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란 Feb 28. 2022

긴 터널의 끝에서

다가오는 새봄의 햇살을 기다리며

계절을 잃어버린 몇 해가 있었다

임용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이라면 대부분 공감하겠지만, 우리에게는 가을과 겨울이 없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온다는 것은 임용 1차 시험이 다가온다는 의미이며, 서늘한 겨울바람이 공기를 가른다는 것은 임용 1차 시험의 결과 발표가 코앞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가을과 겨울이라는 계절을 온전히 느낄 만한 여유는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계절의 끝에서 맞이하는 결과는 나를 포함한 많은 이들에게 냉혹하기 그지없다.

     나는 이번 임용 1차 시험 전날, 잠을 거의 자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이렇게 잠을 설쳐 본 것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수능 전날에도 나는 나름대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적절한 수면을 취했던 사람이었고, 이번 임용 시험을 앞두고는 미리 취침 시간도 일정하게 조정해 놓는 등 지난 시험들보다 훨씬 더 많은 주의를 기울였는데 말이다! 예상과 달리 잠이 들지 않아 멀뚱멀뚱하게 누워 있으면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시험을 망칠까 걱정했던 유난히 길었던 그 밤의 기억이 선연하다. 두려움과 불안감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그 소리도 생생하다. 나는 수능 시험을 앞둔 수험생들에게 인강 선생님들이 보내 준 응원 영상 중, '하루쯤 잠을 못 잤다고 시험을 못 버티지 않는다'던 (지금은 성함을 잊어버린) 누군가의 메시지를 계속해서 상기하며, 나 역시 하루쯤 버틸 수 있으리라며 나를 세뇌시켰다. 그렇지만 새벽 1시 30분, 3시, 5시… 핸드폰 화면에 적힌 숫자를 간간이 확인하고 있자니, 솔직히 '이 시험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이 수없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 새벽에 시험장으로 향했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잠을 거의 자지 못해 역대 최악의 컨디션으로 자취방을 나섰던 것과, 그 어두운 새벽의 찬 공기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차올랐던 나의 불안감만큼은 아직도 나를 몸서리쳐지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 시험을 치러가며 나는 제발 졸지 말고, 제발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다 하고 나오자며, 제발 이것만은 할 수 있기를 내 스스로에게 바라고 또 바랐다. 그래서 나는 그 목표만은 달성해 낸 내가, 그것만큼은 할 수 있게 버티어 준 내 자신이 대견하고도 가여워서 시험을 치르고 나오며 한참을 울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는 것이 그렇게 다행스러운 적은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 내 몸은 알고 있었던 것

임용 1차 시험 전날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나에게 미친 충격은 상당했다. 단순히 시험 전날에 긴장했기 때문이라며 가볍게 넘길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나는 그 사실을 '내가 그동안 괜찮지 않았다'는 결론을 이끌어 내는 근거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나는 세 번의 임용 시험에 떨어지고 매번 낙방(?)의 아픔을 겪었으나, 그럭저럭 내가 그 상처를 잘 추스르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어느 정도 괜찮은 '회복 탄력성'을 지니고 있는 인간처럼 보이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시험에도 떨어졌는데, 그렇게라도 내 자신을 다독이지 않으면 내 자존감이 너무 떨어질까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기어코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도 중요하다며, 그 '과정'을 열심히 버텨 온 나를 자랑스럽게 여겨 주고자 나름대로는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런데 1차 시험 전날에 예년과 다른 컨디션을 보여 준 나의 몸 상태를 핑계로, 나는 오랫동안 내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실상 나는 지난 몇 년간 괜찮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슬펐고 (열심히 노력해도 마음처럼 따라오지 않는 결과에) 화가 났다. 그리고 그 감정이 여전히 해소되지 못했다는 것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한 사실을 자각해 버렸기 때문일까, 1차 시험이 끝나고 맞이한 12월의 나날이 나는 너무도 힘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 (그 친구 역시 자신의 자리에서 온 힘을 다해 치열하게, 버티듯 살아 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너무 힘들다며 울어 버렸을 정도로,*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버거운 겨울을 보내야 했다. 정신적으로 한계에 도달했기 때문인지, 나는 인생 최초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경험(?)까지 해 보게 되었다. 드라마에서 볼 때는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쓰러지나, 말도 안 된다 싶었는데 진짜 그렇게 쓰러질 수 있었다! 병원 회복실에 누워 소리 죽여 울면서, 나는 내가 오직 '합격'이라는 '결과'를 바라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만이 나의 몸을 회복시켜 줄 수 있다는 것도.

* 이 자리를 빌려 나의 P에게 다시 한 번, 온 마음을 담아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내 인생이 고작 몇 문장으로 재단될 수 있나요

그렇게 12월의 하루하루를 버티듯 살아가며, 나는 예상과 달리 임용 2차 준비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도 짧게나마 기간제 근무를 하며 쌓인 경험치(?)가 없지는 않겠지' 합리화를 하며, 마음만큼 따라 주지 않는 내 몸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미래의 내가 이 시기를 후회하게 될까 봐 두려워, 임용 1차 시험이 끝난 뒤 매 주말마다 사립학교 시험을 치러 다녔다. 최소한 그것만큼은 해서, 나중에 내가 내 스스로에게 실망하는 것만큼은 막아 주자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운 좋도 두 군데의 사립학교 전형을 통과하고 또 통과하면서, 그 12월조차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으로 남지는 않았다. 사람이 참 간사해서, 1차 전형부터 떨어지면 그건 그거대로 기분이 나쁜데, 위로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떨어지면 그만큼 실망도 커져 더 기분이 좋지 않은 것 같다. 결국 최종 합격을 하는 1인을 제외한 모두는 결국 어느 시점에서든 씁쓸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올해의 사립학교 전형 과정에서 나를 가장 쓰라리게 만든 것은, 면접 단계에서 어떤 면접관 선생님께서 나의 인생을 몇 줄로 요약해 주시는 것을 들었을 때였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교사 할 생각이 없어서 국문과를 갔는데, 그때 교직에 마음이 생겨서 교직 이수를 했지만 못 했고, 그래서 접고 출판사에 들어갔는데, 안 맞아서 다시 교육대학원에 갔다, 이거죠?"

     뭐, 이런 비슷한 얘기였던 것 같다. (나의 기억이 그때의 발화를 더 격한 쪽으로 왜곡했을 수도 있음에 주의해 주시기를.) 따지고 보면 틀린 얘기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가, 이내 화가 나는 것이다. '정말 틀린 얘기가 없나? 내 삶이 겨우 저렇게 정리될 수 있다고?' 싶은 것이다.

     나의 삶이 누군가에 의해 아주 짤막하게, 가볍게 재단되어 보고 나니, 나는 누군가의 삶을 감히 내 멋대로 평가한 적이 없는지 새삼 반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에게 이런 평가의 대상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간절해졌고, 그 간절함은 나를 더 힘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결론을 얘기하자면,

12월 31일, 임용 1차 시험의 합격자 발표가 났다. 정말 이날 발표할 수밖에 없었던 걸까, 조금이라도 당겨서 발표해 주실 수는 없었던 걸까, 수험생들 사이에서는 많은 말들이 오고 갔지만 어쨌든 한 해의 마지막 날 결과가 나왔다.

     나는 내 점수를 확인하기 전에, 서울과 경기 지역의 국어과 합격 커트라인을 먼저 살펴보았는데, 세상에… 경기도의 컷 점수가 82점, 서울의 컷 점수가 86.33인 것이다. 나는 4.33점이라고 하는 무시무시한 점수 차이 앞에, 내가 2년 전처럼 또 이 사이에 갇혀 떨어지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든 기대를 내려놓지는 못했으면서도, 생각보다 기대감을 가지지 않고 내 점수를 확인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믿기지 않게도 1차 시험에 합격했다는 문구를 확인하게 되었고, 그 비현실감 속에서도 가슴 깊숙한 곳에서는 기쁨과 감격의 눈물이 차올라서 거의 오열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나는 2차 시험을 준비할 심적인 여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음을 곧이어 자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1차 시험만 통과하면 소위 (드래곤볼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사이언' 모드가 되어서 미친듯이 열정적으로 2차 시험 준비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너무나 두렵고 겁이 났다. 이렇게 결승선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상황에서 떨어지고도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 두려웠고, 한 해의 임용 레이스가 꾸역꾸역 끝나지 않아 1월 말까지 더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겁이 났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순간인 것을 알고 있고, 이러한 힘듦을 겪을 수 있다는 것 또한 배부른 소리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말하기도 조심스러웠지만 정말로 그랬다. (친한 언니가 나에게 해 준 표현을 빌리자면) 12월이 끝나지 않고 32일, 33일… 이렇게 계속되는 듯한 느낌이라 한 해를 살아 내는 것이 너무나 버거웠다.

     그래도 이 귀한 기회를 스스로 포기할 수는 없으니 부랴부랴 2차 스터디를 꾸리고, 내가 해야 할 것을 하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내 인생을 통틀어서 이렇게 '노력'이라는 것을 기울이는 게 힘들었던 적은 정말이지 처음이었다. 거의 매일같이 스터디를 하고 돌아와서 나는 울었다. 12월부터 시작된 나의 번아웃 상태를 알고 있던 지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번갈아 가며 전화를 하는 것으로 1월 초를 버텼던 것 같다.*

     그리고 어찌어찌 시간은 흘렀고, 1월 말에 있었던 이틀간의 2차 시험을 치러 냈다. 물론 둘째 날 있었던 심층 면접을 인생 최악으로 보았다는 절망감에 시험장을 빠져 나오며 또 다시 오열했지만, 어쨌든 끝이 났다. 2차 시험장을 나오며 느꼈던 개운하지 않은 감정 때문에, 최종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나날은 정말이지 고역이었다. 어떤 날은 최종 합격한 꿈을 꿨다가, 어떤 날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불합격이어서 펑펑 울면서 잠에서 깼다. 약간 반미치광이(?)가 된 듯한 나날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결론을 얘기하자면, 나는 이번 서울 지역 공립 임용 시험에 운 좋게도 최종 합격하게 되었다. 네 번의 도전 끝에 얻은 결과였다. 이 얘기를 두괄식으로 제시하지 않은 것은 지난 겨울의 지질했던(?) 내 모습을 솔직하게 순차적으로 풀어 내고 싶었기 때문이며, 동시에 내 실력이 다른 수험생 선생님들보다 뛰어나서 합격한 것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저 이번 시험의 과정에서 나에게 운이 조금 더 따라 준 덕분에 '합격'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뿐.

* 내가 지난 1월을 버틸 수 있도록 나를 다독여 준 고마운 나의 사람들에게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꼭 만나서 이 은혜를 갚겠습니다. 덕분에 버틸 수 있었어요!




     인간의 간사함은 끝이 없고

     최종 합격자 발표가 나기 전에는, 제발 끝 등수인 44등으로만 붙여 달라고 온 마음으로 기도했었는데… 그 간절했던 마음을 어느새 잊어버린 채, 지난 몇 주간 나는 부디 집 근처의 학교에 발령이 났으면, 부디 너무 어려운 업무를 맡게 되지 않았으면 하고 조금씩 더 큰 욕심을 부리고 있었다. 인간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이런 간사함을 부릴 수 있는 것 또한 이번 임용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특권임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때때로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정말 며칠 전(!)에야 내가 근무하게 될 학교가 발표되었고, 나는 지난 금요일에 처음으로 발령 학교에 가서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그때 내가 맡게 될 업무를 제대로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또 다시 다른 차원의 불안감과 염려에 휩싸여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올해를 무사히 보낼 수 있을까, 나는 어느 정도 괜찮은 교사이자 동료로서 제 역할을 다할 수 있을까 하는 오만 가지 걱정이 나를 잠식하고 있다. 다만 (생전 처음으로 학교에서 기간제 교사로 근무했던) 2년 전에도 어찌어찌 시간은 흘러갔으니, 이번에도 결국은 버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약간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나를 다독일 뿐이다.

     반 년간의 공백 끝에, 다시 학교에 돌아간다. 기간제 교사 시절의 내 모습을 떠올려 볼 때면 부족했던 것만 기억나 오히려 더 두려운 것 같다. 더 나아지지 못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어떡하나 싶은 것이다. 그런데 새 학교에 처음으로 다녀온 뒤 소위 '멘붕' 빠져 있던 나에게, 첫 제자였던 (당시에 중 3, 이제는 고 2가 되는) 학생이 전화가 왔다. 그렇게나 부족했는데 누군가에게는 내가 기억에 남는 선생님일 수 있다는 너무나도 감사한 사실에서, 올해의 나도 결국은 해 낼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져 본다. 대학교 09학번인 내가, 2009년에 태어난 아이들(올해 중 1)의 담임이 된다. 그리고 나는 이 아이들이 졸업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나는 가을과 겨울이 다가오는 것도, 그 계절이 지나가는 것도 알알이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나의 가을과 겨울은 임용 시험으로 점철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쩐지, 나는 올 가을과 겨울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아릴 것 같다. (그때가 되면 인간이 간사해서 새까맣게 다 잊을지도 모르지만) 내 주변에는 아직 지난한 이 임용의 과정이 끝나지 않은 유능한 선생님들이 여럿 계시고, 나는 그분들에게 (그분들이 유일하게 필요로 하는) 약간의 운때가 따라 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내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겠지만, 그래도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최대한 나누고자 노력할 것이다. 그 방법은 차차 고민해 보고자 한다.




긴 터널의 끝에서 드디어 빠져나온 느낌이다. 터널 속 어둠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인지, 지금은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셔 어지 눈이 시리고 버거운 것만 같다. 그렇지만 이 밝음에 차차 익숙해지면, 쏟아지는 햇살의 따뜻함과 그로 인해 만끽할 수 있는 새봄의 광경도 눈에 들어오겠지. 스물네 개의 우주가, 스물네 개의 봄빛이 내게로 온다. 나는 찬란하게 두렵다. 3월이다.


작가의 이전글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3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