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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육아일기] 아이가태어난 후 첫 추석

결혼 12년 차육아1년 차

 "어휴 12년 만에 애를 낳았다니까."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기간을 어머니는 조용히 셈하고 있었다. 12년 전 결혼하고 첫 추석에 아내와 8박 9일의 동경 여행을 다녀왔다. 어머니는 첫 추석에 당연히 있어야 할 아들과 며느리가 여행 가는 것이 일시적인 사건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이후에도 몇 번의 여행을 다녀오고 1박 2일에서 무박 1일로 명절에 머무르는 기간을 줄이면서 어머니는 서운함을 잠시 내비치다가도 말하지 않았었다. 어머니가 믿는 신에게, 혹은 허물없이 얘기할 수 있는 몇몇 사람들과 자신의 아들이 결혼하고 애를 낳지 않는다는 것, 그렇게 자주 집을 찾지 않는다는 것을 조심히 얘기했을 것이다. 

  동경에서 추석을 맞았던 2009년 이후 12년이 꼬박 흘러 2021년 추석이 되었다. 내 집과 부모님 댁은 버스정류장으로 세 정거장, 걸으면 30분 남짓 걸린다. 이번 긴 연휴 둘째 날, 잠시 유모차를 끌고 부모님 댁을 들렀다. 들렀다가 나오는 길에 어머니는 교회의 오랜 지인과 마주쳤다. 12년 만에 애를 낳았다는 이야기가 방언처럼 몇 번 튀어져 나왔다. 어머니는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성큼이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는 말을 반복했다. 아이도 없이 평생을 살아갈 나에 대한 걱정에 영향도 있겠고, 더 이상 아이 없는 삶을 생각할 수 없는 어머니가 새롭게 만난 시간의 지평선일 것이다.  


  일주일에 두서 번 요가 가서 집 밖에서 잠시 아이와 떨어지는 것을 포함해도 아이를 낳고 처음으로 집에 혼자 있었다. 잠시 잠들었다가 부모님 댁으로 긴 산책을 다녀온 나를 마중 나왔다.

  "오랜만에 혼자 집에 있으니까 어때?"

  "응, 조용했지 뭐." 

  매주 토요일, 그리고 일요일 오전을 빼면 나는 일하러 가기 때문에 육아를 아내가 담당하고 있다. 아내는 토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성큼이 맛 좀 더 봐야 되는데"라며 농담을 한다. 육아를 전담해 온 몸이 쑤신 아내의 토로이다. 내가 빠른 시간 안에 육아 일정 부분을 맡아야 하는데, 여전히 갖은 핑계를 대며 육아에 성실하지 못한 나를 자주 돌아보게 한다. 돌아봄으로 그치지 않고 언제 전면적인 행동의 수정으로 돌입하느냐가 문제이다. 그 시간이 목전에 차있음이 몸으로 느껴진다. 아내도 육아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삶은 아니고 그도 처음이기 때문이다. 24시간 단 한 순도 눈을 뗄 수 없는 육아는 잦은 의사결정을 일으키게 된다. 아이의 울음소리, 자신의 시간적 감각, 베이비타임즈 같은 애플리케이션의 도움을 받아, 이유식을 먹이기, 기저귀를 갈기, 젖을 물려야 한다, 재워야 한다는 것을 판단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자기 신체의 리듬이 아닌 아이의 신체에 시간을 맞춰야 하기 때문에 만성 피로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지금도 "앙"하는 울음이 들리고 안방에 가봤더니 아내가 젖을 물린다.  


  아이는 생명체로써 한 순간도 낭비하지 않고 내적 동력과 외적 관계를 통해 자신을 형성해가고 있다. 어른을 중심으로 생각했을 때는 걷지도 못하는 돌봄의 대상이라고 제한할 수도 있겠지만 벌써 기며 그 나름의 새로운 몸의 경험을 이어가며 자신을 확장해가는 능동적 존재이기도 하다. 그에게는 얼마나 새로운 시간이겠는가, 양육자를 떠나 '자기'로 설 때, 그 디딤돌은 기억할 수도 없는 혹은 당연한 영유아 시기의 경험에서 만들어진다. 디딤돌이 모난 돌, 둥근돌 그 무엇이든지 그는 탄탄한 경험의 거미줄로 돌을 잣고 있다. 빈도가 잦은 경험에서 아이는 관계를 체감하고 존재를 발현시킨다. '먹고 놀고 자기'라는 3가지 주요 행동에 대한 그 밖의 인간과 환경과의 되먹임으로 다시금 행동을 만들어 간다. 그가 처음 맞이했을 첫 추석에 그는 집 밖을 처음 경험했다. 산책, 정기 검진, 사진 촬영의 이동 중에 잠들었던 것을 제외하고 처음 맞딱드린 '할머니 댁'이라는 공간에서 그는 어떤 경험을 했을까.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며 연휴 둘째 날 내 품에 안겨서도 낯섦에 "앙"하고 울어버렸던 것과 달리, 연휴 마지막 다섯째 날 아내와 내가 부모님 댁을 함께 갔더니 '앙' 울어버리지는 않아서 3시간 정도를 있을 수 있었다. 그가 느꼈을 낯선 방바닥, 조명 색, 집의 구조는 어떠한 시간으로 체득될까. 


  아이가 없을 때, 아내와 나는 각자의 부모님 집을 1일씩 방문했다. 2일 정도를 쓰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는 산책, 잠, 영화보기 등을 했다. 여느 휴일과 다르지 않았다. 연휴에 어디 또 놀러 갈 곳이 없나 나 혼자 궁둥이를 들썩이면 아내는 동조했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처음으로 긴 연휴를 보내며 아이와 함께 있었다. 아이가 50일 남짓이 지난 다음부터 나는 매일 출근하는 일을 시작했고, 육아에서 대부분 빠졌었다. 그래도 아이가 잠드는 밤 11시 전후에서 요즘 인기가 많은 '오징어 게임'을 정주행 했고,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면서 옛 사진과 영화를 두루두루 봤다. 

  이제 지인의 한 마디가 더욱 체감되었다. 

 "아이가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아이는 자네의 시간을 갉아먹을 것일세, 그러면서 크네" 

 이런 말들이다. 

 무엇하나 한 것 없는 것 같은데 연휴가 주르륵 지나갔다. 목 뒤로 피로가 느껴진다. 다시금 허리를 꼿꼿하게 세웠다. 아이의 이유식 3번 중에 2번을 먹이고, 산책을 2번 하고, 아기띠를 3번 정도 썼다. 육아템을 고루 거치며 몸을 달랬다. 아이가 스스로 기고 싶은 낌새를 보이지 않으면 자주 안고 있으려고 했다. 독립적인 나의 시간이 사라지고 아이와 겹치는 시간이 길어진다. 연휴는 어느새 나로서 한가하지 않고 스케줄로 꽉 차있다. 


  나는 '사랑'을 '시간'과 같은 의미로 여긴다. 오랜 시간을 쓸수록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바빠서'라는 것만큼 염치없는 핑계가 없다. 바빴다는 것은 그만큼 그 대상이 시간을 할애할 필요가 없음을 말한다. 아이를 낳고 첫 추석이 재구성되며 나의 시간은 변화를 겪고, 그것을 사랑하는 대상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2년을 강조하며 삶의 가을에 새로운 봄을 마련한 어머니, 자신을 위한 시간이 없이 아이와 달라붙어 있는 아내, 한 순간도 새롭지 않은 적이 없는 아이, 조금씩 사랑하는 대상을 조정하려는 나. 각자의 시간이 뚜렷하게 보였던 연휴였다. 이 글을 다음 명절에, 혹은 또 다른 쉼의 시간에 확인한다면 나는 어떠한 시간의 그물망을 잣고 혹은 없애고 있을까.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가 평생토록 다퉈왔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의 논쟁이 한 존재의 등장에서도 드러난다. 우연과 필연이라는 사건의 원인과 원천을 제외한다면, 오직 일치하는 의견은 "존재는 관계에 놓여있고, 그 이음매로 시공간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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