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편리함이라는 특권
아이들은 제 핸드폰 사진 앨범을 구경하는 걸 좋아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이 찍혀있는 사진을 이리저리 확대해가며 한 명 한 명 이름을 묻습니다. 피스보트에서 일하면서 짬짬이 찍어둔 풍경이나 음식 사진에도 흥미를 보입니다. 그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신기해했던건 바로 바다를 담은 사진이었습니다. 사실 아이들이 바다 사진에 흥미를 가질거라고 생각을 못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장엄하게 솟아오른 히말라야의 산맥과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네팔에는 바다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마 네팔에서 태어난 아이들 중 많은 수는 평생 바다를 보지 못할 것입니다. 클릭 몇 번으로 간단하게 비행기 티켓을 살 수 있는 세상에서 여행은 모든 사람에게 허락된 권리가 아닙니다. 사실 내가 있을 장소를 상황에 따라 고를 수 있는 것 자체가 일종의 특권입니다. 여행을 위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과 여가로서 여행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매우 극명하게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올해 1월, 네팔 국적으로만 구성된 산악팀이 세계 최초로 겨울에 K2 정상 등반에 성공한 것이 각종 언론 매체에서 의미있게 보도되었습니다. 외국인 트레커들의 짐을 대신 지고 산을 오르는 포터나 등산 안내인 역할을 하는 가이드는 대부분 동부 티베트 계열의 셰르파 족 사람들입니다. 함께 정상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공식 기록에 그들의 이름은 기재된 적은 없었습니다. 네팔 국적의 산악팀이 이루어낸 성취가 더욱 의미있게 빛나보이는 이유입니다.
얼마 전 직장에서 중요한 발표를 하나 마무리했습니다. 국가 사업 전략을 중간 평가하는 자리였는데 역시나 화두는 기후 변화였습니다. 사실 인도적 지원을 아무리 재빠르게 하려고 해도 미친듯이 쏟아지는 비와 무너져 내리는 산길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아니 애초에 전략을 잘못 세워 놓고 질 수 밖에 없는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유엔이 해결하기 위해 수천 수억의 예산을 쏟아 붓고 있는 많은 분쟁과 기근은 기후 변화가 가져 온 직간접적인 결과물이니까요.
솔직히 좀 많이 이상하긴 합니다. 지구 한 편에서는 몇 년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 땅이 쩍쩍 갈라붙고 풀 한 포기도 자라지 않는다고 하던데. 네팔 산골짜기에는 매년 여름마다 비가 미친듯이 쏟아져서 농작물이고 가축이고 사람이고 정기적으로 싹 쓸어갑니다. 이쯤되면 뭔가 단단히 잘못된 것도 같습니다. 기후 변화에 대해 짤막하게 공부하며 알게 된 것은 이 위기가 모두에게 같은 위기감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수백톤의 비료를 전자동식으로 뿌려댈 수 있는 미국과 캐나다의 광활한 곡창지대 농장주와 가뭄과 메뚜기 떼가 창궐하는 남수단이나 에티오피아의 소작농이 같은 리스크를 짊어졌다고 볼 수는 없겠지요. 아마 자연 재해와 기후 변화가 기근을 유발하는 단일 원인은 아닐겁니다. 정부의 부패, 정책의 실패, 경제적 빈곤이 합쳐져 기근을 만듭니다.
피스보트에서 일하면서 파리협정의 최고 책임자였던 유엔 기후변화협약 사무총장 크리스티아나 피게레스의 강의를 통역하기도 했고 기후변화와 관련해서 활동하고 있는 수많은 환경 운동가들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충격을 받았던 순간은 저명한 학자의 워크숍을 통역했을 때도, 환경 운동가들과 인터뷰를 했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바로 저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세실제도의 작은 섬마을에서 온 제이나라는 젊은 활동가를 만났을때였습니다.
그녀는 피스보트 해양기후청년대사의 일원으로 바베이도스, 모리셔스, 세실제도, 피지, 팔라우에서 온 활동가들과 함께 자신들의 경험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해안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제이나는 몇년 전 자신의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서늘한 느낌에 새벽에 깨게 되었는데 이때 해수가 목뒤까지 차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녀는 집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내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고 제 눈이 닿지 않는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는 삶의 터전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실감했습니다.
모리셔스에서 온 이브라는 젊은 활동가는 저보다 2살이 어렸습니다. 활동가들이 3주간의 항해를 마치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저는 선내 이벤트를 장식하다 남은 장미 꽃을 선물했는데, 그녀는 너무나 기쁜 웃음을 지으며 꽃을 귓가에 꽂으며 이야기했습니다.
“너의 인생에 자연의 행복과 아름다움이 가득하길”.
그녀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모리셔스의 해안은 무더기로 투하된 플라스틱과 알루미늄 캔으로 오염되었으며 해안가에 위치한 집은 때때로 해수가 찹니다. 제가 매일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담은 일회용 잔과 빨대, 생각없이 뜯어버리던 비닐 봉투가 마치 그 해안에 내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물론, 개개인이 전기를 절약하고 쓰레기를 줄이는 노력이 아니라 산업계의 구조적인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은 머리로는 알고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날지 혹은 일어나지 않을지 모르는 일을 예방하기 위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정치적 고려와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며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한정적이라 결국 정치적으로 이용당할 뿐이라는 장황한 핑계를 늘어놓으며 지구 어딘가에 있을 또 다른 제이나와 이브에게 섬이 완전히 물에 잠길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