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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istgon Dec 15. 2020

가족 같아가 족 같던 시간들...

와이키키 아르바이트 체험수기

지금 시작하려는 이야기는 다시 생각해봐도 백 번 천 번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는 속이 다 후련한 이야기다.


휴..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심호흡을 한번 하고 시작해야겠다. 다시 생각해도 열 받기 때문이다.


아직도 가끔 자기 전에 이 일들이 생각날 때면 난 이불을 두 발과 두 주먹으로 콩가루가 될 때까지 차 버리고 싶어 진다.


어학생 신분으로 파트타임 잡(아르바이트)을 갖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거의 지인을 도와 용돈이나 장학금 명목의 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는데 개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너무너무 좋은 사장을 만나서 일터를 떠나서도 가족같이 지내는 사람들도 있는 반면, 어떤 사장은 어학생의 분리한 상황을 트집 잡아 마음대로 부리거나 최저 임금도 보장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나는 하와이에서 세 번 정도의 아르바이트 기회를 만났었는데 두 번의 가 '족같은 고용자'를 만난 후에야 진짜 '가족 같은' 고용자를 만났었다.


나의 첫 알바는 '파머스 마켓'에서 '아사이볼 만들기'였다. 당시 알던 일본인 친구가 본인의 지인이 하는 '아사이볼 가게'에서 갑자기 일손이 필요하게 되었다며 소개해준 일이었다. 조건은 토요일 새벽 6시부터 오후 12시까지 일하는 것이며 일당은 현금으로 $35이었다. '아사이 볼'은 하루에 두 그릇도 먹을 수 있을 만큼 내가 애정 하는 음식이었고, 새로운 체험을 해보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하였기 때문에 두 말 없이 하겠다고 하였다.  귀하디 귀한 아르바이트 자리에 '파머스 마켓'이라는 유명한 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니... 아르바이트 전 날 나는 소풍 가기 전날의 소녀처럼 설레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였다. 설레어서 잠을 못 잔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는 새벽 6시의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는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아르바이트 당일 새벽 4시에 일어나 첫 차에 몸을 싣고 파머스마켓이 열리는 곳을 향했다. 하와이의 버스는 유난히도 추워서 내가 버스를 탄 건지 냉장고를 탄 건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몸은 피곤할 대로 피곤했고 버스는 너무도 추워 버스에 앉아 있던 난 흡사 반건조 오징어와 같았다. 파머스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도착했지만 아직 밖은 보랏빛 새벽이었다. 하와이의 새벽은 유난히도 차가웠다. 아무도 오지 않은 파머스 마켓을 바라보며 바로 옆에 위치한 공원 벤치에 앉아 파머스마켓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자니 쓸쓸했다. 슬쩍 옆을 보니 노숙자 한 분이 웅크리고 주무시고 계셨는데 몸을 뒤틀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분은 뜬금없이 멀뚱하게 서있는 날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는 듯하였다. 곧이어 그분마저도 슬쩍 자리를 옮겨 그곳에는 달님과 나만 있는 것 같았다.


음악을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구경하고 있다 보니 곧 큰 차들이 파머스마켓으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파머스마켓에 참여하는 사람들이었다. 조금 지나니 아사이볼 사장이 탄 차가 나타났다. 사실 파머스 마켓에 오기 며칠 전 따로 아사이볼 가게 사장을 만나 미팅을 했었다. 그녀는 작은 체구를 가진 중년의 일본 여성으로서 나를 만나자마자 본인은 한국 드라마를 좋아하며 한국어 공부도 하고 있다고 말해 나의 마음 문을 열었었다. 미팅에서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훑어보고 조심히 일해 달라는 말만 하였다. 임금에 대하여 별 말이 없어서 먼저 물어본 것은 내 쪽이었다. 1일 도우미인데도 미팅을 할 정도로 철저한 사람이란 생각이 들어 오히려 좋아 보였다. 소형 승합차에서 사장과 사장의 딸, 그리고 함께 일하게 될 일본인 친구가 내렸다. 우리는 아사이볼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여러 가지 장비들을 차에서 내려야 했다. 가게에서 사 먹는 아사이볼은 귀엽기만 하였는데 그 아사이볼을 만들기 위해서 운반해야 하는 장비들은 거대했다.


체구가 자그마한 그녀들과 무거운 장비들을 맞들어 테이블도 깔고, 천막도 치고, 재료가 든 아이스박스도 내려놓는 등 낑낑거리며 몇십 분이 지나니 해가 뜨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럴싸한 아사이볼 가게 하나가 눈 앞에 뚝딱 지어져 있었다.


내가 하는 일은 바나나, 키위, 딸기, 파인애플 등의 '아사이 볼' 위에 올라가는 과일들은 예쁘게 써는 일이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무거운 짐을 다 옮기자 몇 명의 일본 여성들이 가게로 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인데 나는 왜 꼭두새벽부터 오고 저들은 왜 저렇게 느지막이 왔는지, 서로의 임금은 어떻게 다른지 궁금하였지만 하와이 속 작은 일본에 온 것처럼 일본어로 대화하는 그들 사이에서 나는 끼지 못하고 열심히 영업 준비만 하고 있었다.


파머스마켓을 시작하는 경적이 울리자 마켓 안에는 생기를 가득 머금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했다. 이 파머스마켓은 하와이 여행 책자에 실릴 만큼 유명한 관광 상품 중 하나였다. 그래서 그런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거의 여행객들이었고 표정들이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함께 일하는 일본인들은 특유의 콧소리 듬뿍 품어내는 목소리와 사근사근하고 밝은 에티튜드로 호객행위를 하고 있었다. 몇 개월 아르바이트를 하였다는 한 일본인 친구는 바나나를 썰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정수리를 관통하는 듯한 콧소리로 호객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 곳에서 3개월 넘게 일했는데 처음 온 나에게 ‘자신 처럼 3개월 넘게 일하면 시급도 올라갈 테니 열심히 해보라’며 미소로 격려하였다. 제2의 그녀를 꿈꾸며 나 또한 덩달아 일본 드라마에 나오는 발랄한 여주인공인 마냥 호객행위를 하며 과일을 열심히 썰어댔다.


처음엔 향기롭던 과일들이 시간이 지나자 똥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미친 듯이 과일만 썰어야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처음 과일을 썰어 본 것이지만 서투름이란 용납할 수 없는, 현장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밀려드는 손님들을 수용하기 위해서는 날아오는 수류탄을 막듯 칼을 쥔 손놀림은 신들린 듯 빨라야 했고, '달인'에 나오는 25년 동안 과일 썬 사람으로 빙의해야만 했다. 점점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특히 등과 허리가 갈라지고 끊어질 것 같았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 키가 160이 안 되거나 160 초반이었기 때문에 171인 나에게는 테이블이 너무 낮았던 것이다. 내 다리는 점점 벌어져 어느새 쩍벌녀가 되어 있었다.


손님이 많이 오는 게 좋은 것인데 손님이 정말 끊이질 않고 오자 점점 고통이 심해져만 갔다. 비라도 내려 모두가 집으로 가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과일을 써면서도 "아사이볼!!!"을 틈틈이 외쳐줘야 했는데 점점 나의 '아사이볼' 소리는 곡소리로 변해가는 것 같았다. 갑자기 아빠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졌다. 아빠 엄마께서 나를 키우시기 위하여 고생하시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우리 부모님은 내 미래가 이럴 것을 아시고 그렇게 온몸으로 고생하여 날 키우셨던 것인가...'


양파를 써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찔끔 나왔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일본어로 뭐라 뭐라 소곤대며 웃기도 하며 대화를 하는데 난 낄 수 없으니 오히려 과일을 묵묵히 더욱 열심히 썰게 되었다. 왜 영어도 계속 들으면 귀가 트여 어느 순간 다 알아듣게 된다고 하던데, 그 순간 난 혹시 내가 하와이에서 영어보다 일본어를 먼저 깨우치는 것은 아닐까란 엉뚱한 상상도 해보았다.


점심시간이 되자 사장의 딸아이가 "너 뭐 먹을 거야?" 라며 파머스마켓에서 판매하는 메뉴들을 줄줄 읊었다.

 

"태국 음식"


나는 몇 가지 메뉴 중에서 태국 음식을 먹겠다고 하였다. 사람이 뜸해지는 시간에 돌아가면서 밥을 먹는 시스템이었다.


"자! 이거!"


시간이 지나자 사장의 딸아이가 도시락 하나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미소진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넸다. "자 이거!!@)_$%(#(@#%^#$%&" 곧이어 다른 일본 직원에게 사장의 딸아이가 도시락을 건네며 길고도 상냥하게 일본어로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소외감이 느껴졌지만 어린아이한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유치하다 생각해 고개를 떨궜다. 그 순간! 함께 일하는 직원의 손에 들려있는 도시락을 발견하였다. 글쎄 나한테는 도시락을 한 개 줬는데 그녀에게는 두 개를 준 것이 아닌가? 혹시 나만 차별하는 건 아닌가... 맞았다!


오전 11시가 되자 파머스마켓의 종료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멘 아멘 감사합니다!' 너무도 반가운 소리였다. 링위에서 흠씬 얻어맞고 있는데 경기가 끝났다는 걸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 온몸이 벌써 여기저기 쑤시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그동안 아사이볼을 너무 무자비하게 먹어대서 아사이볼이 나에게 복수를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그날 난 아사이볼의 무서운 이면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우리는 처음에 설치한 천막, 테이블 등 각가지 물건들을 다시 차에 싣어야 했다. 천막을 치기 위해 동원된 시멘트 기둥과 전기를 돌리기 위한 발전기는 미친 듯이 무거웠다. 절대로 땅에서 떨어지고 싶어 하지 않아 발악을 하는 듯하였다. 그 무거운 것을 다시 차에 싣었다.


이제 집에 가나 싶어 허리를 폈는데 '아사이 볼' 사장이 "난다! 난다는 우리 집에 가서 뒷정리 좀 도와줘!"라고 하였다. 난 한국인의 근면 성실함을 왜 거기서 보이고 싶었는지 모르겠는데, 꼭 근면 성실한 한국인의 참모습을 보이겠노라며 다짐하며 그 차에 올라탔다.


와이키키에 살면서 '이런 동네가 있었어?' 싶은 외딴곳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그곳이 바로 사장의 집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이스박스, 믹서기 등등 대도구와 소도구를 세척하는 일과 천막 세척 테이블 세척 등 수많은 설거지들이었다. 낮에는 땀에 젖었다면 이제는 물이 흠뻑 젖어가며 그 일들을 혼자서 겨우겨우 해나가고 있었다.


"너 테트리스 잘해?"

“테트리스?”


사장의 딸이었다. '딸이랑 테트리스까지 해야 집에 보내주는 건가?' 싶었다.


"응"

"그럼 저거 저거 저거 들고 나 따라와."


한 4학년 쯤 되는 쬐꼬만 계집애가 엄마뻘 되는 나보고 큰 아이스박스들을 들고 자기를 따라오라고 부른 곳은 시커먼 창고였다.


"자! 지금부터 테트리스 한다 생각하고 잘 쌓아봐."

"으응..."


쪼꼬만 계집애가 엄마뻘 되는 사람한테 창고 정리를 그딴 식으로 시키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쩌랴. 저 아이가 뭘 안다고 싶기도 하고... 아직 일당도 못 받았고... 또 한국 사람이 얼마나 성실한지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악착같이 열심히 일을 하였다. 쬐꼬만 계집애는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참. 아무리 쬐꼬만 아이라 하여도 날 지켜보고 있자니 긴장이 되었다. '이렇게 쌓는 게 맞나? 허허' 하면서 겨우 겨우 일을 마쳤다. 정말 말 그대로 겨우겨우 이를 악 물고 일을 마친 것이다.


"난다! 오늘 수고했어. 고마워!"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니, 그 사실이 너무 기뻐서 함박웃음을 짓고야 말았다. 사장이 나와서 내게 맡긴 일이 잘 된 것인지 한 번 둘러보고는 "너무 고생했어!" 라며 살짝 미간을 찌푸려 가식적으로 진실 어린 듯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그녀는 나에 손에 돈을 쥐어주며 수고했노라며 다시 한번 손을 토닥여줬다. 나도 고맙다며 고개를 꾸벅이고 집을 나섰다.


처음 가 본 동네에서 버스 정류장을 찾아 헤매고 있자니 비가 내렸다. 몸도 힘든데 비까지 내리고, 안 되겠다 싶어 아무 버스나 보이는 대로 탔더니 노선을 잘 못 탄 것이었다. 결국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숙소에 도착하니 시계가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녹초가 되었지만 하와이에 와서 처음 내 힘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이 기분 좋았다. 소중한 일당을 주머니에서 꺼내 보는 순간 난 경악을 금치 못했다! 글쎄... 주기로 한 돈 보다 $10 적게 준 것이었다! 너무 화가 났다. 그러나 사장도 너무 바빠 실수한 것일 수도 있으니 일단 화를 될 수 있는 대로 가라 앉혀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린 후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고마웠어. 그런데 돈이 $10 부족한데?'

'저런! 내가 실수를 했어. 미안. 다음번에 줄게!'


너무 화가 났지만 고의가 아니라 실수라니 어떻게 하겠는가. 생각보다 너무 힘든 일이라 다음번에 일이 들어와도 안 가려고 했는데 못 받은 $10을 받기 위해서라도 다시 가야만 했다.


2주 뒤에 한 번 더 도와줄 수 있겠냐는 메시지를 받았다. 나는 $10을 받기 위해서라도 가야만 했다. 그날도 첫차를 타고 도착한 파머스마켓엔 역시 나뿐이었다. 혼자 빈 공간을 서성이고 있자니 눈치도 없이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하와이에서 내리는 비는 잠깐 내렸다 그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그저 비가 그치기만을 바라며 온 몸으로 비를 맞고 서있었다. 삼삼오오 파머스마켓에  참여하는 업체들의 차가 오기 시작했다. 아사이볼 사장님도 곧 오겠지 하는 맘으로 내리는 비를 계속 맞고 서있었다. 하지만 오기로 한 시간이 됐는데도 아사이볼 사장의 차는 보이질 않았다. 비를 맞고 어슬렁어슬렁 여기저기 기웃 거리는 내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맞은편 빵집 차 직원이 나에게 다가와 생수 한 병과 빵을 건네주었다.


"누굴 기다려?"

"아사이볼. 그런데 왜 안 오지? 오늘 안 오나?"

"연락해봤어?"

"응. 메시지 보냈는데 답이 없어."


삼십 분 정도 기다리자 아사이볼 사장 차가 나타났다. 함께 일하는 일본 직원들과 함께 왔다.


"미안 난다!"


그 말이 전부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다른 직원들과는 대화를 나누는 채팅방이 따로 있었는데 그 채팅방에 사장이 오늘 좀 늦는다는 메시지를 보내 다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도착했다고 하였다. 물론 나는 그 방에 없었기 때문에 이런 불상사를 면치 못했던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와서 그런지 손님이 너무 없었다. 게다가 날씨가 스산하니 아사이볼을 찾는 사람도 드물었다. 장사가 너무 안 되자 사장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와 다른 아이를 불러서는 "미안하지만 먼저 집에 가줘. 돈은 반만 줄게."라고 하였다. 옆에 있던 일본 아이는 아쉬워하는 표정이었지만 나는 한편으로는 신났다. 과일 썰기가 여전히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사장은 지난번처럼 고맙다며 악수를 하듯 돈을 손에 슬쩍 쥐어줬다. 내 심장은 두근두근거렸다. '혹시 $10 안 준거 아닐까? 내가 너무 사람을 의심하는 건가?' 예의상 그 앞에서 돈을 세어보지는 못 하겠고, 그렇다고 또 떼인 돈을 못 받으면 억울해서 어쩌나 싶어 에라 모르겠다 용감하게 물어봤다.


"지난번 $10 도 준거야?"

"아차 차차차 차차차!!!! 아이고 미안해! 여기!"


내가 말을 하고 나서야 그녀는 주머니에서 $10을 꺼내 손에 다시 쥐어주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번에도 지난번 $10을 주지 않았겠지? 난 너무 화가 났지만 그 앞에서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에 고맙다는 말을 하고 파머스 마켓을 떠났다. 어차피 다시는 안 볼 사람이니까 화내는 것조차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나의 첫 아르바이트였다. 난 그렇게 힘들게 번 돈을 하와이에서 만난 당시 꽤 힘들어하던 한 여행객에게 성경책을 사주는 데 사용했다.


다시는 일본 사람과 일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좋은 일본인도 만날 수 있겠지만 일단 소외감이 느껴져서 싫었다. 나는 다시 누군가의 일을 도울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말이 잘 통하는 한국 사람과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 사람이 돈을 잘 벌 수 있게 큰 이바지를 하는 감동적인 직원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그럼 참 보람될 거 같았다.

곧 나에게는 두 번째 아르바이트 기회가 생겼다. 기독교 신자로서 신앙이 좋다는 한국인 부부가 운영하는 로컬 식당이었다. 주 고객은 하와이 현지 사람들이며 메뉴는 햄버거, 샌드위치, 파스타, 하와이식 덮밥 같은 것이었다. 당장 일손이 너무 급한 식당이었기 때문에 하와이 현지인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지만 언어가 안 되는 나도 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내가 할 일들은 음식을 만드는 것 과 청소하는 것 등등 육체로 하는 잡다한 일이었기 때문에 언어가 유창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이름이 어떻게 되죠?"


남자 사장님은 근사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보셨다.


"신 고은입니다."

"아. 그럼 미스 고라고 부르면 되겠네요."


아니, 미스 신인데 왜 미스 고라고 부른다는 건지 좀 웃겨서 "아. 라스트 네임이 신인데요. 퍼스트 네임이 고은. 신 고은"이라고 다시 정정해 드렸다.


남자 사장님은 학생주임 선생님처럼 생기셨고 여자 사장님은 가정 선생님처럼 생기셨었다. 남자 사장님은 웃음기 없이 늘 진지하고도 근엄한 표정을 짓고 계셨고, 여자 사장님은 늘 입가에 미소가 번져 있으셨는데 두 분의 모습은 전형적인 얌전한 모습이었다. 두 분은 한국에서는 대기업을 다니셨다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꽤 자주 하셔서 사장님 내외를 생각하면 '대기업'이 딱 떠올랐다. 그래서 그런지 남자 사장님은 그 나이 때 어른들 치고는 언어 실력이 꽤 되는 듯하였다.


"미스 신. 영어 신문 기사를 많이 읽어봐요. 소리 내서 읽고 따라 쓰고. 전 그렇게 공부했어요. 그럼 외국인이 물어봤을 때 바로 말할 수 있게 되고, 여하튼 영어 실력이 아주 쑥쑥 늘 거예요."


남자 사장님은 가끔 어떻게 하면 영어 실력이 느는지에 대하여 본인의 경험에 의거한 팁을 알려주곤 했었다.


"내 별명이 미꾸라지였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내가 그만큼 조직에서 중요한 존재였어요."


가끔 남자 사장님은 과거 대기업 생활을 회상하며 희열 가득 담긴 반 웃음(입술이 반만 올라가는)을 짓기도 하였다. 하지만 도대체 그 미꾸라지 이론이 뭔지는 몇 번을 들어도 이해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사장님 내외와 시간을 가질수록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역시 한국인이라 말도 잘 통해 속이 다 시원했다.  난 지난번 일본 사장에게 당한 아픈 경험에 복수라도 하듯 정말 열심히 일하였다.


손님이 앉아서 식사를 하고 나가면 사장님이 시키기도 전에 재빨리 벌처럼 날아가서 깨끗하게 행주로 테이블을 치웠다. 쉬는 시간에는 포장용 비닐봉지를 접었고, 빨대가 비어있으면 빨대를 채우고, 케첩이 떨어졌으면 케첩을 채우는 등 정말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열심히 일을 하였다. 일 하는 동안은 물도 안 마시고, 화장실은 집에 가기 바로 전에 다녀오고.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같은 나라 사람이 열심히 사업을 하는 모습을 보니 자랑스러워 더 잘되게 도와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이 기특해 보였는지 사장님 내외분은 퇴근할 때 나를 늘 집 까지 데려다주셨고 심지어 집에 갈 때는 도시락까지 싸주셨다. 또 가게에서 남은 고깃감을 나눠 주시기도 하는 등 나를 살뜰하게 챙겨 주셨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루는 남자 사장님께서 날 부르시더니 휴대폰 요금에 대하여 물으셨다.


"미스 신 휴대요금이 얼마예요?"

"한 45불 하는 거 같아요."

"아. 그럼 우리랑 가족으로 묶어서 휴대폰 요금 내는 거 어때요? 그럼 20불 정도만 내면 되거든요."


날 가족처럼 아껴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사실 부담스러웠다. 사람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지금 사이가 좋다고 휴대폰을 가족으로 묶어 뒀다가 나중에 곤란한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 감사하지만 복잡해질 거 같아서요. 그냥 사양하겠습니다."

"아니 복잡할 거 하나도 없대도?"


결국 사장님의 권유로 일을 마치고 사장님 내외를 따라 휴대폰 매장을 갔다. 점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시던 남자 사장님은 결국 휴대폰 요금을 묶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본인의 자녀들에게 새로운 휴대폰을 사주고 싶었는데 자신의 번호 아래에 가족으로 새로운 사람이 등록을 하게 되면 휴대폰을 주는 이벤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사장님이 생각한 여러 가지 조건과 부합하지 않았던 모양인지 없었던 일로 되었다. 날 위하는 듯하였는데 역시나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결론적으로는 잘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남자 사장님은 그동안 숨겨뒀던 본모습을 슬슬 보이기 시작했다. 남자 사장님은 '지킬 앤 하이드'처럼 두 가지 얼굴을 가지신 분이셨다.


보통 때는 점잖은 목소리로 점잖게 말씀을 하시던 남자 사장님은 가끔씩 여자 사모님께서 작은 실수라도 할 때면 홀 안에 손님이 있건 없건 "야! 너 머리가 있냐?" 라며 엄청 큰 소리로 면박을 주곤 하셨다. 그럼 홀에 앉아있던 손님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오 마이 갓!' 하는 눈빛을 내게 건네며 민망한 듯 씩 웃곤 하였다. 한국에서도 그런 상황은 손님들을 당황하게 만들겠지만, 특히나 미국에서는 큰 소리가 오가거나 실랑이를 하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더 기이한 광경으로 느껴진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여자 사장님께서는 손님들 앞에서 그렇게 큰 소리로 면박을 당하셔도 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면서 되려 화난 남자 사장님의 기분을 풀어주시곤 하셨다. 지킬의 모습은 대기업의 미꾸라지였다면, 하이드의 모습은 세상 무례한 사람이었다.


어느 날은 한 동성 커플이 입양한 아이들을 데리고 식당을 찾아왔다.


"하이!"

"하이! 하우 알 유?"


사장님은 고객 접대용 미소를 지으면서 주문을 받으셨다. 그리고는 그들이 주문한 음식 조리가 다 되자 나를 부르셨다.


"어이. 미스 신 이거 저 사람들 갖다 줘요. 우웩"

 

나는 사장님이 시키는 대로 주문한 음식을 그들에게 가져다주었다. 그들은 친절한 미소로 고맙다며 팁까지 챙겨 주었다. 난 사장님의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본인의 신념과 다를 수는 있지만 사장님의 지갑을 두둑하게 만들어 주는 고객이고 참 나이스 한 사람들한테 왜 저러나 싶었다. 그렇게 싫으면 음식을 팔지 말던가...


사장님의 이상한 태도는 흑인 손님을 접대할 때도 볼 수 있었다. 단골로 가게를 찾던 흑인 손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 앞에서는 스몰토크도 하면서 상량하게 주문을 받던 사장님은 이번에도 주문받은 음식을 다 만든 후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스 신 이거 저기 탄밥 한테 갖다 줘요."

 

그때 사장님은 살짝 미소를 띠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게 유머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사장님의 무례함은 점점 나에게 까지 뻗쳐오고 있었다.


하루는 일을 마치고 집에 가는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에 나의 삼촌들도 본인이 다니셨던 대기업에 다녔다가 그만두셨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미스 신 삼촌들이 왜 그만둔 건지 알아? 그만둔 게 아니라 능력이 없어서 잘린 거야."


가족은 건드리는거 아닌데... 기분이 몹시 상했지만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몰라 웃으며 넘겼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어느 날 여자 사장님과 다음날 음식 재료를 다듬으며 ‘하와이에서는 머리카락도 탄다’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는 나에게 와서는 대뜸


"미스신 너 머리 나빠!"


라며 어이가 없는 발언을 하고 가는 게 아닌가? ‘아. 내가 딸 같은가 보다. 내가 편해서 그러나 보지.’ 아마도 사장님은 마음을 터 놓을 수 있는 사람 앞에서는 마음 놓고 하이드의 모습을 보이는 모양인가 보다며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그 무렵 사장님은 나를 신뢰하기 시작하셨는지 나에게 슬슬 주문을 받아 볼 것을 요구하셨다. 난 언어가 안 되는데 괜찮겠냐고 여쭤보니 어려울 거 없다며 메뉴표만 외우면 된다고 하셨다.


"미스신. 이거 우리 집 메뉴표인데 이거 외워 와."


어학원 영어단어도 제대로 못 외우는 암기력 빵인 나에게 메뉴를 외우라고 건네준 종이에는 족히 20가지 이상 되는 메뉴들이 영어로 적혀 있었다. 그날부터 나는 영어단어를 외우는 대신 메뉴를 외우고 있었다. 메뉴를 외우자 이번에는 포스에 단축키에 대하여 알려주기 시작하셨다.


"자. 만약에 햄버거에 추가로 고기를 넣고 싶다면 이 버튼을 누르면 돼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다. 추가 금액이 메뉴상에는 1불 이었다면 남자 사장님이 누르라고 한 버튼은 누를 경우 1불 50센트 추가되는 것이었다.


"그거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죠. 1불만 더 받아야죠."


옆에서 보고 계신 여자 사장님이 다른 버튼을 눌러야 한다며 한 말씀을 거들었다. 결국 난 여자 사장님의 말씀대로 정확하게 받아야 할 돈만 받았다. 여자 사장님이라도 잘못을 바로 잡아주니 감사했다.


어느 날부터 남자 사장님께서는 내게 손님들에게 주문을 받을 때 '사이드 메뉴 주문할래?'라고 꼭 물어보라는 지시를 하셨다. 솔직히 손님들은 거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사이드 메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것만 먹고 싶어 하는 눈치였기 때문에 굳이 '사이드 메뉴 주문할래?'라고 물어보는 것은 강매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고 에너지 낭비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장님의 지시이자 '미국은 원래 이런가 보다'라는 생각에 시키는 대로 물어보았다. 그러나 역시 10명에게 물어보면 10명 다 괜찮다는 눈빛과 함께 새삼스레 왜 이러냐는 눈빛을 보내곤 했었다.


"미스신! 이리 와 봐."


어느 날 사장님은 주문을 받고 있던 나를 부르셨다.


"사이드 메뉴 주문받고 있어?"

"네."

"뭐 어떻게 받고 있는 거야? 여기 서서 똑같이 해봐."


갑자기 싸늘한 말투로 날 유치원생 다루듯 하는 태도가 기분 나빴지만 시키는 대로 시연하였다.


"두 유 원트 후렌치 프라이 오얼..."


나는 항상 고객들과 눈을 마주치며 주문을 받았다. 늘 고객과 눈빛을 교환하며, 손가락으론 사이드 메뉴를 가리키면서 이미 주문 다 끝나 지갑을 열려고 하는 고객에게 사이드 메뉴를 추가로 주문할 것인지 물어보았었다. 그건 내가 생각해낸 방법이었는데, 왜냐하면 한 번도 사장님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 사이드 메뉴를 주문받는 건지 알려준 적이 갑작스레 포스에 투입됐었기 때문이다.


"야! 너 어디 지금 남의 장사 망칠 일 있어?"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장님이 꽥! 소리를 지르셨다! 역시나 홀에 있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쳐다보고 있었다.


"우즈 라이크 투 오더 썸 사이드 메뉴? 받아 적어!"


순간 너무 놀랐고 민망했지만 일단 종이와 펜을 주섬주섬 챙겨서 옆으로 갔다.


"백번 받아 적어. 그리고  여기서 큰 목소리로 외워!! 시작해!"


머리가 띵했다. 잠깐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 거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노릇이었다. 지금까지 참 월척 없는 하이드의 모습을 많이도 보고 참아도 왔지만 이번 일은 도저히 못 넘길 것 같았다. 난 황소처럼 콧김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참고 넘어가면 나 스스로가 날 막 대하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나지막이 사장님을 불렀다.


"왜!"

"저도요 감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뭐?"

"저도 감정이라는 게 있다고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남자 사장님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우리가 남이야?”

“... 남이 아니면 뭐예요?”

“내가 너 가족 같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가족이요? 참나... 저 사장님이랑 가족 아니거든요? 그리고요. 아무리 가족이라도 이러는 거 아닙니다!"


사장님이 놀란 표정을 추스르며 말했다.


"어..  그 그래... 미스신! 만약에 맘에 안 들면 오늘까지만 일하는 걸로 해요!"

"네!!!!"


'딸랑딸랑'

순간 가게 안으로 손님이 들어왔다.


"하이! 우드 유 라이크 오더?"

"음. 캔 아이 해브 어 햄버거?"

"오케이. 우! 듀! 라! 이! 크! 투! 오! 더! 썸! 사! 이! 드! 메! 뉴?"

"노 땡큐"

"땡큐 소 머취!"


사장님이 보란 듯이 더욱 경쾌하고 큰 목소리로 주문을 받았다.


"미스 신. 내가 아까는 너무 했지? 내가 앞으로 조심할게. 오늘 있었던 일 없던 일도 하고 다시 잘해보자!"


사장님은 잠시 후 감정을 추스르고 다시 지킬박사가 되셨다.


"... 저도 사장님께 그렇게 말씀드린 건 죄송합니다."


어른이 성질 죽이고 내게 사과하는 모습을 보자 나도 일단 받아들여야겠단 생각이 들어 그렇게 말했다.


그날 밤, 난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너무 괴로웠다. 내가 이런 대접을 받으면서 까지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가족 같이 잘해 주셨던 시간들도 생각이 났다. 하지만 가족 같다는 이름으로 나를 그 안에서 마음대로 조절할 권리는 사장에겐 없었다. 일손이 귀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잘 대해주다가 자기 사람이 된 것 같고 편해졌다는 이유로 지켜야 할 예의를 어긴 다는 것은 나를 위해서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말이 있다. 좋은 사람인지 별로인 사람인지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에게 엄청 잘해주라고. 엄청 잘해줬을 때 나한테도 잘해준다면 그는 좋은 사람이고, 편하다고 막 대한다면 그 사람은 별로인 사람이라고... 사장님은 나에게 별로인 사람이 맞았다. 그동안의 좋았던 시간들도 떠올랐지만 난 이미 상한 마음을 동여 매고 그곳에서 일을 할 용기가 없었다.


다음날, 평소에는 30분 전에 일 하는 곳에 도착했지만 그 날은 한 시간 전에 도착하여 시뮬레이션을 하였다.


"사장님. 죄송하게도 어제 드린 말씀은 못 지킬 거 같습니다. 저 오늘 까지만 일하겠습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사건이 있는 바로 그날 밤 '내일 못 가겠습니다.'라고 하고 안 가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직접 가서 말씀드려야 할 거 같았다. 혹시 또 화를 내지는 않을까 떨리는 마음을 안고 가게를 찾았다.


"어! 미스 신 왔어? 잘 잤어?"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웃으며 날 반기는 남자 사장님께 말했다.


"아니요. 사실... 못 잤어요. 사장님. 죄송하지만 저..."

"그래요. 더 이상 같이 일 못하겠다는 거지..."

"네. 오늘까지만 일 할게요."


사장님은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마지막 날이니 만큼 그래도 열심히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일이 고되니까 말이지. 내가 참 본의 아니게 표현을 하고 그래요."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평소와는 다르게 사장님은 본인의 속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도 그런 것에 흔들리고 싶지 않아 대충 '네네' 대답을 하며 내가 해야 할 일만 묵묵히 하고 있었다. 그날 여자 사장님은 다른 주에서 공부하다 방학을 맞아 잠시 와이키키를 찾은 자녀들을 데리고 가게에 오셨다. 자녀들의 모습을 보니 인물도 훤하고 잘 자란 모습이 보였다. 문득 자녀들을 키우려고 낯선 땅에서 고생하시는 사장님 내외가 대단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였다. 그냥 딱 우리 부모님의 모습과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


"저. 오늘 그만두신다는 분이시죠?"


사장님네 막내가 와서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아.. 네..."

"말씀 안 하셔도 알아요..."


말씀 안 해도 안다니... 혹시 이 자녀도 살면서 아빠에게 내가 받았던 상처를 받았던 것일까?


"아. 아버지께서는 되게 열심히 일하시고 좋은 분이세요. 그냥 저랑 안 맞으신 거뿐이죠."


내가 그 어린 자녀에게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사실 나는 더 받아야 할 임금이 있었는데 급하게 그만두는 바람에 받지 못했다. 심지어 여자 사장님이 안 계실 때 일어난 일이 화근이 되었던 것이기에 여자 사장님은 무슨 일인지도 잘 모르시는 눈치셨다. 여자 사장님은 내게 참 의지가 되는 좋은 분이셨는데 헤어질 생각을 하니 안타까웠다.


여자 사장님은 나중에야 자초지종을 들으시고는 못 받은 임금을 꼭 챙겨 주시겠다고 하셨다.


시간이 꽤 지난 어느 날 문득 받지 못한 돈이 생각났다. 사실 돈을 안 받을까 생각도 하였었다. 너무 갑자기 그만둔 것에 대한 대가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철저한 을의 입장인 나는 돈을 꼭 받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장님 잘 지내시나요? 돈을 주기로 하셨는데 기다려도 연락이 안 와서요. 우편으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여자 사장님께 문자를 보냈다. 응당 받아야 할 돈이지만 난 이 문자를 쓰는데도 긴 시간 머릿속으로 문자를 써봤다 지웠다, 고쳤다 지웠다 했다.


'고은 씨. 잘 지냈어요? 그동안 너무 바빠서 연락 못했어요. 혹시 가게로 받으러 올래요?'

'아니요. 전 아직 남자 사장님의 얼굴을 볼 용기가 없습니다.'

'그럼 우리 00에서 만나요.'

'남자 사장님은 안 나오시죠?'

'그럼요'


결국 여자 사장님과 은밀한 접견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00 주차장에서 여자 사장님을 만났다. 그곳은 가끔 사장님 내외가 일을 마치면 나를 내려다 주던 곳이었다.


"고은 씨 가고 나서 많은 생각을 했어요."


여자 사장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알게 된 것은, 남자 사장님께서는 가끔 그렇게 욱 하는 경우가 있었고 아마도 그런 이유로 일하던 사람들이 그만두는 경우가 꽤 있었던 것 같다고 하셨다. 여자 사장님은 짐작은 하셨지만 그냥 묵묵히 뒤에서 기도하며 본인이 힘들 때는 신앙의 힘으로 이겨내며 살았다고 하셨다. 여자 사장님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아팠다. 그것이 대부분 이민자들의 모습일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와이에 버젓한 비즈니스를 갖고 있는 분이셨지만 말도 안 통하고 문화도 다른 나라에서 사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한국 대기업에 다닐 때의 본인의 삶 와 이 곳에서 육체적 정신적으로 나날이 피폐해지는 삶의 차이는 엄청났을 것 같다. 그래도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니 이를 악 물고 참아야만 했고, 그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손님 앞에서는 할 수 없는 말을 뒤에서 하며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만만한 자들에게 분풀이를 하였던 것 같다.


문득 여자 사장님이 안쓰러워 보였다. 나는 이렇게 떠날 수라도 있지만 여자 사장님은 그런 남편을 떠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 낯선 나라로 남편 하나 바라보고 왔을 테니... 자녀들도 마찬가지고. 진짜 ‘가족’이 아니라 ‘가족 같았던’것이 감사했다.


같은 나라 사람에게 뭘 바란것은 아닌가... 반성도 하였다. 그렇게 두 번의 악몽같던 아르바이트 끝에 나는 좋은 고용주를 만나게 되었다! 솔직히 두 개의 아르바이트가 큰 보수를 준 것도 아니었지만 현금을 손에 쥐는 쏠쏠한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일이 끊기게 되면 망할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 한 구석엔 ‘내가 언제나 성실하게 일하고 그것이 나의 자부심이 된다면 결국 더 좋은 일이 오게 될 거야. 내가 손해가 아니라 나를 놓친 그들이 손해다!’라는 마음이 있었다.


내가 세 번째로 하게 된 아르바이트는 ‘베이비 시터’였는데 이번에도 예상치 못하게 워킹맘과 연이 닿아 워킹맘을 대신해 그분의 초등학생 아들을 하굣길에 데리러 가고, 밥을 해주고 숙제를 봐주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때 만난 그 학부모님은 지금도 언니라고 부르며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와이 남자 사장님을 생각하면 (열 받아서 웬만하면 생각 잘 안 하지만)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바로 <다비 이모- 주라 주라>이다. 그 노래의 가사를 보면 이런 가사가 나온다.


가족이라 하지 마이소

가족 같은 회사, 내 가족은 집에 있어요~


그 뒤로 ‘가족 같은’이란 말을 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 막대하겠다는 거구나.’ 란 생각이 먼저 들어 경계를 하게 됐다. ‘가족 같은’ 사이는 필요 없다. 내 가족은 집에 있으니까. 그냥 철저한 남이 되어 서로 받을 건 받고! 줄 건 주는! 어려운 사이가 오히려 좋다.


참! ‘개그맨이 아닌 신 고은으로 살고 싶다’ 던 나는 고백하건데 00주차장에서 못 받은 임금을 받으러 간 여자 사장님과의 만남에서 결국 “저 사실은 한국에서 코미디언이었어요.” 라고 커밍아웃을 해 버렸다. 유치하지만 솔직하게 말하자면 ‘저 그렇게 막대해도 되는 사람 아니었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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