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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꿈 Oct 09. 2023

14. 자애성에서 유익성으로의 전환(2)

'선'의 개념을 먼저 상정하지 않는 공동선의 추구 방식

사익과 공익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사익을 보호할 때 비로소 공동선에 대한 개념에서의 공(共)이라는 의미도 강화되는 것이라고 지난 챕터에서 설명 드린 바 있는데요, 더불어 이상은 시민의 덕성과도 전혀 배치가 되지 않습니다. 


비롤리는 개인의 이익이 공공선의 일부라는 것을 시민들에게 이해시키는 특별한 지혜, 관대한 정신, 그리고 공적 삶에 참여하고자 하는 정당한 욕구와 같은 내적인 힘이 시민 덕성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였어요. 따라서 개인적 자유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적극적으로 통치에 참여하여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상황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으로, 그 어느 개인이나 집단이 다른 타인 또는 집단을 강제하는 것을 막음으로써 상호성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개별의 주체들이 각자의 이익을 주장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해충돌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지만, 공화주의 사상가들은 자유와 관련된 문제들이 언제나 한쪽에서는 반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비난하는 방식으로 밖에 대답 될 수 없는 문제로 이해하였다. 이에 공동체 개개인들의 사적 이익과 자유를 바탕으로 ‘공동선(common good)’의 추구에 대한 논의가 무엇보다 중요해졌죠. 


사전에 먼저 말씀드릴 것이,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가치로서의 선을 뜻하는 ‘common good’은 그것이 정의되는 방식에 따라서 공동선(共同善)이나 공공선(公共善)의 의미 모두를 가질 수 있습니다. 때문에 개인들과 다양한 공동체를 비롯해서 하나의 국가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사회 구성원 전체 혹은 공공의(public) 선 중에서 어떤 것을 강조하느냐에 따라서 의미의 차이가 생길 수 있는데요, 가령 공리주의 모토인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처럼 개인의 이익이 함께 고려되는 사회 전체의 공동선을 추구하지만, 실제로는 사회적 공리가 곧 공동선이며 그것이 곧 공공선이라는 등식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이후에는 혼동이 없도록 ‘common good’을 공동이 구축해가는 삶의 방식이라는 의미에서 ‘공동선’으로 개념을 통일하여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 보면, 이상과 같은 공동선을 구성할 때 주의해야 할 것은 사회적 공동선을 개인의 자유와 병립시켜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시민 모두에게 동일한 공동선을 강요하여 그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피해야 하기 때문이죠. 공동선이라는 것이 모든 이들에게 좋은 것(또는 이익이 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더불어 사적 이익을 초월하면서까지 좋은 것이 아니잖아요. 개인들 모두가 하나의 공동선을 위해 봉사한다는 그런 유기적 공동체의 관념이 만장일치로 동의 되는 사회는 사실 환상이나 몇몇 디스토피아 콘텐츠에서 보던 독재 사회에 가까운 것이잖아요. 이상의 공동선의 개념이 현실 세계에서 보다 유의미한 것은 공동선이란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사회를 향한 집단적 열망 혹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공동 이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공동선에 대한 내용을 ‘정의감’으로 연결시켜 설명한 이가 바로 롤스(Rawls)인데요, 롤스는 공동체 안의 호혜성이 이타주의적 공평함과 상호이익 사이에 위치해 있다고 말하며 공동선의 개념을 설명했습니다. 그는 시민들의 자치에 기초하여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가치로서의 공동선의 추구라는 명분 아래 초래하게 되는 문제, 즉 개인의 권리와 정의가 전통적 의미의 공동선에 종속되어 개인의 자유를 강제하거나 부당하게 침해하게 되는 문제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스


그의 책 『정의론 A Theory of Justice』에서 주장하는 정의관은 단 하나의 정의관만이 존재한다고 가정하지도 또 주장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다수의 서로 경쟁하는 정의관이 존재한다고 상정하고, 따라서 당연히 다수의 정의 관념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죠. 자유주의적 측면에서 그가 일관되게 전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정의감(sense of justice)’과 ‘선관(conception of the good)’이라는 두 가지 도덕적 능력입니다. 


이 두 능력은 한 개인이 공정한 사회적 협력의 체계에 합의할 수 있는 충분한 참여자로서의 자격을 갖춘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정의감은 사회적 갈등 상황에서의 문제를 사회적 협력의 공정한 조건을 규정하는 공적 정의관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적용하며 행동하는 능력으로도 발휘되죠. 롤스의 이러한 정의관의 원칙은 바로 ‘공적인(public)’ 것이었습니다. 그는 특정한 ‘선’에 대한 개념을 상정하지 않으며 공동체 안에서의 ‘옳은 판단’을 중요시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논지가 세계시민교육 안에서 유의미한 이유는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 세계의 문제 앞에 개인들의 도덕성과 윤리성 혹은 특정한 선의 관념을 상정하게 되면 그 기준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가 수렴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조선 시대의 신유학에서 개인 윤리의 기준은 과거의 성현, 구체적으로는 ‘공자’와 ‘맹자’를 따르는 것이었고, 다시 공자와 맹자는 그 시절 개인 윤리의 기준을 ‘요 · 순 · 우’ 임금으로 삼았었죠. 이처럼 선의 표준은 특정한 사람에게 이양되어가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이에 롤스는 특정한 도덕적 · 종교적 신념이 정치적 문제 해결에 어떤 역할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는 서로 대립하고 갈등하기까지 하는 다양한 도덕관, 종교관, 가치관이 공존하고 있잖아요. 롤스에게 이 같은 현실에서의 정의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가장 중요한 실천적 덕목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상의 논의와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이 개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이기심’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고전적 공화주의는 이기심과 자기애(self-love)를 엄격하게 구분합니다. 전자는 물질에 대한 욕구를 의미하고, 후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죠. 그렇기에 자기애적 이익을 쫓는 이를 지탄하거나 가치 폄하할 수는 없어요.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내용은 이처럼 사익을 추구하는 개인이 암묵적으로 좁은 의미의 이기주의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사익도 존중하는 고차원의 이기주의를 스스로 택하는 행동전략으로 바꾸어 나감으로써 양측의사익 합을 극대화하는 타인에 협력하는 인간(homo conviventia)으로 진화해 나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이에 이후에는 협력하는 인간으로서의 부여되는 '책임성'을 다시금 구성원에게 요청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다음 챕터에는 바로 그 책임성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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