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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란 Mar 15. 2020

영화처럼 당신을 만난다면 나는

애도 일기 4

  확실히, 나는 잊어가고 있었다. 할머니를 떠올리며 우는 날은 줄어들고, 할머니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날은 늘어나고 있다. 그런 변화가 자연스러운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인지, 아니면 새롭게 내 앞에 닥친 일들이 걱정거리가 되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3월 초에 업무 분장을 한 이후로 나는 분명 달라지고 있다. 솔직히 나는 3월 이후부터 우리 할머니보다, 아직 만나지도 못한 우리 반 아이들을 더 많이 생각했다.

  마음속으로는 ‘할머니가 살아만 계셨더라면’이라는 가정을 수도 없이 했었는데, 이곳에 할머니를 추억하는 기록까지 여러 편 남겨 놓았는데, 나는 괜찮아지고 있는 것 같다. 또 한 번 나의 얄팍한 그리움에 환멸이 든다. 할머니가 만약 지금까지 내 곁에 계셨다 해도, 나는 또 그렇게 후회할 일만 하루하루 만들고 있었겠구나 싶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직후, 나는 일상생활이 쉽지 않아서 일부러 상념에 잠길 시간을 만들지 않으려고 했었다. 어이가 없게도, 사랑했던 사람과 이별한 후 괜찮아지기 위해 했던 행동을 (내가 살려고) 똑같이 써 먹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웃긴 예능을 멍하게 틀어 놓거나, 영화를 다운받아서 보고는 했었는데 그때 마블 시리즈를 접하게 되었다.

  사실 마블에서 만드는(이런 표현이 적합한지는 모르겠지만), MCU(‘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특유의 세계관을 말한다고 알고 있다)를 공유하는 일련의 영화에 대해서는 영화에 조예가 깊은 친한 친구가 몇 년 전에 진작 설명해 준 바 있었다. 그때도 흥미롭게 듣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워낙 내가 이런 분야의 영화에 대한 흥미가 없어서(나는 어린 시절 동생 때문에 억지로 ‘다간(?)’과 같은 로봇 만화를 봐야 했던 적이 많았는데, 나에게는 마블의 영화들이 그런 로봇 만화의 이미지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이 시리즈(?)의 영화를 직접 볼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그랬던 내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그러니까 처음 임용 시험에 떨어진 후 잠시 회복 기간을 가질 무렵 텔레비전에서 ‘닥터 스트레인지(Doctor Strange)’를 보게 된 것이다. 다른 영화와 달리 ‘닥터 스트레인지’는 나에게 (어린 시절 내가 완전 빠져 있었던) ‘해리 포터’ 시리즈와 같은 느낌을 주어서인지(둘 다 마법을 쓴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게 느껴진 것일까?) 중간에 채널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었고, 그냥 볼 만했던 게 아니라 심지어 너무너무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 영화의 끝부분에서(그걸 ‘쿠키 영상’이라고 부른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다) 이상한 망치를 든 장군 같은 사람이 나왔는데, (내가 아무리 마블 시리즈의 문외한이었다고는 하나 ‘토르’에 대해 들은 바가 없지는 않아서) 한눈에 그가 ‘토르’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토르’가 나오는 영화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러나 굳이 실천에 옮기지는 않았었는데,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정말 무엇인가에 의지해서라도 생각을 딴 데로 돌리고 싶었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순간에 나는 계속해서 울어 댔기 때문이었는데, 그때 내 눈에 띈 영화가 ‘토르: 라그나로크(Thor: Ragnarok)’였다. 유료 결제를 하고 동생과 그 영화를 집에서 보았는데, 그 영화가 너무 재미있어서 그 순간만큼은 내가 할머니를 잃었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여 나는 꾸역꾸역 책상 앞에 앉아서 임용 공부를 해 나가기 시작했는데, ‘어벤저스: 엔드게임(Avengers: Endgame)’이 개봉한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사실 ‘어벤저스: 엔드게임’으로 마무리될 한 시대를 제대로 끝맺음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나왔던 십여 편(맞나?)의 마블 시리즈 영화를 차곡차곡 보아 왔어야 한다는 걸 친구에게 들어서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를 떠나 보내고 실의에 빠져 있던 나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구원(?)해 준 마블 영화의, 그 대장정의 끝을 실시간으로 함께하고 싶은 욕심에, 급하게 ‘어벤저스(The Avengers)’와 ‘어벤저스: 인피니티 워(Avengers: Infinity War)’만 부랴부랴 본 채 개봉날 아침 조조 영화로 ‘어벤저스: 엔드게임’를 보러 갔던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 속 곳곳에 녹여져 있던, 오랜 마블 팬들이라면 울고 웃을 수밖에 없는 요소를 내가 다 놓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문득문득의 여백에도 불구하고 나는 (개인적으로) ‘어벤저스: 엔드게임’이 정말이지 영리하게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느꼈다. 그 많은 떡밥(?)을 제한된 상영 시간 안에 그 정도로 회수했을 뿐만 아니라, 오래된 마블 시리즈의 팬들에 대한 헌정이 영화 곳곳에 담겨 있는 느낌을 나 같은 관객조차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예전에 친구가 마블 영화를 얘기하며 신나 했던 그 원천이 무엇일지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고, ‘어벤저스: 엔드게임’을 보며 무수히 많은 감정을 느꼈을 오래된 마블 시리즈의 팬들이 부럽기까지 했다.




  뜬금없이 영화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어벤저스: 엔드게임’에 (혹시나 지금도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어벤저스 멤버들이 각기 다른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향하는 부분이 등장한다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나오며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온다면 언제로 돌아가야 할까?’ 하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을 잠깐만 하고 말았냐면, 그 당시 너무 명확하게 떠오른 하나의 답이 있었기 때문에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할머니의 이야기에 따르자면) 시집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모든 일이 서툴렀던, 그리하여 부엌에서 몰래 참 많이 울었다던 십 대 후반의 할머니를 만나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나보다 어린 나이의 할머니를 만나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렇게 많은 주름이 있지도 않고 그렇게 거칠지도 않은 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 없이 안아 줘야겠다고, 분명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뒤에는 무슨 말을 해 줄 수 있을지 도무지 모르겠다. 40년쯤 뒤에 당신에게는 손녀와 손자가 생기고, 그 아이들을 키우면서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그러니 지금 같은 시간이 당신 인생의 전부일 거라고만 생각하지 말라고. 이렇게 말씀드려도 될까. 그렇게 말씀 드릴까 싶다가도 내가 어떤 손녀로 자라났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어서, 그런 말도 차마 해 드릴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니 나는 곧 다가올 할머니의 첫 기일에, 그저 예전에 할머니가 무수히 반복하셨던 것처럼 제사 음식을 만들고 상에 올리고 절을 할 뿐일 것이다. 제사라는 제도와 그것의 의미에 대해 내가 온전히 납득하고 공감하기 때문에 그러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 습관처럼 내내 말씀하신 바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제사는 할머니의 지방(紙榜, 종잇조각에 지방문을 써서 만든 신주)을 제사상에 올려 놓고, 저 음식은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것인지, 이 음식은 어떻게 놓아야 하는 것인지 수시로 할머니에게 물어보며, 할머니를 오랫동안 뵐 수 있는 날이었지 할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날이 아니다. 이번 주로 다가온 할머니의 첫 제사를 어떻게 지내야 할지, 아직 그 정도까지는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다. 




  사실 며칠 전 다시 방송을 재개한 ‘유 퀴즈 온 더 블럭’ 47화(코로나19에 대응하여 애쓰고 계신 의료진들, 코로나19로 인한 어려움을 함께 이겨 내고자 각자의 자리에서 힘쓰고 계신 여러 시민분들을  ‘전사들(Warriors)’이라는 이름으로 다루고 있다)를 보며 참 많은 생각이 들었다. 고마움과 감사함, 슬픔과 먹먹함을 동시에 느꼈다. 자유롭지 못한 상황 속에서 나는 집에 머물며 그저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고 있었는데, 많은 분들은 그런 생각조차 할 시간 없이, 수많은 ‘나’들이 그리워하는 일상을 되찾기 위해 헌신하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나는 나의 자리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학생들을 건강하게 만날 수 있도록 최대한 조심하고, 그 아이들이 오래 기다린 만큼 좀 더 좋은 수업을 할 수 있도록 집에서 열심히 준비하는 것이 최선이 맞을까. 잘 모르겠지만, 잘 모르겠기에 일단 알고 있는 것만 하자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할머니의 첫 제사를 앞두고, 상황이 이러한 관계로 할머니를 기억하는 친척 분들 모두가 오실 수 없으리라는 얘기를 부모님께 건네 듣다 보니, 분명 어딘가에서 소중한 사람을 떠나 보내셨을 누군가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이 밀려 온다. 떠나 보내는 사람에게도, 그 사람들과 함께해 주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많이 힘든 시기이지 않을까. 슬퍼만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요령껏 조심하며 슬퍼해야 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누구인지도 모를 그런 분들께, 그분들은 누구인지도 모를 나는, 감히 한 줌의 위로만 온라인상에서 띄워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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