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시골라이프가 업그레이드되었다고 느꼈을 때는 처음 고사리를 꺾으러 갔을 때이다. 제주의 삶에 진짜 스며든 것 같아서 뭔가 색다른 기분이 들었더랬다. 또 꺾으러 가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만큼 즐거운 노동이었다. 최근에 또 한 번 나의 시골살이가 업그레이드되었다. 바로 보말을 땄기 때문이다.
제주에 여행 온 사람들이 한 번쯤은 먹어보았을 보말칼국수와 보말죽의 메인 재료인 보말은 바다고둥을 뜻하는 제주도 방언이다. 보말칼국수집에서 '시가'를 볼 수 있기도 하다. 어떤 때는 전복보다 비싼 값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큼 귀한 식재료이다. 집에서 가까운 삼양해수욕장에 자주 가는데 물이 빠지면 항상 아주머니들이 큰 가방을 가지고 나오셔서 보말을 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딸 생각은 하지 않았는데 정안이 조금 크고 나서 무엇인가를 체집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 처음으로 보말을 따기로 했다. 보말이 어떻게 생긴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뭔가 알이 크고, 돌과 비슷한 색상을 띠고 안이 꽉 찬 무언가를 발견했고 남편과 나는 이게 보말이다!라고 확신을 했다. 따다 보니 정안의 모래놀이 바구니를 가득 채웠고 그때 뭔가 이상함을 발견했다. 바위에 엄청나게 붙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말을 따는 삼춘들의 보말 따는 속도가 아주 느렸기 때문이다. (*삼춘 : 삼촌의 제주방언. 성별 불문으로 남자 어른과 여자 어른에 통용되는 호칭이다.)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우리는 근처에서 따고 있는 분들께 여쭤보았고, 우리가 딴 것은 '약보말'이라고 불리는 보말류였고, 먹을 수는 있으나 쓴 맛이 강해서 먹지 않는다고 했다. 진작 물어볼 것을 괜한 짓을 했다. 역시 모르면 물어보아야 한다. 괜한 지레짐작으로 시작했다가는 시간만 낭비하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삼춘들이 딴 보말을 보니 우리가 딴 약보말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바위 깊숙한 곳에 주로 숨어있어서 기다란 꼬챙이 같은 장비가 필요했다. 삼각뿔 모양에 가까운 형태이고, 뒤집어 보았을 때 무지갯빛을 띄는 듯한 아름다운 색이 바로 보말이었다. 뒤늦게 시작한 터라 많이 따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따긴 했지만 나쁘지 않은 성과다. 집에 돌아오니 7시가 넘었고, 보말껍데기를 하나하나 솔로 씻고, 해감을 하니 12시가 다 돼버렸다. 보말죽을 끓일 때는 보말을 삶은 물을 같이 넣는다고 하니 깨끗하게 닦는 것이 좋다. 해감을 할 때는 바닷물과 비슷한 농도로 소금을 넣고 칼이나 숟가락 같은 철금속을 넣어서 하면 더 잘 된다고 한다. 검은 비닐봉지를 덮어두면 좋다고 하는데 없으니 사이즈가 딱 맞는 둥그런 접시로 어둡게 만들어 주었다. 2시간 즈음 지나서 보니 뱉어놓은 모래가 거의 없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싶어 친구와 얘기를 하다가 친구가 알려주길 조개처럼 뻘이나 모래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많이 뱉어내지 않는다고 했다. 바닷물과 비슷한 농도를 위해 물과 소금의 정확한 비율이 있겠지만 나는 그냥 휙휙 마음대로 넣은 터라 조금 싱겁긴 했다.
역시 모든 요리는 손쉽게 후루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 해감을 했으니 삶아야 한다. 너무 오래 삶으면 질겨진다고 20분 정도만 삶고 꺼내는데 찬물에 헹구게 되면 알맹이를 꺼내기가 힘들어지니 그냥 식히는 것이 좋다고 한다. 정말 인터넷 세상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삶고 난 후의 보말 색깔은 처음 분홍빛과는 많이 달라져있었다. 뾰족한 바늘을 불에 한 번 소독한 후 남편과 둘이 앉아 까기 시작했다. 밤 12시가 지난 시간이었지만 이것까지는 해놓고 자야 내일 아침에 죽을 만들 수 있으니 멈출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양이 많지 않아서 다행이지 않냐는 말을 하며 금방 보말 속을 다 꺼냈다.
까놓고 보니 제법 양이된다. 실망스럽지 않은 첫 수확의 즐거움을 눈으로 확인하니 피곤함도 사라졌다.
다음 날이 되어서야 진짜 보말죽을 만드는 순서가 되었다. 다양한 방법이 있었다. 저렇게 까놓은 채로 참기름에 먼저 볶다 보면 내장이 으깨어져서 자연스럽게 초록빛을 띠게 된다고도 하고, 초록색 내장을 먼저 잘라내고 채반에 걸러내면서 뒤늦게 넣는 방법이 있었는데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바다에서 친절하게 우리에게 보말의 생김새를 설명해 주셨던 아주머니께서 참기름에 한 번 볶으라고 하셨는데 어른들이 먹을 때는 그렇게 간단하게 요리해서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아이와 함께 먹을 거라 보말 살도 잘게 썰어야 하기 때문에 한 번에 볶는 것은 우리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서 내장을 갈아서 넣는 것을 선택했다. 믹서에 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우리집에는 믹서가 없기에 채반에 으깨는 방법뿐이었다. 보통 보말죽에는 야채를 같이 넣지 않지만 나는 호박, 양파, 당근을 함께 썰어 넣었다. 그냥 냉장고에 있는 야채를 같이 넣었다. 보말 특유의 향이나 맛이 조금 옅어지면 아이가 더 잘 먹을까 싶어서. 다행히 아빠는 아주 잘 먹었고, 정안도 좀 먹긴 했으니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물론 내 입에도 잘 맞았다. 하지만 보말보다 쌀의 비율이 많아서 조금 아쉬웠다. 계량이나 비율 생각하지 않고 다짜고짜 쌀을 불린 내 잘못이긴하지만.
처음 만들어 본 보말죽은 나에게 자신감을 불어주었다. 그리고 더 많이 보말을 따고 싶다는 욕심도 살짝 아니 사실은 많이 생겼다. 한여름이 되면 보말은 통통하게 살이 오른다고 하는데 그 보말을 따다가 나는 아마 녹아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우리 가족 같이 가서 보말을 따고 싶어졌다.
제주에 와서 보말칼국수 집을 가서 편하게 먹는 것도 좋겠지만 리조트에 묵거나 캠핑을 한다면 바다에 가서 보말을 따서 직접 만들어 먹는 것도 모두에게 정말 좋은 추억이 되지 않을까. 아이의 고사리 같은 손으로 딴 보말이 맛있는 요리가 되는 즐거움을 알려주면 이번 여름은 그것만으로도 행복으로 가득찰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