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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락 Feb 16. 2024

한국의 단풍나무는 잘 지내고 있을까?

미국에서 1년 살기

아침 공기에 부쩍 차가운 기운이 느껴지고 아침저녁으로는 바람막이나 카디건을 챙겨야 할 정도로 쌀쌀한 날씨가 되었다.

차를 타고 지나다니며 보이는 가로수들과 산책로의 나무들에도 조금씩 변화가 느껴졌다.

'집 앞의 단풍나무도 한창 예뻐지고 있겠구나.'

한국에 있는 집 앞 단풍나무는 짧디 짧은 가을을 만끽하고 겨울을 맞이할 수 있게 해주는 나의 소소한 힐링이었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예쁜 빨강으로 물드는 청단풍은 봄의 연둣빛 새잎과는 또 다른 감동이었다.

단풍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슬슬 크리스마스트리를 꺼낼 준비를 하며 봄에 다시 만날 새 잎들을 기대하게 만들었다.

'여기도 사계절이 분명한 지역이니 가을 단풍은 좀 보고 지나가야겠지?'   

이 근방에서 단풍 나들이로 유명한 곳이 스모키마운틴이라 길레 1박 2일로 다녀오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지난 주말에 아이가 생일파티에 초대되는 바람에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에겐 가을단풍보다 친구의 생일파티가 훨씬 더 중요했으니까.

이제 단풍이 들기 시작해서 아직 만연한 가을의 모습은 아니지만 다음 주부터는 아이들 방학을 맞이해 따뜻한 남쪽으로 긴 여행을 계획하고 있던 터라 이번주 말고는 단풍을 구경할 기회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당일치기로라도 가까운 행잉락에 다녀오기로 했다.

워싱턴에 다녀온 후 오랜만에 떠나는 나들이에 잔뜩 들뜬 나와는 달리 아이들은 새로 설치한 태블릿 거치대에 더 신이 났다.

장거리 여행에 대비해 편리하고 사이좋게 영화를 볼 수 있도록 장만한 거였다.

비행기 좌석 같은 2열의 패밀리카에 헤드레스트 모니터.

아이들의 로망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


산으로 가는 길에 창밖으로 낯익은 도로가 보였다.

흔치 않은 빨간 풍차를 보니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들어 구글지도를 찾아봤더니 얼마 전에 다녀왔던 MS언니네 집으로 가는 큰 도로였다.

반가운 마음에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행잉락에 가는 길인데 언니네 집 앞을 지나가고 있다고 했더니, 언니는 행잉락에서 구경하면 좋을 곳들을 알려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들려 함께 저녁을 먹자고 초대해 주었다.

아이들은 갑자기 결성된 번개에 잔뜩 신이 나서 산에 가지 말고 그냥 이모네만 가면 좋겠다며 산이 가까워질수록 귀찮은 기색을 여실히 드러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내리면서도 차 타고 올라오면서 단풍은 이미 다 봤는데 왜 힘들게 걸어서 꼭대기까지 올라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산을 오르는 내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연신 하품을 하며 얼마나 더 가야 하냐고 투덜거렸다.

"공기도 좋고 너무 예쁘지 않아? 저것 봐, 저 나무 진짜 신기하게 생겼다."

"추워요. 그리고 원래 나무들은 다 다르게 생긴 거예요."


이제... 사춘기가 시작되는 건가?



그래도 모처럼의 나들이에 신이 나서 연신 셔터를 누르는 나의 요청에 따라 산을 오르는 중간중간 특이한 모양의 나무 앞에서 사진도 찍고 하다 보니 중간쯤부턴 몸이 좀 풀렸는지 서로 장난도 치고 간식도 나눠 먹으며 기분 좋게 등반하기 시작했다.

문득 어릴 때의 기억이 났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차가 밀리지 않던 시절이라 주말마다 산으로 바다로 우리를 데리고 다니시던 엄마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창밖 좀 봐. 나무색들 변한 거 봐라. 하늘이랑 너무 예쁘지?"

뒷자리에 앉아 멀미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나에게 창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는데 말이다.

근데 정말 소름 돋게도 그와 똑같은 말을 내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니.

나이가 들어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인가?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걸어서 정상에 도착하니 가을하늘답게 하늘은 맑고 날씨도 좋고 저 멀리 내려다보이는 풍경도 멋졌다.

투덜대던 아이들도 막상 정상에 오르니 뭔가 뿌듯하긴 한지 산 아래 풍경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기념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올라오는 길엔 한가롭고 조용했는데, 일찌감치 정상에 도착해서 앉아 있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래도 정상이라 그런지 바람이 엄청나게 불어서 벼랑 끝에 가까이 다가갔다간 자칫하면 바람에 떠밀릴 것 같았다. 

무섭지도 않은지 굳이 벼랑 끝에 걸터앉아 쉬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특이한 건 개와 함께 온 사람들이 엄청 많았다.

산을 오르는 동안에도 커다란 개들과 함께 온 사람들을 몇몇 마주치긴 했는데, 정상에 올라와보니 개들과 함께 온 사람들이 진짜 많은 것 같았다.

오히려 아이들보다 개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산을 내려와 피크닉장으로 이동해서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 먹기로 했다.

처음엔 테이블 옆에 설치돼 있는 바비큐 화로대에 가스버너를 올려놓고 끓였는데, 혹시 이 시기에 산에서 취사가 금지돼 있는 건 아닌지 눈치가 보여 은근슬쩍 바람을 핑계 대며 차 트렁크로 이동했다.

트렁크를 열고 서서 몸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바람을 가리며 라면을 끓이는데, 차 안에서 요리를 하는 게 마냥 신기한 아이들은 옆에 딱 붙어서 구경하느라 신이 났다.

"앞으로 여행 다니면 이렇게 차에서 밥 해 먹고 할 일이 많을지도 몰라."

"엄마, 그럼 우리 다음 주에 여행 갈 때도 그럴 거예요?"

"글쎄? 아마 그렇지 않을까?"

"우와! 그럼 우리 다음엔 짜장라면도 가져가요."

그래... 너희에겐 이 멋진 단풍으로 가득한 숲 속에서 가장 신나고 재밌는 일이 라면 끓이기구나.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부는지 차 안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불꽃이 계속 흔들려서 좀처럼 물이 끓지 않아 라면을 끓이는데 15분이나 걸렸다.

트렁크 문을 열어두긴 했지만 차 안에서 가스를 사용하는데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게 영 마음에 걸려서 다 될 때까지 밖에서 놀고 있으라고 내보냈더니 처음엔 이 재밌는 걸 구경 못해 아쉬워하던 아이들은 금세 산 놀이터(?)를 찾아냈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절대 없고 아이들이 없는 곳만 찾아다니며 둘이서 신이 났다.

숫기가 없어서 그런 건지 아이들도 언어의 장벽을 느끼는 건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언어의 장벽이 없는 한국에서도 모르는 애들과 어울려 놀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집에서 준비해 간 삼각김밥과 라면으로 소박한 점심이 차려졌다.

숲으로 둘러싸인 피크닉장은 꽤나 운치가 있었다.

여름엔 바비큐를 하는 사람이 많은지 곳곳에 화로대가 설치되어 있었고 테이블의 수도 많았다.

숲에서 하면 되는 것, 하면 안 되는 것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던 터라 바비큐를 하려면 허가를 받아야 하는지 그냥 해도 되는 기간이 따로 있는지 궁금했다.

문득 피크닉장을 이용하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어서 이 기간엔 산에서 취사금지가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려 하는데, 다른 테이블에 한 가족이 자리를 잡고 앉아 가져온 음식들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제야 안심이 되는 게 왜 이렇게 눈치를 보고 잔뜩 졸아있는 건지...

어쨌든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서둘러 테이블을 정리한 후 소화도 시킬 겸 사람들이 삼삼오오 앉아 일광욕을 즐기고 있는 호수로 향했다.

커다란 호수는 밑바닥이 보일 정도로 물이 너무 맑았다.

MS언니의 말에 의하면 여름엔 호수에서 수영도 하고 보트도 빌려서 탈 수 있다니 여름에 놀러 오면 재밌을 것 같으면서도 호수에서의 수영은 왠지 낯설어서 과연 우리가 내년 여름에 이곳에 다시 올 까 의문이었다.



근처에 있다는 폭포를 보러 한참을 걸어갔는데 폭포라기보다는 그냥 큰 물줄기정도였다.

이럴 거면 빨리 이모네 집으로 가자며 재촉하는 아이들의 성화에 아쉽지만 가을산을 뒤로한 채 언니네 집으로 향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못한 단풍나들이에 그냥 무리해서라도 스모키마운틴에 다녀왔어야 했나 후회가 됐지만, 이것보단 다음 주의 장거리여행이 훨씬 중요하니까 거기에 집중하자며 마음을 달랬다.

언니네 집 앞 정원은 역시 아기자기한 핼러윈 용품들로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며칠 전의 핼러윈 밤이 생각나는지 더욱 반가워하며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냥 가볍게 함께 저녁을 먹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언니는 아이들을 위해 바비큐는 물론이고 그동안 못 먹어서 그리웠을 거라며 양념게장과 각종 밑반찬들을 잔뜩 준비해 두었다.

맛있는 것들로 가득한 저녁식탁을 보자 아이들은 진심으로 먹는 것에 열중하며 행복해했다.



얘들아...

아무리 점심을 라면으로 때웠다고 해도 삼각김밥도 먹고 틈틈이 초콜릿과 사탕도 먹었는데, 이렇게 이성을 잃고 먹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엄마가 집에서 굶기는 것도 아니고.

엄마도 나름대로 열심히 잘해서 먹이고 있는 것 같은데, 나오는 음식마다 환호하는 너희를 보니 엄마가 좀 부끄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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