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구석이 있다는 것의 의미
버스 환승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건너편의 대형 쇼핑몰이 보였다. 외벽에 내가 좋아하는 생활용품 브랜드의 간판이 반짝거렸다. 마침 버스 도착 안내판에는 내가 탈 버스가 15분 후에 도착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길을 건너 쇼핑몰 4층까지 갔다 돌아오기 넉넉한 시간이었다. 쇼핑몰에 들어가 무수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아까 본 생활용품 브랜드 매장으로 직진했다. 미로 같은 진열대를 지나 목표 지점에 도착했다. 페퍼민트, 감귤, 라벤더 세 종류 중 시향 한 끝에 집게손가락 크기의 작은 라벤더 향 아로마 롤 온을 택했다. 라벤더 향은 심신 안정과 숙면을 도와준다는 효능이 적혀 있었다. 결제한 후 바로 종이 포장을 뜯고 손목 맥박에 롤 온을 지그시 문질렀다. 차가운 은색 롤러 볼이 지나간 자리에는 라벤더 오일 흔적이 남았다. 손목 안쪽에 바르고 손목을 맞닿게 만들어 향을 더 몸에 퍼지도록 만든 후 기도하는 마음으로 코로 깊숙이 향을 들이마셨다. 찬 공기와 낯선 상황에 잔뜩 긴장했던 몸과 마음이 스르르 녹았다.
불안해요
내 말에 전문가 선생님은 부처님 같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불안함은 지우개로 지운 듯 단번에 사라지지 않아요. 호사님이 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은 뇌를 속이는 거예요. 어떨 때 편안함을 느끼세요? 다음에 만날 때까지 호사님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방법을 찾아보세요.” 얼떨결에 <편안해지는 방법 찾기>라는 숙제를 받았다. 좀 더 집중하기 위해 10개로 셀프 목표를 잡았다. 편안함에 이르는 나의 루틴을 찾는 게 요즘 내가 집중하는 일이다.
라벤더 향 아로마 롤 온을 산 것도 이 숙제의 일환이었다. 요가 수업 때, 가끔 선생님이 뿌려주는 아로마 미스트를 느끼며 ’아 좋다!‘라고 생각했지만, 살 필요를 느끼진 못했다. 몇 번 아로마 오일, 향초, 편백 스프레이, 룸 스프레이 등을 사거나 선물 받아 사용했지만, 바닥을 보일 때까지 근성 있게 활용한 적은 없다. 몇 번 뿌리다 방안 어딘가에 먼지 쌓인 채 방치되다가 사용 기한을 넘기거나 싫증이 나서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게 흔한 엔딩이었으니까. 또 비슷한 결말이 재생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지만 또 샀다. 이번에는 믿을만한 구석이 있으니까.
선생님이 말한 불안한 뇌를 속이는 방법의 예 중 하나가 바로 휴대용 아로마 오일이었다. 예고 없이 찾아오는 게 불안이니까 그런 상황이 되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손 닿는 거리에 있으면 효과가 좋을 거라고 했다. 몸은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아로마 향을 맡으면 그 순간 정신이 환기되면서 편안함 쪽으로 몸과 마음이 이완된다. 쉽게 말해 몸이 러시아워 지하철 안에 있더라도 주머니 속 아로마 롤 온의 뚜껑을 열어 눈을 감고 향을 맡을 수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기분만은 평온한 요가센터 안에 있는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신기한 게 주머니에 롤 온을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차하면 주머니에서 꺼내 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커다란 방패를 쥔 기분이었다. 현실은 라벤더 향 뒤에 슬쩍 숨는 비겁한 방법이지만 불안이 찾아오면 ’ 당장 꺼져 ‘라고 말한 후 기댈 수 있는 믿음직한 내 편이 생긴 기분이다. 그래서 막연히 편안한 상태를 상상하는 것보다 편안함에 10가지 확실한 방법을 찾으라는 숙제를 내주셨던 걸까?
<편안해지는 방법 10가지 찾기>는 숙제는 오늘도 진행 중이다. 어떤 때에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파악하기 위해 감각의 레이더를 바짝 세워 탐색하고 있다. 따끈한 물에 비누 거품을 내서 싹싹 손 씻기, 카페인 없는 따뜻한 차 마시기, 숨찰 때까지 달리기 등 되도록 시간과 공간에 큰 제약이 없는 방법들을 찾고 있다. 10개의 리스트에는 어떤 방법들이 들어갈까? 뭐가 됐든 갑작스럽게 벌컥 불안이 문을 열어도, 불안에서 탈출할 10가지 비책이 담긴 리스트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