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번듯한 취미 하나가 필요했다.
#1.
새 학기가 시작되면 선생님은 으레 한 장의 문제지를 나눠줬다. 다행히 산수 문제는 아니었음에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야만 마칠 수 있었던 숙제. 그것은 부모님의 이름,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름, 존경하는 위인의 이름, 때로는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을 묻고, 본적도 가본 적도 없는 나의 본적과 혈통 따위를 묻는 종이였다. 모두가 따분한 내용뿐이지만, 종이의 맨 아래에는 어김없이 반가운 질문이 있었다. 내가 잘하는 것, 나중에 커서 되고 싶은 것, 그리고 취미. 나는 이 빈칸들을 또박또박 채웠다.
조금 더 나이가 든 언젠가 있었을 소개팅. 전공을 묻고 사는 곳을 묻고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영화, 휴일에 시간을 보내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할까. 종이 위에 또박또박 적어두곤 했던 나의 취미는 커져 버린 머릿속에서 다시 조합하고 다듬어야 할 미완의 대상으로 여겨졌다.
#2.
주말이 너무 싫었던 적이 있다. 아니 정확히는, 비어있는 시간이 싫었다는 게 정확할 것 같다. 놀기는커녕 잠 잘 시간도 부족하게 보낸 다섯 날의 평일 후에 돌아온 주말을, 고작 아무것도 안 하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데에 써버려야 한다면 더이상 아깝고 허무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미리 세워둔 휴일 계획도 없었을뿐더러 갑작스럽게 무엇으로 시간을 보내야 할지 생각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 무작정 집을 나섰다. 목적지가 없기에 멀리 가지도 못했는데, 동네 카페에 가서 노트북을 펴놓고 책을 읽거나, 책을 펴놓고 핸드폰을 하거나, 핸드폰을 보면서 옆 사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 따위를 훔쳐 들었다.
조금이라도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 나에게 취미는 다시 ‘빈칸’이었다.
아무래도 무료할 때 혼자 즐겨 던진 질문 ‘지금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SNS를 보면 모두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 혹시라도 누군가가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사진을 올렸다면 그것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은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취미를 가진 것이니까.
어쨌거나, 나도 무언가에 심취한, 또는 무언가에 확실한 취향과 안목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남들이 인정하는 매니아 까지는 아니더라도, 일과 여가를 딱 반 토막 내 줄 만한 관심사면 충분할 것 같았다.
취미를 개발한다는 명목으로 적지 않은 돈과 시간을 썼다(또는 허비했다). 주말마다 자전거를 탔고, 새로운 카페를 찾아다녔고, 매일같이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귀찮음을 억누르며 블로그를 관리했고, 새로운 자극이 필요할 땐 영어학원이나, 수영, 요가를 배웠다. 최근에는 목공방을 다녔다.
모든 이치가 그렇듯 첫술에 배부른 게 어디에 있겠냐마는, 취미를 갖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원래 좋아하던 것을 자연스럽게 취미생활로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정말 좋아하는 것을 찾아야 했기 때문에(고백하자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남들에게도 좋게 보이길 바라는 마음이 없었다고 할 수 없다).
시대의 취미
내 기억에 우리나라 성인의 취미가 낚시 아니면 등산으로 나뉘던 시절이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액티비티 말고도, 집에서 소소하게 꽃꽂이를 하거나, 뜨개질을 하거나 동네 어른들과 장기를 두는 것도 당시의 무시할 수 없는 취미 영역에 있었지만, 과거 우리나라 대중의 여가 활동은 아주 공통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서너 개 뿐인 TV 채널에서는 매번 같은 시간 애국가가 흘러나왔고, TV가 나오지 않는 나머지 시간 동안 집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비디오를 빌려 보거나, 신문을 보거나, 난초 위의 먼지를 또 닦아 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은 가족과의 주말 나들이, 여름 휴가를 더 기다렸던가. 지금처럼 집 밖에서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도 없었지만, 어쩌다 가족과 함께 여행이라도 가야 한다면, 그곳이 어디든 최소한 반나절을 달려야 했다.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구불구불한 도로, 가도 가도 아직 한시간이 남았다는 지루한 여정에서, 아빠의 취미를 위해 뒷자석에 앉은 그 시절의 모든 어린이는 차멀미와 힘들게 싸웠을 것이다.
그 시절 우리의 취미는 너무 소소해서 일상과 구분할 수 없거나, 때로는 큰마음을 먹어야만 가능한 일상 밖의 이벤트였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일상에 특별한 취미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기, 내연기관, 인터넷, 스마트폰..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발명과 혁신은 지구인의 삶의 질을 급격히 바꿔놓았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을 변화시킨 또 한 가지의 원동력은, 무료한 시간을 즐겁게 보내는 방법과 지혜에 대한 축적이 아닐까. 오늘, 취미의 종류는 전 세계 인구수만큼이나 되는 것 같다.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지만, 우리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존재조차 몰랐던 이색적인 취미를 즐기는 모습을 보면 적지 않게 놀랍다.
옛날에는 이런 놀잇감이 없었어
분명, 취미로 삼을만한 콘텐츠의 종류 자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개인의 즐거움을 바라보는 시선도 함께 다양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제 우리는 개인의 성별이나 나이, 사회적 위치를 취미와 연결 짓지 않는다. 가치관이나 생활 환경을 취미와 연결 짓지도 않는다. 각자가 즐거움을 대하는 방식을 존중하며, 주체적인 행동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취미의 진화와 함께 나타난 인간성의 회복이 아닐까.
취미의 재발견
취미는 행위의 즐거움이라는 가치를 지닌다. 즐겁지 않으면 쉽게 목적을 잃는다. 또, 취미에 있어서 즐거움의 가치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과 차이를 둔다. 행위에서 오는 즐거움의 지속 여부가 그것이다. 취미의 과정에는 노력과 인내가 필요하며, 이를 감수하고라도 계속하게 되는 즐거움이 취미의 원동력이다. 그래서 취미가 이야기하는 즐거움은, 단순한 쾌락의 감정이 아닌, 하나의 맥락으로 연결된 긴 행위의 과정에 있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나만의 관점과 태도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취미는 나다움의 발견, 정체성의 발견이다.
그럴듯한 취미를 원했던 나의 모습과 그것에 쏟아 온 노력들이 어느 시점에서는 아무 의미도 남아 있지 않은 '잃어버린 10년'과 같이 여겨졌었다. 아직 어느 것에도 매니아의 길에 접어들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일상 가까이에 두고 있다. 각각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간직하고 때로는 계속 써 내려 가고 있다.
같은 영화를 보고도 서로 느끼는 감정이 다르듯, 같은 행위에 대한 즐거움도 사람마다 다르다. 이제 누군가에게 취미를 물어야 한다면, 또 나의 취미를 이야기해야 한다면, 더이상 거창한 가치관이나 경험담이 아니어도 좋을 것 같다. 왜 이것을 좋아했는지, 이것에서 무엇을 느끼고 얻게 되었는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노동자여,
‘근로 시간의 단축’ 말고, ‘여가 시간의 증가’를 함께 이야기해보자.
BXC 배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