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미시적 안정감’을 회복해야 할 때
최근 한국 사회 속의 언어가 무섭도록 살풍경해지고 있다. '영포티(Young+Forty)'라는 표현은 어느새 중년들을 조롱하는 말로 인식되고, 해외여행 일정으로 학교를 빠지지 않는 학생을 '개근거지'라고 비웃거나, 중소기업을 욕설과 엮어 비하하는 등의 언어들을 이제 더 이상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의 비속어 수준을 넘어 빠르게 우리네 일상을 잠식해 가고 있다. 덧대어 이러한 언어오염 현상은 소셜네트워크 등을 통해 일종의 '밈(meme)'으로까지 소비되고 있는 지경이다.
냉소와 조소가 시대의 감정이 되고, 공격의 언어가 일상이 되어버린 사회. 이처럼 2025년의 대한민국의 감정온도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함께 급격히 식어가고 있다.
오랜 기간 한국 사회를 지탱해 왔던 중요한 가치 언어는 '잘살아 보세'였다. 해당 언어는 '우리도 잘 살 수 있다'는 보편성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 실제로 이상의 가치는 의무교육을 통해 구체화 되었으며, 이에 따라 사회 구성원 모두 '동일한 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라는 의식과 더불어 누구라도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라는 보편 신화를 만들어 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신자유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이러한 보편성의 믿음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빈부의 격차는 고착화 되었고, 사회 구성원 모두 서로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을 알기에, 즉 열심히 해도 자신이 기대하는 성공의 영역에 진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니 결국 남은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어떻게든 성공한 무리에 속하기 위해 혈안이 되거나 혹은 빠른 포기를 통해 자포자기 영역으로 빠지는 길이 그 대안이 되었다.
패배자로 조롱받지 않기 위해서는 방법을 따지지 않고 성공을 거머쥐어야 하고, 그 목표를 이루면 다른 이들이 진입하기 어렵게 사다리를 걷어차는 것이 신자유주의 시대의 '새로운 보편'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포자기한 이들의 자기방어적 선택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낮은 자리로 타인을 끌어내리며 그 동등성을 취하는 길이었다.
구체 사례를 들어보자면, 세대군 안에서 기득권 세대에게 밀린 청년세대는 일종의 억울함에 빠져있을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이 멈춘 상황에서 (무시당하지 않을 수준의) 직장을 얻기는 매우 어렵고, 심지어 기성세대가 퇴직 연장을 논의하고 있는 과정에서 그들이 획득할 기회 요소는 더욱 희박하게 보일 것이다. 그들의 분노는 기본적으로 출발 지점이 누군가와 다르다는 생각에 기인한다. 기성세대에 비해서, 강남 출신에 비해서, 전문직 부모에 비해서, 군대를 가지 않는 여성에 비해서, 출산과 육아의 전담에서 벗어난 남성에 비해서 등등.
이렇듯 지금의 청년세대에 보편의 믿음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월세, 등록금, 취업, 결혼, 내 집 마련 등 무엇 하나 자신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성실함은 어리석다'는 냉소가 자리 잡았다. 성실하게 일하며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은 더 이상 존중받지 못한다. 그렇기에 매일의 노력 대신 주식과 코인, 로또, 해외 취업과 같은 '한 방'을 노리는 문화가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그들 세대가 우러르는 성공의 모델은 극소수만이 독점할 뿐, 그 경쟁 속에서 패배한 무수한 이들의 비명은 차마 두려워 외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사회에서 '조소의 언어'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된다. '나도 별 것 없지만, 사실 너도 별것 없어' 라는 인식을 기저로, 높은 명성을 누리던 이가 여러 개인 이슈로 휘청할 때면 사회 구성원 모두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기는 데 온 힘을 다하는 것 같은 모습이 연출된다. 미디어도 그 상황을 한껏 즐기며 자신들의 기사 조회수를 늘리는 것으로 그것을 이용한다. 서로를 비웃음으로써 겨우 자존감을 지키는 모습은 일순 절박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밀어내는 냉소의 웃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냉소는 그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개인감정에 대한 파괴적 성질을 가중한다. 그 결과가 내부로 기인해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미쳐 무차별적인 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적지 않다. 자살, 묻지마 폭행, 혐오 커뮤니티의 확산과 집단행동 같은 현상의 심층에는 이러한 개개인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나도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는 깊은 두려움이 깔려 있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이를 '집단불안(Collective Anxiety)사회'라고 칭하고 있다. 가정이 빽빽한 노동에 잠식되고, 학교가 입시에 매몰되며, 사회가 경쟁에 노출된 구조 속에서 개인은 더 이상 정서적 안정을 느끼지 못한다. 누구도 나를 지켜주지 않고, 언제든 교체 가능한 부품처럼 취급한다는 것을 안다. 그 불안이 언어로 표출될 때, 바로 냉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한국의 냉소주의는 단순히 개인의 정서적 태도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 붕괴의 신호에 가깝다.
상당 기간 대한민국은 복지나 교육, 돌봄 등으로 사회적 긴장을 완화해야 할 국가의 역할이 다소 실종된 상태가 이어져 왔다. 특히 지난 정부의 12.3 계엄을 통해 일어난 조직적 내란 사태는 이러한 국가 공백 상황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사회 안정에 기여할 정치권이 오히려 사회 분열을 부추기고, 이러한 사회불안을 자신들의 지지 세력 결집 수단으로 활용하는 모습 속에 개개인의 시민들은 더 이상 공동체를 신뢰의 장으로 인식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가정과 학교, 직장, 사회, 국가 어디에서도 '서로가 서로를 지켜준다'는 믿음은 찾아보기 어려우니, 유무형의 자본을 획득하지 못한 소시민들은 계속 고립되어 갔다. 이와 같이 한 사회가 자기 구성원에게 희망을 주지 못할 때 그 사회는 서로를, 혹은 스스로를 조롱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폐단을 끊어내기 위해서라도 지난 내란 사태에 대한 사회적 진단은 조속히 이뤄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사회적 판단이 더뎌지고, 내란 혐의자 및 관련자들이 여전히 사회 안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모습은 시민들이 스스로 할 사회의 구조에 대한 문제 진단을 모호하게 만든다. 문제를 문제로 파악하고, 실패를 실패로 인식하며, 잘못을 잘못으로 판단해야 시민 스스로 주체적인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확보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과 비교해 무척 긍정적인 현상은 전 세계적인 K-컬처의 확대일 것이다. 한국의 콘텐츠가 점차 세계 수준의 보편화 과정을 구성해 가는 모습은 구성원으로서 무척이나 고무적이다. 유튜브만 보아도 한국의 음식, 한국의 음악, 한국의 드라마 등에 열광하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결국 K-컬처 역시 국가적인 거대 담론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지금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한 것은 이러한 거시적 담론이 아닌 개개인을 세밀히 다룬 미시적 담론으로의 전환이다.
어쩌면 이러한 미시적 안정감은 특별한 제도보다는 일상 속 관계의 온기를 회복하는 일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가정에서 부모가 아이에게 건네는 한마디의 존중, 회사에서 선배가 신입을 기다려주는 여유, 이웃 간의 사소한 인사와 신뢰 같은 것들 말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쓰는 언어의 회복이 무엇보다 절실하다. 냉소의 언어는 배려의 언어로 대체되어야만 한다.
또한 단순히 냉소적인 세대를 나무랄 것이 아닌, 경쟁 속에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 스스로 걸어 오를 수 있는 계단을 촘촘히 구성하고, 사회의 공정성과 보편성을 회복하는 일 또한 병행해야 한다. 그렇기에 향후 정부의 정책 관점도 국가적인 효능감보다 개인의 안정감 확대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잘 사는 국가의 가난한 국민'이라는 자조적인 표현은 더는 통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정말 '다 함께 잘 살아보세'의 구호를 외칠 시점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먼저 미시적 안정감을 복원해야 한다. 가정과 일터, 자신이 속한 조직 안에서부터 인간적인 질서를 회복하는 일, 각자의 자리에서 섬세함을 회복하는 우리의 일상 속에 그 답이 있다. 그리고 그 섬세함이야말로 냉소의 시대를 건너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을 성실히 살아가는 '소시민의 위대함'은 바로 그 안에 있다. 대단한 성공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자리를 지키며 주변을 돌보는 것. 그 작은 실천이 냉소의 문화를 바꾸는 시작이 될 수 있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게재되었습니다. (https://omn.kr/2g22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