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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사 Jan 17. 2024

다낭, 나트랑이 지겹다면 답은 퀴논

베트남 퀴논에서 뭐하지?

베트남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건 쌀국수도, 호치민도, 하노이도 아니었다. 베트남전 참전 용사였던 아빠의 주둔지였다는 ‘퀴논‘이라는 이름이 베트남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이다. 현지인들은 꾸이뇬, 꾸이년, 뀌년, 쿠이논 등 다양한 발음으로 부르는 베트남 중부의 그 도시 말이다.


가족 사진첩에서 흑백사진 속 아빠 사진을 본 적 있다. 주름 하나 없이 팽팽한 얼굴은 까맣게 그을렸고, 몸은 굽은 곳 없이 꼿꼿하고 탄탄했다. 내가 태어나기 한참 전, 충청도 산골에서 자란 7남매의 장남이었던 아빠.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군복무 중 퀴논행을 택했다. 멀미와 싸우며 한 달 동안 배를 타고 도착한 열대의 나라에서 아빠는 전화 교환병으로 근무했다. 아빠의 귀가 망가진 건 폭우가 자주 쏟아지는 그곳에서 생긴 전기 감전 후유증 때문일 거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일로, 취미로 해외를 오가면서 목표가 생겼다. 대의명분이나 진영의 논리보다 그저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던 아빠의 청춘이 녹아 있는 그 땅에 언젠가 가보고 싶었다. 퀴논에 가보고 싶다는 욕심은 어쩌면 아빠보다 내가 더 컸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닫히기 전, 베트남 여행을 간 적 있다. 여행 초보가 가기에 이름난 관광지가 아닌 퀴논에 가기엔 겁이 났다. 첫 베트남 여행을 마무리하며 다짐했다. 다음에는 꼭 퀴논에 가야지.      


그 다짐은 코로나19가 잠잠해진 후에야 현실이 됐다. 이번에는 하노이에서 출발해 퀴논으로 이어지는 2주간의 여행이었다. 그 사이 아빠는 더 노쇠해졌고, (아마도) 이번 생의 마지막 해외여행이 될 베트남 북중부 여행은 보름으로 일정을 잡았다. 일주일간 하노이에 머문 후 나머지 일주일을 퀴논에서 묵기로 했다. 시끌벅적한 하노이를 뒤로하고 퀴논행 국내선 비행기에 올랐다. 일부러 창가 쪽에 안게 해 드린 아빠는 퀴논이 가까워질수록 눈이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땅에는 산과 논 뿐인 단조로운 그림이 이어졌고, 약 1시간 40분의 비행 후 우리 가족은 퀴논 푸캇 공항(UIH)에 도착했다. 시원한 공항을 빠져나가자마자 덥고 습한 공기가 코 끝에 닿았다. 이른 가을 같았던 하노이와는 분명 달랐다. 열 걸음만 걸어도 땀이 삐질삐질 쏟아지는 무더위를 피해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퀴논의 곳곳을 쏘다녔다.      




빈딘 박물관

파워 계획형 인간답게 출발 전, 가장 신경 쓴 부분은 아빠가 기억할 만한 곳을 찾는 일이었다. 아빠와 비슷한 시기에 근무했던 군대 선후배들이 다녀온 흔적부터 살폈다. 역시나 반세기 가까이 지났으니 대부분 개발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수풀이 우거져 일반인이 접근하기는 어려웠다. 그나마 남아 있는 곳은 시내 중심에 있는 <빈딘 박물관>이었다. 우리나라의 ’도’에 해당하는 빈딘 성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다. 이 박물관 건물은 원래 지역 문화센터로 쓰였다. 퀴논 시민을 위해 맹호부대와 당시 국내 대기업이 건립해 기증한 것이라고 한다. 참파 왕국(192년∼1832년)의 유물부터 베트남 공예품을 비롯해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록물과 군사용품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아빠가 소속된 맹호부대의 자취도 남아 있었다. 베트남 국민들에게 아픈 역사 한편에 바다 건너온 청년의 청춘도 담겨 있다. 이제는 낡다 못해 부식된 군복, 무기, 깃발 등을 보던 아빠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기력이 쇠해 10분 걸으면 5분은 앉아서 쉬어야 한다. 하지만 카페인 가득한 베트남 커피 덕분인지 아니면 잊고 지낸 청춘의 흔적이 담긴 유물 앞에 아빠는 다시 팔팔한 20대로 돌아갔다. 이미 사전 자료 조사를 통해 대부분 알고 있었던 내용이었지만 처음 듣는 내용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아빠에게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은 타임머신이 되어 아빠를 빛나던 그 시절로 데려다주었다.   

   

키코 비치(Kyco Beach)

처음에는 나트랑, 다낭 같은 이름난 관광지가 아닌 퀴논에서 일주일이나 여기서 뭘 하나 싶었다. 국내 블로그의 후기는 채 10개도 되지 않았고, 그마저도 거의 코로나19 이전이었다. 골프가 아니라면 딱히 할 게 없다는 후기들 속에서 보석 같은 여행지를 찾았다. 퀴논은 한국인들에게는 낯설지만 현지인들이나 서양 여행자들에게 나름 이름난 곳이었다. 그중 제일 유명한 곳은 키코 비치(Kyco Beach)다. ‘베트남의 몰디브’라고 불리는 이곳은 SNS에서 사진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 10월은 우기라 에메랄드빛 바다를 볼 순 없었다. 호텔 컨시어지 담당자는 날씨가 좋을 때 가야 한다고 우리를 말렸다. 날씨를 보며 몇 번의 도전 끝에 현지 여행사의 데이 투어로 예약하고 키코 비치로 향했다. 여행사 버스는 입구까지만 들어갈 수 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아 입장료에 포함된 승합차를 개조한 차를 갈아타고 해변까지 간다. 베트남 젊은 층의 SNS 사진 성지답게 각종 포토 스폿과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다. 변변한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던 엄마, 아빠를 위해 베트남 청춘들과 똑같은 구도와 포즈로 인생샷을 찍었다. 다시 오기 힘든 곳이니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에도 파라솔 아래에 돗자리를 펴고 망중한을 즐겼다. 햇빛 쨍쨍한 날, 몰디브 뺨치는 영롱한 바다를 상상하며 말린 망고와 캐슈너트를 까먹었다.       


에오 지오 (Eo Gio)

퀴논 데이 투어의 오전 메인 관광지가 키코 비치라면, 오후의 메인은 에오 지오다. '바람을 품은 여울'이라는 뜻의 이곳은 우리나라로 치면 제주도 섭지코지와 비슷한 분위기다. 아름다운 해변을 둘러싼 바위 산 덕분에 일출, 일몰 스폿으로 유명하다. 날씨가 흐려서 아름다운 해는 보지 못했다. 대신 가이드의 열정적인 사진 촬영 덕분에 바람에 휘날려 산발한 머리의 가족사진이 남았다. 이때를 귀신같이 끼어든 에오지오 현지 사진사(?)는 가이드 옆에서 관광객들의 사진을 찍고, 현장에서 인화해 준다. 가격이 그리 부담스럽지 않아 돈을 주고 가족사진을 받아 들었는데 이런... 플라스틱 파일에 담겨 있어 반짝거리는 사진인 줄 알았는데 A4 종이에 컬러 프린트를 한 거였다. 이미 돈을 냈으니 되돌릴 수 없어 그냥 웃으며 넘겼지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다리가 아파 다른 여행객들처럼 돌로 된 산책로를 걷지 못하고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우리 가족은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했다. 여행사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 퀴논의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아빠의 눈은 바쁘게 움직였다. 아빠의 기억 속 퀴논은 온통 풀숲과 다 쓰러져 가는 초가집뿐이었는데 번듯한 관광지로 성장한 모습에 뿌듯해하셨다.


바이셉 비치

키코 비치에서 스노클링을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러 다음날, 숙소에서 택시로 30분 거리에 있는 바이셉 비치로 향했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해수욕을 즐기기 위해 아침 7시에 택시를 불렀다. 8시인 출근과 등교를 위해 이미 도로는 복작거리는 중이었다. 시내 중심의 정체 구간을 빠져나오니 나무가 우거진 도로를 거침없이 달렸다. 얼마 후 좁디좁은 마을 골목에 들어서자 택시가 멈췄다. 길이 좁아 더 이상 차가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파워 계획형 인간은 이미 알고 있었다. 4시간 후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하고 기사님은 시내로 돌아갔고 우리는 바닷가로 향했다. 바이셉 비치 역시 서양 배낭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의 구글맵 후기가 많은 곳이다. 마음 같아서는 해산물 시장이 열리는 저녁때까지 놀다가 저녁 식사까지 해결하고 싶지만, 나이 든 부모님이 그때까지 견디긴 무리였다. 호스텔과 음식점을 겸하는 카페에 들러 모닝커피를 마시고, 화장실에서 수영복으로 갈아입었다. 단단히 채비를 마치고 바다로 나가니 낚시하는 어부 한 명뿐이었다. 여행객은 하나 없고 해변에는 작은 게들이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불규칙하게 밀려오는 파도에 온몸이 젖고, 모래성을 만들다 부수기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놀 듯 물장난을 하고, 우스꽝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었다. 놀다 지쳐 카페로 돌아와 브런치로 ‘퀴논 맥주’와 ‘반쎄오‘를 먹었다. 오롯이 우리 가족이 전세 낸 바이셉 비치에서의 시간은 이번 퀴논 여행에서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최고의 순간으로 남았다.      




합리적인 가격과 짧은 비행 거리, 다양한 볼거리, 이색적인 음식 등을 갖춘 베트남은 한국인들에게 매력적인 여행지다. 그래서 경기도 다낭시나 서울시 나트랑구 같은 웃을 수만은 없는 별명이 생길 정도다. 어느덧 달랏이나 푸꾸옥도 한국인이 넘쳐나기는 마찬가지다. 반면 일주일간 퀴논에 머물면서 한국 여행객은 딱 한 팀 만났다. 그만큼 퀴논은 아직 한국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다. 이번 겨울 한시적이지만 직항도 생겼다고 하니 한국에서 퀴논으로 가는 길이 한결 편해졌다. 이 기세라면 퀴논은 멀지 않아 다낭, 나트랑을 대체할 대세 휴양지가 될 게 분명하다. 그러니 유명세에 몸살을 앓기 전, 순수한 퀴논을 누릴 수 있는 적기는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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