이언트 회사가 진행했을 테니까.

연차는 의미 없는 노브랜드 커리어 잔혹사 


도대체 프리랜서들은 자기 브랜드를 어떻게 만드는 걸까? 프리랜서를 처음 시작하면 당연히 대중은 물론이고 클라이언트도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첫 클라이언트를 잡는 일은 그래서 어렵다. 많은 경우 프리랜서는 조직에서 일하다가, 조직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밖에서 일을 시작한다. 관광청에서 일하던 마케터가 퇴사를 한 뒤에, 프리랜서로서 관광청 온라인 블로그 관리를 한다. 출판사에서 일하던 편집자가 조직을 나와서, 외주로 전 회사의 책을 편집한다. 그 일을 디딤돌 삼아 포트폴리오를 만들고, 다른 클라이언트에게 일감을 받는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외주 경력이 많아지면? 브랜드가 쌓이고 일의 단가가 높아지고 프리랜서는 돈을 차곡차곡 모아 내집마련에 성공!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프리랜서는 일 년차든, 삼년 차든, 오년 차든, 십년 차든 페이에 큰 차이가 없다. 이제 막 업계에 들어 선 꼬꼬마 디자이너나, 프리랜서 업계에서 십 년을 버틴 경험 많은 프리랜서나 페이는 엇비슷하다. 정말이지 동기부여 안 되는 절망적인 팩트다. 조직 안에서는 승진하지 않더라도 연차가 쌓이면 급여를 더 많이 주기 마련이나, 프리랜서의 세계는 냉혹하다. 연차는, 사실 큰 영향이 없다.

사실 페이를 비슷하게 매기는 클라이언트의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그들에게는 작업 결과의 미세한 차이가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캘리그라피를 십 년 한 사람의 붓 터치는 분명 일 년 한 사람의 그것과 전문가의 입장에서는 크게 다를 것이나, 일반인의 눈으로는 “저게 쪼금 더 잘 그린 것 같은데?” 정도의 수준일 수 있다. 경력 20년의 회계사가 5년차 회계사보다 좀 더 폭 넓은 지식이 있을 수 있으나, 고객의 입장에서는 “5년차 회계사가 더 친절하던데?”로 끝날 수 있다. 작업물의 퀄리티를 10점 만점으로 봤을 때 5점에서 7점까지 가는 데는 10년의 세월이 걸릴 수 있지만,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서는 5점이나 7점이나 아주 미세한 차이로 보일 수도 있다. “저 음원이 좀 더 좋네. 10만원 더 얹어줘!” 정도일까? 하여, 프리랜서는 2점을 올리기 위해 든 시간과 노력에 대한 대가를 받길 기대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자신이 느끼는 만큼의 페이만 더 얹어준다. 서로 만족할 만한 지점을 찾기가 참 어렵다.


그래서 일단, 비슷비슷한 커리어로는 승부를 내기 어렵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럼 프리랜서는 계속 노브랜드로서 저가 정책을 평생 고수해야 할까? 젊고 에너지가 넘치는 프리랜서들이 시장에 계속 들어오고, 우리의 몸뚱아리는 점점 병들고 쇠약해져가는데 언제까지 그들과 같은 리그에서 싸워야 한단 말인가! 경력은 쌓이고 나이는 들어가는데 여전히 페이가 똑같다면, 프리랜서는 평생 끝나지 않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는 기분이 들 것이다. 대체 내가 쌓아가는 포트폴리오가 무슨 의미인가 싶을 때도 있다. 

브랜딩을 위한 딴짓은 딴짓이 아니다


페이를 높이는, 그리고 나를 대체하기 어렵게 만드는(대체불가능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대체 불가능한 인력이란 거의 없다) 한 가지 희망은 나 자신이 브랜드가 되는 일이다. 연반인이나 인플루언서처럼 나 자신이 브랜드가 될 수도 있고, 나의 작업물이 나를 대신해서 브랜드로 살아남을 수도 있다. 며느라기를 그린 수신지 작가님처럼 자신만의 그림체를 구축해서 어디다 그려도 ‘저건 수신지 작가님 그림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할 수도 있고, 하나의 키워드가 제작자들을 대표하게 할 수도 있다. 누군가가 혹은 어떤 작업물이 대중에게 알려진 하나의 브랜드가 되면, 클라이언트와의 협상에서 조금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도 있다. 단순 연차로는 보장받지 못했던 페이가, 브랜드가 쌓이면 조금 올라간다. 


내 사례를 들어보자. 나의 프리랜서 생활의 기반은 ‘딴짓’이라는 콘셉트이다. 이 콘셉트가 구축된 출발점이 독립잡지 <딴짓>이다. 딴짓출판사는 <딴짓>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만들어졌지만, 사실 책을 팔아 수익을 얻는 것은, 게다가 독립잡지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건 백 명 중에 한 명도 채 되지 못한다. 사실 많은 독립잡지 발행인들에게 자신의 책은 클라이언트를 향한 포트폴리오 기능을 하기도 한다. <딴짓>을 보고 비슷한 책을 만들고 싶은 업체나 관공서들에게 연락이 종종 온다. 서울시 청년청과 함께 아카이빙북을 만들고, 남양주시도시재생센터와 함께 지역 잡지를 만든다. 영월군을 홍보하는 책 <그렇게, 영월>도 딴짓이 나오는 다큐멘터리를 인상 깊게 본 담당자의 제안에서 시작한 프로젝트였다. 독립잡지를 만들어 서점에 뿌리는 발행인들은, 자신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들고 제작사들을 방문하던 1990년대 뮤지션을 닮았다. 


(전문은 <우리 직업은 미래형이라서요>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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