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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승지 Mar 11. 2023

외로움이 아닌 그리움으로


오늘은 제 본업과 삶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최근 5년 동안 같은 장소에 반년 이상 체류한 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십대 초중반을 열렬히 싸돌아다녔습니다. 급기야는 피스보트에서 일하면서 1년 반 동안 배를 타고 세계를 세바퀴 돌았으니 자주 나다니는 것을 넘어 아침에 눈뜨면 다른 곳에 있는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유엔에서 일하게 되면서 정착과는 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직업 특성상 한국보다는 해외에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고, 길게는 4년 짧게는 반년에서 1년 단위로 나라를 옮겨다니는게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과거 저에게 이런 삶에 만족할 수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없이 그리 대답했을 겁니다. 한비야 키즈로 자란 탓일까, 어린 날의 저는 험지를 누비는 구호 활동가의 삶을 깊이 동경했었습니다. 아마도 새로운 문화와 언어를 배우면서 다양한 나라를 돌아다니는 생활이 썩 자유롭고 멋있어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밥벌이를 해야 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저는 요즘 바람의 딸이 되기는 그른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이런 고민을 하기 시작한 건 어림잡아 2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저는 일본에서 동거라 쓰고 식객이라 읽는 생활을 한적이 있습니다. 세계일주 크루즈에 스태프로 승선하기 위해서는 최소 2달은 피스보트 사무국이 있는 도쿄에서 근무하며 출항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마땅히 머물 곳이 없었던 저를 수년 전 다큐멘터리를 출품한 영화제에서 만난 인연으로 연락을 이어오고 있는 친구가 회사 선배와 동거 중인 집에서 같이 살자고 제안해준 것이 계기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공식적으로 얹혀 살게 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보낸 하루하루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들은 아주 사소하기 짝이 없는 것들입니다. 아직 쌀쌀한 날씨에 아침마다 콘소메 스프를 끓여마시고 같이 출근하러 집을 나섰던 것, 퇴근하면 서로 안부를 물으며 맥주 한 캔을 까들고 영화를 보던 것, 주말 아침에 친구들이 깨우면 그제서야 느즈막히 일어나 호일에 싸서 바삭하게 구운 호밀빵에 버터 한 조각을 올려 먹는 것, 빨간 곰돌이 푸 점퍼를 멋대로 빌려 입고 이불을 말리러 자전거를 타고 코인 런더리에 가던 것, 그러다가 저녁을 차리기 귀찮으면 근처 야키니쿠 집에서 냅다 육개장과 김치를 시켜 먹었던 것. 



출근할 때마다 벚꽃이 늘어선 강가를 자전거로 지나쳤던 것, 그러나 역에서부터 집까지 돌아오는 길을 한 달 가까이 헤매 두 사람을 웃게 했던 것, 함께 돌보던 강아지가 가끔 이불에 쉬야를 해놓으면 비명을 지르며 빨래를 하던 일, 두 사람이 작은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며 조근조근 나누던 이야기들, 서로의 친구들을 초대해 보글보글 나베 파티를 하던 것, 특제 레시피라며 마를 갈아 넣은 나베 뚜껑을 열면 모락모락 퍼져 나오는 달큰한 냄새에 다들 환한 웃음을 지었던 것. 그 잔잔하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제가 오랫동안 바라고 꿈꿔온 이 일을 사랑해 마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이 일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이 나와는 맞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것 같습니다. 



가끔씩 울렁이는 이 감정의 정체를 수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 것도 같습니다. 네팔에서 지내면서 30분이면 배달되는 연어 초밥이나 크로플도 물론 그립지만, 아마 이 그리움의 본질은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금요일만 되면 떡볶이를 포장해오는 엄마와 마시던 맥주, 동네 친구들과 나누던 시덥잖은 이야기들이 가지런하게 떠오릅니다. 



막연한 동경과 이상이 삶과 현실의 형태를 가지고 찾아왔을 때, 제가 등진 것들의 무게를 그저 조용히 곱씹게 됩니다. 이 감정을 단순히 외로움이라고 이름 붙이기에는 버거우며, 그렇다고 불안함이라고 부르기에는 막연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저는 외로움보다는 그리움이라고 부르고 싶은걸지도 모릅니다. 혹은 사람은 어쩌면 그 오롯한 그리움 속에서만 더 다정해질 수 있는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한국과 일본에 있는 가족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음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순간이 외롭거나 불안하지 않음은 그 모든 안온한 시간과 다정함의 온도를 기억하며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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