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안의 첫 도시락을 쌌다.
어린이집을 만 2세 때부터 다니긴 했지만 도시락을 싸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올해는 봄소풍 때 도시락을 싼다는 소식을 듣고는 도시락통도 사고, 모양틀도 샀다. (그것 말고도 이것저것 더 사긴 했다.) 소풍이 언제인지 날짜도 안 나왔을 무렵이다.
5월이 되고, 정확한 날짜가 나오고는 '봄소풍도시락', '어린이집도시락'으로 검색을 해서 정안이 먹을 수 있는 게 어떤 것이 있는지 찾고 또 찾았다. 기본 재료인 달걀을 먹지 못하는 달걀알레르기 아이기 때문에 미(美)적으로나 미(味)적으로나 포기해야 할 부분이 많아서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물론 기본적인 김밥을 쌀 수도 있겠지만 정안은 자기가 싼 김밥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 단무지도 안돼, 시금치도 안돼, 달걀도 안돼, 시작도 전에 안 되는 게 많아 김밥은 리스트에도 오를 수가 없었다. 거기다 익숙한 음식만 먹는 기질의 아이라 몇 달 전부터 유부초밥을 자주 먹였다. 처음부터 잘 먹었던 것은 아니다. 유부초밥을 처음 해주었을 때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아마 시큼한 냄새가 싫었으리라 짐작을 해본다. 유부초밥 안에 들어있는 첨가물을 넣지 않고 소고기와 양배추를 볶아서 참기름과 소금으로만 간을 해서 유부 안에 넣어 주었더니 아주 잘 먹는 것이었다! 도시락을 쌀 수 있게다 싶었다. 그리고 국민 반찬 치킨너겟과 유부초밥, 볶음밥과 과일이 도시락 메뉴가 되었다.
소풍은 목요일. 화요일 밤부터 잠을 설쳤다. 내일 재료를 사야만 하기 때문이다. 괜스레 사진첩을 열어 내가 캡처해 둔 사진을 다시 본다. 유부초밥, 당근, 브로콜리, 치즈, 치킨너겟, 과일, 베이컨. 메모장에 적어 본다. 정안을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동네에서 가장 큰 식자재 마트에 들렀다. 당근은 하나에 2천 원이 넘었고, 브로콜리는 중국산만 나온다고 뺐다. 과일은 좋아 보이는 것이 없어서 다른 마트로 가 보았다. 다 사지 않았지만 3만 원이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이럴 거면 그냥 사 먹이는 게 낫겠는데? 집 근처 마트로 가서 과일을 훑어보았지만 역시나 살만한 과일이 보이지 않았다. 사과나 바나나는 변색 때문에 안되고, 방울토마토나 키위는 먹지 않고, 그나마 잘 먹는 게 딸기와 샤인머스켓인데 둘 다 시즌이 아닌지 영 상태가 좋지 않았다. 제주도의 과일은 맛도 상태도 좋은 것이 잘 없다. 특히 작은 마트의 경우는 더더욱이. 남편이 퇴근하면 과일 가게에 가서 사기로 했다.
아이 하원 후에는 소풍 가서 간식으로 먹을 스낵류와 보리차를 샀다. 과자를 사지 않는다는 걸 겨우 꼬드겨 사게 만들었다. 딱 하나 고른다. 고소미다. 초코송이를 하나 더 담고 다시 마트를 나섰다. 아직도 장을 다 보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쯤 되니 내가 이 소풍을 더 기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와 아빠가 없이 혼자 먹는 첫 도시락. 이 도시락을 열기 전 아이가 느낄 기대감, 열어보았을 때 아이가 느낄 기쁨과 행복의 감정들을 생각하면 이렇게 준비를 하는 것이 전혀 아깝게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 밥을 다 먹고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새벽 6시 30분에 알람을 해두고 잠이 들었다. 신경을 쓴 탓인지 자연스럽게 6시쯤 눈이 떠져 그대로 일어나 밥을 안치고 재료를 손질했다. 크게 어려울 게 없는 메뉴들이었지만 그래도 일찍 일어났다. 도시락을 상하지 않게 가져가려면 모든 음식이 다 식은 다음에 뚜껑을 닫는 게 좋다고 해서 음식이 식을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볶음밥에 들어갈 양파와 당근, 베이컨을 작게 다져주고, 유부초밥 밥에 들어갈 양배추도 다져두었다. 데코레이션에 사용할 당근꽃, 치즈꽃도 잘라두고 김펀치로 눈도 잔뜩 잘라놓았다. 빨대 구멍으로 치즈눈도 만들어두었다. 밥이 다 되고 식는 동안에는 너겟을 구웠다. 대충 다 된 것 같았다. 소고기와 양배추로 만든 볶은밥을 유부초밥을 싸고, 볶음밥은 곰돌이 모양틀에 넣어 주먹밥을 만들었다. 어제저녁에 사둔 과일은 예쁜 모양이쑤시개에 꽂아 넣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본 정안은 딱히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유부초밥 하나 먹어보라는 말에 소풍 가서 먹을 거라고 딱 잘라 거절한다.
처음이라, 도시락이 처음이라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설레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했지만 가방에 넣어 보내는 순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떤 일을 하든 매일 처음과 같은 마음가짐이라면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풍 도시락이 뭐라고 이렇게 호들갑인가 싶겠지만 아이가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먹는 첫 그 순간을 상상하면 이건 수고로운 것도 아니다. 더 멋진 도시락을 만들어주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남은 유부초밥과 볶음밥은 아빠의 오늘 저녁 메뉴가 될 것이다.
다 안 먹어도 괜찮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텅 비어있는 도시락통과 기뻐했을 정안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