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lidayreading Dec 31. 2017

2017년 마무리 일기

1.4개월의 백수

4년을 다녔던 회사를 2016년 마지막날 퇴사했다. 20대 후반과 30대 초반. 패기와 열정 가득한 마음으로 다녔던 회사고, 다시는 까지는 아니더라도 영화 일에 대해서만큼은 질릴만큼 너덜너덜해졌던 터라 당분간은 영화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게 되어 행복한 인생의 공백이 생겼고, 뒤 늦은 운전면허를 땄다. 여자의 진정한 독립은 운전면허에서 시작된다고 하지 않던가. 신문과 책, 그리고 영화를 보며 평화로운 봄날을 보냈다. 박근혜 탄핵과 관련 정치적인 이슈들이 많았던 시기라 뉴스도 많이 챙겨봤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 글을 좀 더 썼다면 좋았겠지만 정말로 더할 나위없이 편안하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답답하기도 했다. 온전한 주부생활을 3개월 정도 하면서 느낀 건 난 '일'을 해야하는 사람이라는 확신이었다. 막연하게 '백수'로 평생 살수 있다는 확신을 다들 가지고 있겠지만, 직접 경험해보니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어떤 부분이 확실히 있었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기준점이 내게는 있었고, 어떻게 다시 일을 시작해야할지 고민이 생겼다. 하지만 8월까지 실업급여를 받게 되어있어서 언제 이렇게 쉴 수 있겠어 라는 생각에 걱정은 잠시 킵해두었다. 물론 결혼을 하지 않았었더라면 미국이든, 남미든 긴 여행을 한번쯤 떠났을거라는 생각은 계속 했다.

2. 새로운 일의 시작

전직장에서 몇 번 함께 일하며 알게 된 나도 좋아하던 영화 프로듀서 분께서 좋은 제안을 해주셨다. 독립영화 한 편을 배급하실 예정인데 마케팅을 해줬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제안 자체도 '쓸데없이 하는 거' 하지 말고, 진짜 '재미있게', '유의미'한 것들만 하자. 의미없이 빡세지 않게 일 할 것이다. 그렇게 <재꽃> 이라는 작품의 마케팅을 맡았다. 친한 디자이너까지 섭외해서 온라인 디자인을 맡겼고, 감독님과 배우 분들, 그리고 4명의 스태프와 함께 '기쿠지로의 여름'같은 행복한 여름방학을 보냈다. 전주국제영화제를 시작으로, 우리들은 자체적으로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던 '빡셈'을 만들어갔으며 그렇게 싫었던 '영화 일'이었는데, '역시, 다시 영화인가' 라는 마음을 갖게 해준 기이한 시간이기도 했다. 또 조직 안에서 최종 컨펌을 받았던 내가 스스로 프로젝트를 해나가며 한단계 성장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함께하는 힘을, 함께하는 기쁨을 배운 순간들이었고 그 마음을 관객들도 조금은 알아준 것 같다.

그렇게 한창 <재꽃>을 한창 진행하던 와중에, 역시 전 직장에서 같이 일한 적 있는 홍보마케팅사 실장님께서 함께 일할 생각이 없는지 제안을 주셨다. 일을 다시 해도 홍보마케팅사에 들어가진 않겠다고 마음 먹었었지만, 너무 좋은 분들의 부담없는 제안이었기에 3개월 프로젝트로 일을 시작했다. 7월 중순, 3개월로 시작했던 일이었지만 어느덧 현재까지도 다니고 있고, 당분간은 이 회사를 다니게 될 것 같다. 그 이유는 이 곳에서 '일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나를 '믿어주시는' 윗 분들 덕분에 오히려 더 책임감있게 작품을 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곳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곳이었다. 처음이었다. 일을 하면서 사람 때문에 힘들지 않다니. 그간은 조직 안에서 윗 분들의 눈치를 보느라, 혹은 회사 직원들 사이에 껴서 일 외의 것들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많았다면, 지금은 좋은 사람들과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라서 좋다. 그러니 업무도 더 빨리 끝나게 된다. 물론 이전 회사들에서 했던 작품들에 비해 지금 진행하는 작품들이 수월한 편이기도 하지만. 영화일을 한다면 꿈도 꿀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정퇴'를 하고, 저녁에 운동을 할 수 있고, 영화를 본다. 당진과 서울을 출퇴근하는 남들이 봤을 때 매우 비정상적인 패턴 속에서도 좋은 분들의 배려와 함께 제법 재미있게 일을 하고 있다. 또한 올해 부산영화제에서 본 너무 좋았던 한국영화를 하고 싶다고 제안해서 할 수 있게 된 것도 내겐 너무 의미있고 기쁜 일이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 일을 재미있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도 더할 나위없이 딱 지금처럼만 [평화롭고 평범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 내겐 벅찬 시간이었다.

3. 올해도 신혼

5년을 연애하고, 2016년 8월 28일 결혼한 우리. 하지만 결혼 직후에는 거의 매일 야근에 매우 불규칙했던 전 직장에서의 패턴때문에, 그리고 신혼 초에는 매우매우 챙겨야할 것들이 많고 정신이 없는 시간이었어서(제대로된 집이 완성되기까지..이케아를 몇번을 가고, 마트를 몇번을 가야하는지 모른다) 온전히 가족으로 함께 한 시간이 2017년 이었던 것 같다. 남편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결혼은 불편한 점이라곤...쉴 때 어디 여행가려면 눈치가 보이는 점 빼곤 없는 것 같다. 나의 남편은 신기하게도 결혼을 하고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나를 배려하고 사랑해준다. 물론 싸우지 않거나 마음 상하는 일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 또한 그의 바닥. 변할 수 없는 단점을 알고 있고, 그 또한 나의 최악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순간이면 자연스럽게 피하려고 노력한다. 머리만 똑똑한 나와 달리 생활적인 면에서 남편에게 배울 점이 워낙 많고, 그렇게 만난 새로운 세상이 있다. 때문에 나 자체도 가지고 있던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과 고전적인 남성에 대한 의식을 남편 덕에 벗어날 수 있었다. 앞으로 60년은 더 함께 살아야겠지만 적어도 지금처럼만이라면 우린 즐겁게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함께 할 때 가장 재미있고, 가장 편안하고, 나다운 모습이 나오는 사람이 남편이고 그 모습을 온전히 이해해줄 수 있다면 그 이상의 만족감이 있을까?

4. 한 마리의 고양이와 한 명의 멍뭉이, 강다니엘.

1월, 누군가 버린 냥이 한마리를 키우게 되었다. 잠시 설 연휴 기간 맡기려 했던 고양이였지만 함께 있는 동안 진한 애교를 우리에게 선사해주셨고, 그렇게 한 마리의 고양이가 우리 가족이 되었다. 고양이를 무서워했던 나였는데, 나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사랑스러운 냥이 샤미를 만난 이후, 진중권의 고양이 인문책을 사서 읽고, 냥이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야 말았다. 정말로 내게 올해의 기쁨은 [한 마리의 고양이를 만나게 된 것] 이다. 외로움을 크게 타지 않고, 반려동물과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던 나. 이제야 조금 알것 같다. 동물과 함께 공존하는 법을, 그리고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는 것. 그들에게는 어쩌면 사람보다 더 깊은 영혼이 있음을. 나에게 한 마리의 고양이 샤미는 내가 생각해 온 세상이 얼마나 작고 편협되었음을 알게 해 준, 진정한 기쁨이었다.

원래부터 아이돌에 관심은 있었지만, 10대 이후로는 왠지 모르게 나이 차이도 많이 날 뿐더러, 음악 그 본질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아이돌과 조금 멀어졌었는데, 한 명의 대형견 스타일의 귀여운 소년이 나를 찾아왔다. 유부녀 아줌마가 다니엘 좋아한다고 하면 민망하기 그지 없지만, 그래, 난 강다니엘의 덕후가 되어버렸다. 그를 통해 소비의 기쁨(?)도 알게 되었고, 나의 긴 출퇴근 시간에 워너원 영상을 보면서 힐링-하던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아주미한테 강다니엘이 왜 좋냐고 묻는다면, 부끄럽고 딱히 뭐라고 얘기해야할지 모르겠지만 그를 통해 기분 좋은 에너지와 설렘을 얻었다. ^^ 일단 무대 위에서의 남다른 춤선과 눈빛, 그리고 건강한 정신을 가진 것 같아서 좋다. 긍정적이고 열정적인 기운을 가득 품은 자신감 넘치는 청년. 그 청년을 응원하고 싶고, 함께 얘기해보고 싶다. 그래, 최유리. 2017년 이유없이 정말 즐겁게 즐겁게 덕질했다. 물론 지금도 주책맞게 좋아한다.


5. 여전히 사랑하는 책과 영화 그리고 팟캐스트

책과 영화, 영화와 책. 무엇을 더 사랑하는 우선순위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영화 일을 해서인지, 영화보다 책이 더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행위인 것 같다. 영화를 볼 때는 왠지 더 분석해야할 것 같고, 이 작품이 왜 잘되었는가 혹은 잘 될까?와 같은 류의 문제를 생각해야한다면, 적어도 책이라는 물리적 성질. 그리고 그 안의 텍스트들은 내게 무한한 영감과 긍정적인 인풋을 주는 유일무이한 행복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사놓고 읽지 못한 책이..쌓여가지만, 올해는 편중되어있던 나의 독서의 반경이 인문학적으로 조금 더 넓어진 것 같다. 이는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다양한 팟캐스트의 영향이 클 것이다. 팟캐스트를 통해 정말 세상을 인식하는 경계가 더 넓어진 것은 분명하다. 주로 들었던 건 물론 영화, 도서, 여행 그리고 정치 관련된 팟캐스트였는데, 팟캐를 통해 좀 더 좋은 취향을 가진 품격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이 쓰는 언어들을 나누며 행복했다. 주로 혼자 밥을 먹거나, 출퇴근, 샤워할 때 꼭 팟캐스트를 들었다. 많은 책을 읽었지만 내게 올해의 책은 <박열>의 가네코 후미코 자서선 [나는 나] 그리고 [사피엔스]. 올해의 한국영화는 [나는 노무현입니다], 외화는 [컨택트], [너의 이름은]. 그러고보니 모두 상반기에 만난 영화였다.

6. 여행

일년에 한번은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가는 것. 지금이야 어느정도 시간만 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스물셋, 첫 배낭여행 이후 규칙을 정하고, 원칙을 스스로 지켜나가기가 20대 땐 얼마나 힘들었던지. 결혼을 하고, 예기치 못했던 일을 시작한터라 멀리 떠나진 못했지만 올해는 도쿄에 2번, 국내엔 제주에 2번 다녀왔다. 처음 만난 도쿄는 나의 마음을 완벽하게 뒤흔들어 놓았고, 앞으로 운명처럼 자주 가게 될 것 같다. 뼛속 깊숙이 음각을 새긴 것 처럼. 도시 여자인 나는, 메가 시티 도쿄의 모습과 그 뒷골목에 숨을 쉬며 살아가는 그 특유의 분위기에 흠뻑 빠졌다. 다른 지역에서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한 문화적 혜택과 마케팅적으로도 배울 점이 많은, 섬세한 디테일이 넘치도록 꽉 차 있는 공간이여서, 도쿄 안에서는 문화적 소비를 충실히 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가장 중요시 하는 인풋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고. 많은 이들이 그렇겠지만, 나를 가장 숨쉬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여행이라는 도구는 평생 나와 함께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여행은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도. 언제나 그렇듯 다시 깨달았다.

5월 황금연휴, 10월 재꽃 출장 - 도쿄
9월 이노기획 제주 여행, 10월 시어머님 환갑 여행 - 제주

7. 꿈틀대는 것, 그리고 나를 인정하다.  

올해는 내게 새로운 변곡점을 준 해이자, 나를 사랑하게 되고 인정하게 된 해였던 것 같다.
커리어적으로도 새로운 출발을 했던 해이지만 생애 가장 느슨한 삶을 살기도 했고,

물론 아쉬운 점이나 속상한 점이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큰 슬픔이 없었던 한해였다. 무엇보다 이제는 아쉬운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생겼고, 이제는 나 자신을 인정하고, 나를 좋아하게 되어서 행복했다. 아쉬울것 없다는 말이 입 안에서 스스로 나올 만큼 좋은 분들과 함께 일하고 있고, 사랑하는 남편과 나의 기쁨 고양이, 그 자체가 쉼인 집. 한 때는 극적이고 열정적인 삶만이 나를 지탱해준다고 믿었고, 그렇게 사는 것만이 삶을 올바르게 이끌어간다고 생각했다. 나의 일상이 이렇게 앞으로 흘러가도 좋겠다고 느낄 만큼 마음의 여유를 느낀 한 해였다.

세상을 보는 관점이 더 넓어지고 싶어진 나의 2017년. 대한민국 또한 엄청난 변화를 겪었던 2017년. 개인적인 2018년 계획은 이미 머릿 속에 한가득이지만 그건 텍스트로 적기엔 역시나 너무나 뻔하고 지루하다. 그냥 언제나 그렇듯 매일 매일을 충실하게 살고자 노력하고, 나의 욕망과 생각을 좀 더 표현하고,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아름다운 취향을 가진 사람으로 좋은 자극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거다. 그리고 좀 더 나를 표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2017년에 내려놓은 힘빼기를 유지하기. 어깨를 눌러왔던 부담감과 책임감. 그리고 열정을 조금은 내려놓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