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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브로] 골드러시_기혁

하루에 시집 한 권 읽기, 한 편 쓰기

골드러시 / 기혁 


사람을 만나는 순간,

중고의 삶을 시작하는 가랑이 


광부들의 갱도만큼 어두웠지. 


유년의 인디고 물감이 빠진 자리엔

상처마다 덧댄 물고기 패치가

아가미를 뻐끔거려.


엄마의 손을 놓친 것들은 왜 멋이 있을까?

서쪽으로 돌아 나온 것들은 왜

명찰이 없는 것일까?


유령처럼 미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지. 


피 묻은 행려병자의 생애를 빨면

해변의 석양이 배어 나오기도 해. 

누군가 먹다 만 데킬라 선셋의 취기, 


접어 올리지 못한 그림자의 밑단과

후렴뿐인 유행가의 이별도

뒷모습의 치수로만 슬픔을 표시한다지. 


가장 아픈 곳은 사람의 손을 탄 곳일 텐데?


저마다 폼을 잡는 세계에서 

이별은 가장 근사한 워싱의 방식.


타인의 상처가 옅어질수록

서로를,

바다로 알고 헤엄쳐 다니려 하지. 


 다시금 누구를 만나는 일, 그 일이 첫 걸음 걷기도 힘들 때가 있다. 제목 '골드러시'의 시기처럼, 그만큼 반짝거리고 영원히 가치를 나눌 수 있었던 것 같은 시간이 지나간 후다. 그 반짝거림 밖에 없을 줄 알고 돌아봄 없이 달렸던 그 끝에 다시금 삶의 시간이 계속된다. 청바지는 골드러시를 찾으러 떠났던 광부들이 쉽게 헤지지 말라고 천막용 천으로 만들었는데, 처음에 걷기가 얼마나 만만치 않았을까. 한 바탕 달린 뒤에 또 다른 금같은 사람을 찾으려 가랑이를 옮겨야하는 고통스러움이 중고의 삶이다. 이제 어린 시절의 몽고반점 같은, 푸른색 꿈이 청바지 물처럼 빠진 자리에는 물에서 뛰어논다고 상상한 물고기가 덧댄 바느질 틈을 타고 바람을 통하고 있다.  


 사랑은 둘이 하기 때문에 엄마의 손을 떠나게 되고, 그들은 자유로움을 느낀다. 통상 오른쪽 가슴에 다는 명찰을 뜯어버리고 서쪽으로 달려온 그들은 어떤 이름으로 불리기 보다는 사람사이에서 언어화할 수 없는 충만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러다가 이제는 반짝거린 관계가 끝나는 곳에서, 몸에는 쟁취하기 위해 입었던 청바지가 고스란히 남아있고 주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아 넝마주의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 

 

 한 사람의 고루한 모습조차 시인은 기존의 이미지와 병치하여 드러낸다. 청바지와 대비해 인간의 몸을 구성하는 피, 그것의 솔직함이 물 빠짐에서 석양으로 확장한다. 그것은 사랑에 한 번쯤 취했던 사람의 피로함일 수도, 취기일 수도 있다. 동시에 이미 오래 전 사랑을 잊지 못해 유행을 따라가지 못하는 바지 밑단처럼, 혹은 절정만 남아있어 식상하기 쉬운 유행가의 이별장면처럼, 이제는 절대적으로 반짝거리기보다 상대적이거나 강도를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해진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이별의 강도는, 사람의 몸에서부터 나오고,  이별은 '폼을 잡는 세계'에서 가장 그 폼을 무너뜨리는 방식이다. 어떤이와 이별했던 곳, 수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목놓아 울거나, 무릎을 꿇는 어떤면에서 가장 반짝거리는 순간은 하나의 워싱의 방식이다. 그것이 그 자체로서도 워싱의 과정으로서도 '근사'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중고임에도, 워싱의 과정으로 '손 탄 곳'이 옅어질 수록 다시금 서로가 만든 바다로 나가려고 한다. 골드러시의 희망과 망상이 교차하는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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