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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수토 Jan 07. 2023

작년의 책 (1)

작년 하반기부터 한국문화원에서 책을 빌려다 보기 시작했다. 프랑스어를 처음 배우니까 세 살이나 지껄일만한 문장을 버벅거리며 읽다가, 오랜만에 한글로 된 소설을 읽었더니 너무 황홀했다.


파리 한국문화원 도서관에는 있을 건 다 있는데 없을 건 없어서, 본의 아니게 고전을 많이 읽게 된다. 다만 나이가 들자 머리와 마음이 돌이 되어 책을 읽으면 글자들이 내게 머물지 않고 그냥 통과해서 지나가버리는 느낌이다. 마셔도 안 취하는 무알콜 맥주마냥 의미없이. 그래도 아직 마실 때 시원한 느낌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어쨌든 더 잊어버리기 전에 여기 대충이라도 정리해놓으려고 한다.


1. 달려라 토끼 : 존 업다이크      


달려라 방탄, 처럼 진취적인 얘기가 아니고, 달려서 도망가는 이야기다. 인생에서 잠깐 반짝하고 빛났던 젊은이 래빗은, 결혼해서 진짜 일반적인 인생을 맞닥뜨리자 견디다 견디다 말 그대로 달아난다. 그렇지만 우리 대부분이 그렇듯이, 달아날 곳이 없다. 그것이 함정.


이 책엔 청년 래빗이 나오지만, 이후에는 중년, 노년 래빗이 나오는 래빗 연작 소설이 있다기에 다 읽어보고 싶어졌다. 이런 시선을 가진 작가가 주인공과 같이 늙어가면서 쓴 글은 어떨지. 그럼 내 노년은 어떨지. 그러나 번역본은 없고 내 영어는 짧아서 슬프다.      


"래빗은 진실을 느낀다. 그의 삶을 떠난 것은 다시 돌이킬 수 없다는 것. 아무리 찾아 헤매어도 되돌아올 수없다는 것. 아무리 날아가도 거기에는 이를 수 없다는 것. 그것은 여기에 있었다. 도시 밑에. 이 냄새와 이 목소리들 안에. 영원히 그의 뒤에. 우리가 자연에 몸값을 내고 나면, 자연을 위해 아이들을 만들어내면, 충만함은 끝이 난다. 그러면 자연은 우리와 관계를 끝낸다. 처음에는 우리의 안이, 다음에는 밖이 쓰레기가 된다."


2. 친애하고 친애하는 : 백수린 


'그 여름의 빌라'를 포함해서 백수린의 소설 속 여자들은 자기가 꿈꿀 수 있는 만큼의 자유 가장자리를 기웃거리다 일부는 선을 넘고, 선을 넘는 순간 내가 책임져야 하는 세계는 흔들린다. 너무 착한 소설이라 이 책 안에서는 그런 사람들이 이해받을 수 있겠지만 현실에선 그렇지는 않을 테니 책으로 읽는 것이다. 어쨌든 그게 인간의 한계이고, 그걸 이해해주는 듯한 아래 부분만으로도 가치로운 소설이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그렇게 갑자기 생각나는 밤이면 나는 이제, 내가 그러했듯이 할머니 역시 할머니의 한계 안에서 나를 사랑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은 인간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그때 할머니의 상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 그렇게 큰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을 만큼의 나이를 먹었다.


3. 시핑 뉴스 : 애니 플루


내가 뽑은 2022년의 도서 1위. 박복하게 태어나 빠른 속도로 불행해지던 코일이라는 남자가 적응하고 회복하고 마침내 행복해지는 이야기다.

그는, 어쨌든 살아가긴 해야하니까, 졸지에 배도 타고, 지붕 널도 만들고, 새 직장도 갖고 새 사람도 만난다. 그리고 서서히 괜찮아진다.

무엇보다 이 나이에 타지에서 허둥거리다 의기소침해진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아래는 처음으로 배를 타보려 시행착오를 거듭하는 장면. 내 모습인가 싶었다.

  

 1. 그가 트레일러를 선착장에 대는 모습은 마치 잭나이프를 칼집에 넣으려고 계속 접었다 폈다 하며 씨름하는 것 같았고, 트레일러는 두 차례나 새로 만든 선착장에 부딪혔다. 넌더리가 날 무렵에야 트레일러가 똑바로 물속에 들어갔다.

 2. 배를 내리려고 트레일러를 기울이는 장치에 손을 대는데 배를 묶어놓을 밧줄이 생각났다. 배가 물에 둥둥 떠내려가는 걸 지켜보는 것도 재미있겠지.  

 3. 가까스로 뱃머리와 배꼬리에 밧줄을 부착하고 트레일러를 기울였다. 배가 물 위로 미끄러져내려 갔다. 두 사람 손이 필요한 일이었다. 다시 트레일러로 가서 기울어진 걸 똑바로 해놓고 케이블을 감아올렸다. 오십 달러짜리 배가 물에 떴다.  

 4. 배에 타서야 염병할 모터에 생각이 미쳤다. 스테이션왜건에 두고 내린 것이다. 모터를 가져와서 뱃전에 한쪽발로 버티고 서다가 배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는 뗏목에서부터 초대형 유조선까지 배란 배는 모조리 저주했다.  

 5. 모터를 당기자 무리 없이 돌아갔다. 코일, 그가 배꼬리에 앉아있다. 그의 배. 모터가 돌아가고, 키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가락에서 결혼반지가 반짝인다.  

 6. 코일은 키를 움직여 구불구불 달렸다. 속도도 좀 내보았다. 그는 픽업 화물카에 탄 개처럼 웃었다.


4. 빅 슬립 : 레이먼드 챈들러


하루키가 왜 레이먼드 챈들러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기야 나는 하루키도 그렇게 안 좋아한다.


5. 성 : 프란츠 카프카 


내가 좋아하는 마블 영화를 보면 히어로들이 겪는 고난은 늘 원인이 분명하고 목적과 유의미하게 연결이 되어있기에 후련하다. 그것은 판타지의 세계라 가능할 것이지만, 그래도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이, 마블 영화와 카프카의 중간 쯤에라도 위치하기를 바라본다. (내내 속터지게 헤매게만 하던 이 책은 심지어 완결되지도 않는다)


내가 아까 말한 그 공문에 대해 우리는 뜻은 고맙지만 측량사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회답이 원래 부서로, 그것을 A라고 할게요, 돌아가지 않고 일이 잘못되어 B라는 다른 부서로 간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A부서는 회답을 받지 못했고, 그렇다고 B부서가 우리의 회답을 온전히 받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서류의 내용물이 그냥 우리에게 남아 있었는지, 아니면 가는 도중에 분실되었는지 - 내가 장담하건대 원래 부서에는 가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 좌우간 B부서에는 서류 봉투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봉투엔 안에 있어야 할 서류가, 실제로는 없었지만 측량사의 초빙 문제에 관한 내용이란 사실만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A부서에서는 우리의 답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실 A부서에서는 그 안건에 관한 기록이 있었지요. 하지만 이런 일은 당연히 자주 일어날 수 있고, 또 일 처리를 아무리 꼼꼼히 해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지요. 그래서 담당자는 우리의 답변을 기다리다가 측량사를 초빙하든가, 또는 필요에 따라 우리와 연락을 취하든가 할 생각이었지요. 하지만 그는 메모하는 걸 소홀히 해 이 일을 깡그리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B부서에서는 성실히 일하는 걸로 유명한 소르디니라는 이탈리아 인 담당자가 그 서류봉투를 받았습니다....

...

"이 이야기가 지루하지 않아요?" 그가 물었다.

"아니요, 재미있는데요"

K의 이 말을 받아, 촌장은 이렇게 말했다.

"재미있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제가 재미있다고 한 것은, 하찮게 꼬인 일이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게 된다는 사실을 통찰했기 때문입니다.“

”아직까지는 통찰이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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