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모레비(木漏れ日)」 4.
이거,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이 세상 모든 것에는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성질이 있다. 그래서 우울증에 빠진 사람은 쉽게 그 우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치아를 교정한 사람은 방심했다가는 이가 원래 모양대로 돌아가고야 만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람도 어김없이 그 모습 그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고. 맞다, 말도 안 되는 변명 중이다.
학교를 자퇴하겠다고 결심하고 나서 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라는 이야기는 귀에 피가 나도록 들었다. 일본 유학을 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서는 더 많이 들었다. 심지어 이곳에서 대학원까지 가버리겠다 했을 때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꿈이 내겐 늘 현실 같았다.
대학 시절에는 알바를 이것저것 많이 했다. 가족의 지원과 장학금을 달마다 받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많이 돈을 모아두고 싶었다. 지금부터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은 싹 다 돈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알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재미있는 일도 참 많았다.
——
일본에서 처음 한 알바는 이자카야에서였다. 나는 홀서빙과 음료를 만드는 일을 했다.
술을 마시는 장소인 만큼 웃긴 에피소드는 매일 같이 생겼다. 그중 가장 유쾌했던 것은 이름에 관해서였다. 일본 대부분의 가게에서는 종업원들이 가슴에 명찰을 달고 일하는데, 일본인들의 풀네임은 한국인들처럼 두, 세, 네 글자로는 끝나지 않기 때문에 보통은 성만 한자나 가타카나로 쓴다. 내가 일했던 이자카야는 성을 가타카나로 쓰는 곳이었고 내게도 명찰과 마카가 주어졌을 때 나는 다시 한번 더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저는 풀네임 쓰면 안 될까요?”
선배는 고개를 저었다. 무조건 성만 써야 한다고.
나는 두 선을 마카로 직직 그었다.
「ハ」
한자 8(八)처럼 생긴 이 두 선이 가타카나로 ‘하’이다. 남들은 스즈키, 카와무라, 사토를 쓰고 있을 때 나 혼자 ‘하’라고 썼다. 그걸 본 선배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 상 나노(하 씨야)?”
그때는 몰랐다. 그 네 글자가 이자카야에서 일하는 내내 따라올 줄은.
성이 김, 이, 박 씨면 일본인들도 대부분 알아본다. 한국인이라는 것을. 그런 인식이 전제되어서인지 부르기에 그다지 어색하지도 않다. 키무 상. 이 상. 파쿠 상.
그런데 하 상?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이름이라고 생각했는지, 내가 서빙을 할 때마다 손님들이 내 명찰을 유심히 쳐다보는 경우가 많았다. 숫자 8(八)을 쓴 건지, 가타카나 하(ハ)를 쓴 건지조차 모르겠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사람 성이 ‘하’일리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내게 ‘하치(숫자 8을 일본어로 ‘하치’라고 읽는다)‘인지를 물어보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곤란해하며 ‘하 데스’ 라고 대답하고는 했는데, 마치 죽음의 신 하데스를 말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다.
하 상 나노? 혼또니 하 상 나노? 같은 질문에 익숙해질 무렵, 어느 날은 손님 중 한 아저씨가 내가 이렇게 물었다.
“난데 하 상 나노(왜 하 씨인 거야)?”
나는 너무나 당황한 나머지 이렇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하 씨여서요….”
아저씨는 잠시 나와 똑같이 얼빠진 얼굴을 하더니 곧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라며 큰 소리로 웃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서 내가 한국인이라고 말했다.
“아, 한국인이구나. 중국? 베트남? 아무튼 완전히 다른 나라인 줄 알았어. 하 씨는 처음 본다. 키무 상이었으면 바로 알아봤지!”
그러더니 그 아저씨는 휴대전화를 꺼내 갑자기 어느 절에 있는 나무 사진을 보여주었다.
“여기가 어디게?”
“잘 모르겠는데요.”
“모르면 어떡해! 봉은사잖아!”
눈을 끔뻑거렸다. 나는 서울 사람이 아닐뿐더러, 아마 서울 사람이었더라도 그 나무 사진만 봐서는 봉은사인지 몰랐을 것이다. 아저씨는 계속해서 문제를 냈다.
“여기는 어디게?”
“그것도 모르겠는데요.”
“한국인 맞아? 북한산이잖아!”
사진 속에는 등산복을 입고 웃고 있는 아저씨가 있었다. 아저씨는 자신이 일 때문에 한국으로 출장 갈 일이 있었는데, 가보니 참 여행하기 좋은 나라라 생각하여 개인적으로도 한국에 가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런 곳에서 한국인을 보니 반갑다고. 외국에서, 심지어 이자카야에서 일하면 힘든 일 많을 텐데 열심히 하라며 덕담을 해주었다.
그 아저씨의 말대로 이자카야는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된 외국인이 무턱대고 일할 만한 곳은 아니었다. 마치 유튜브에서 고든 램지가 후배 요리사들을 훈육하듯이 선후배 간의 위계질서가 확실했고 일명 ‘군기(?)’가 들어있어야 했다. 손님이 오면 큰 소리로 다 같이 ‘이랏샤이마세!’를 외쳐야 했는데, 그 큰 이자카야의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하건만 안쪽에 있는 주방까지 그 소리가 들려야만 한다며 혼나기 일쑤였다. 나는 목청이 터져라 ‘이랏샤이마세!’라고 했건만 발음이 왜 그 모양이냐며 성에 찰 때까지 ‘이랏샤이마세’만 외치게 시킨 적도 있다. 요리가 나오고 주방의 아르바이트생들이 몇 번 테이블인지를 알려주면 ‘카시코마리마시타!(알겠습니다)’라고도 기차 화통 삶아 먹은 것처럼 외쳐야 했고, 손님들의 테이블 사이를 뛰어다니며 맥주잔을 양손에 여덟 개씩 들고 옮기거나 내 몸집만 한 설거지통을 이리로 날랐다가 저리로 날랐다가 했다.
그런 것은 다 일의 일환이니 그렇다 쳐도, 취한 손님 중에는 이상한 사람도 많았다. 몇 살이냐, 어디 사냐를 묻는 것은 기본이고 한잔하지 않겠냐, 같이 마시게 옆에 앉으라고 하는 사람도 많았다. 거절했다가 손목을 잡히기도 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정말 평범한 프랜차이즈 이자카야였다. 굳이 비교하자면 한국의 역전 할머니 맥주 같은.
알바를 그만두고 나서 남은 것은, 평생 술자리에서 말할 때마다 웃길 ‘하 상 나노?’ 에피소드와 나를 다 알고 있는 듯이 격려하던 아저씨의 말. 가끔 모르는 어른들은 말하지 않아도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아 무섭다. 무섭고 좋았다. 그렇게 봐주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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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는 절대 이자카야에서 일하지 않으리라 다짐하고서 한국어 학원이나 호텔 프런트 같은 알바를 했다. 간간이 통역이나 번역 일도 하면서. 그런 곳에도 진상은 있었다. 그리고 그걸 그냥 웃기게 버티는 힘도 나에게 있었다. 한국어 학원은 나와 대화하며 배우러 오는 곳이니 그나마 나았지만, 호텔은 정말 여러 손님이 오갔다.
왜 자신의 이름을 한 번에 못 알아듣는 거냐며 화를 내는 것은 물론이오, 주차를 남의 자리에 해놓고 연락을 받지 않는 손님, 본관 가격으로 신관에서 묵게 해달라는 손님(신관이 더 깨끗해서 가격이 비쌌다), 호텔 근처에 여자가 술을 따라주는 유흥 주점이 어디냐고 묻는 손님, 호텔방에서 치고받고 싸우다 경찰을 부른 손님까지!
이야기보따리를 풀자면 밤새 술술 나올 지경이다. 어쨌든 그렇게 여러 일을 해서 졸업 때 모인 돈은 천오백만 원 정도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보잘것없는 액수일지도 모르지만 내게는 천금, 만금보다 커 보이는 돈이었다. 목돈이라는 건 정말 좋았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그걸로 어떻게든 오사카에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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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계속해서 모아야 한다. 다람쥐가 자기가 묻은 도토리의 위치를 기억도 하지 못하는 주제에 습관처럼 계속 도토리를 수집하고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어디에 구체적으로 쓸지도 모른 채로 일단 돈을 더 모으고만 싶었다.
내겐 돈 덩어리라는 별칭이 있었다. 남들이 모두 돈을 버는 것을 꿈으로 삼았을 때, 나 혼자서만 바보처럼 돈을 쓰는 것을 꿈으로 잡았다. 그럴 때마다 누군 돈 쓰기 싫을 것 같냐, 벌어야 하니까 벌지, 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알바를 하면 할수록 벌어야 하니까 버는 것을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못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 못 할 것 같다는 말은, 일을 못 할 것 같다는 뜻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만을 목적으로 둔 채 돈을 벌 수는 없다는 뜻이었다. 어느 무역 회사에서 알바를 했던 적도 있는데, 그때는 평범한 회사원처럼 아침 일곱 시에 정신도 못 차린 채로 단정한 옷을 아무거나 주워 입고 피곤한 사람들 틈에 끼여 전철을 타고 회사에서 멍때리며 일을 하다 퇴근하면 이미 하루가 다 가 있는 나날을 보냈다. 간접 회사원 체험 같았다. 수업이 있는 날은, 학교에 갔다가 회사로 가든지 회사에 갔다가 학교로 가든지 했다. 회사, 학교, 회사, 학교를 반복하니 점점 생각도 빈곤해지고 귀찮아졌다. 그래도 계속했다. 계속할 수 있었다.
‘나는 석사를 가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거야’라고만 되뇌면 무슨 일이든 가능했다. 꿈이 있어서, 내가 돈 덩어리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느꼈다. 동시에 나는 그냥 태생부터가 잘 먹고 살기 위해서만 돈을 버는 건 못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꼭 대학원 학비라든지, 자비 출판이라든지 아무튼 어떠한 목적이 돈을 버는 나를 궁핍하지 않게 했다.
돈 덩어리, 아직도 현실을 모르는 풋내기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지난 7월이 우울했던 것은 돈을 모으고는 있으나 그 모은 돈을 어디에 쓸지 몰라 기력을 잃었던 거라고 설명할 수 있다. 박사를 가기 위해서라기엔 아직 진학에 확신이 없었고 창작에만 집념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경험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작정 다른 나라로 워킹 홀리데이나 유학을 가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건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놓고 싶었다.
나는 무얼 하고 싶은 걸까. 돈을 모아서 어디에 쓰고 싶은 걸까. 뭘 하려고 돈을 벌고 있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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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문득 고민가(古民家)가 떠올랐다.
도쿄 근교에 미우라 반도라는 관광지가 있다. 외국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한적한 곳인데, 학부 시절 친구가 데리고 가 준 적이 있었다. 그곳은 바다와 인접해 있어 어디를 가도 짭짤한 소금 냄새가 났고 갈매기가 머리 위를 날아다녔다. 그리고 참치가 유명했다. 시나가와역에서 마구로 티켓을 사면 그걸로 미우라 반도까지의 왕복 열차와 미우라 반도 내에서의 마을버스 이용, 그리고 참치가 들어간 식사 한 끼와 다양한 체험(또는 기념품 하나)을 할 수 있었다. 나는 거기서 배도 탔고 말을 전혀 닮지 않았지만 말 이름이 붙은 바위도 보았고 참치 회도 먹었고 친구끼리 비즈 팔찌도 맞추었고 분위기 있고 조용한 카페도 갔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어디를 가든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는 고양이들이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는 것. 파도가 철썩철썩 쳐대는 바위 아래에도,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밥집 옆에도 고양이들이 있었다. 그만큼 이곳 사람들이 박하지 않다는 증거 같아서 좋았다.
아, 이런 데서 살고 싶다. 집에서 한 발짝만 나오면 바로 바다가 보이고 고양이가 있고 사람은 순하고 조용한… 이런 곳에 있고 싶다. 그때 내 눈에 띈 것은 미우라 반도의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 아주 오래된 주택들이었다. 거의 목조로 지어져 있었고 어떤 건 너무 낡아서 사람이 살 수 있나 싶은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고민가가 늙어가는 사람과 함께 세월을 맞으며 도란도란 모여 있는 것을 보며 나도 그 옆집에 사는 수상한 여인네가 되어 지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그래서 그냥 알아나 보자 하고 미우라 반도 고민가 매매를 검색해 본 적이 있었고 생각보다 해볼 만한 가격에 흐음, 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을 떠올리자, 내 마음이 다시 꽉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일본에 가서 살고 싶다고 처음 생각했을 때도 그랬다. 내 몸에 꼭 맞는 옷처럼, 잠들기 안성맞춤인 온도처럼 나를 가득 채웠다.
고민가를 사서 게스트 하우스를 하겠다, 그걸 위해서 하루빨리 돈을 벌고 싶다고 썼지만, 사실상 아무것도 정해진 게 없다. 게스트 하우스를 하겠다는 것도 전혀 확실한 생각이 아니고, 건물이라는 게 가격이 괜찮다고 양파 사듯 막 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 그냥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내겐 꿈이 늘 그랬다.
학교를 그만두고 고시원에서 생활할 때, 나는 분명히 ‘이상하게도 나에게 하루치만큼의 살아갈 힘이 어디선가 샘솟았다’라고 적었다.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상담 선생님이 내게 왜 그렇게 애를 쓰냐고 물어보았을 때 나는 일본에 살아보고 싶어요, 라고 답했다.
힘이 들 때마다 나는 도쿄의 대학생이 된 나를 상상했다. 복잡한 시부야의 스크램블 교차로에서 사진 찍는 외국인 관광객들 사이로, 나는 이곳에 사는 사람이니 사진 따위는 찍지 않는다는 유치한 마음을 가지고 쏘다니는 내 모습을 말이다. 밴드부에 들어가서 기타도 치고 동아리 합숙 가서 수박도 깨고 불꽃놀이도 하고. 이자카야 같은 곳에서 알바도 해보고 일본인 친구도 사귀고 창문이 큰 육첩방에서 작은 식물을 키우는 나. 그걸 상상할 때면 이미 그것을 다 이룬 것처럼 기뻤다.
내게 꿈이라는 건 참 위험하다. 가장 예쁜 장면만 보여주면서 나를 계속해서 살게 만든다. 인생이 완전히 망해버려도, 창문 하나 없는 고시원에서 울고 있어도, 사람들과 영영 헤어지기를 반복해도 나를 다시금 살고 싶게 한다. 그러니까, 염치가 없을 만큼 강력하다.
——
취직 준비를 시작했다. 열심히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써서 말이다.
이미 상상이 멈추질 않는다. 머릿속에서 나는 이미 바닷가 어느 고민가에 게스트 하우스를 차렸다.
그 고민가는 짙은 색 나무로 지어졌다. 벽지를 새로 붙이고 먼지 쌓인 집을 싹싹 청소하고 가구를 채워 넣는다. 집과 잘 어울리는 색깔의 이 층 침대에는 꽃무늬 이불. 창문에는 햇살이 비쳐 들어오는 레이스 커튼을 달고 베란다에는 대파나 바질 같은 채소를 심어 놓는다. 여름이면 그 마루에 앉아 선풍기를 달달 틀고서 시원한 수박을 쪼갈라 먹고 겨울이면 코타츠를 놓아 다 같이 둘러앉아 귤을 까먹어야지. 잠옷이 없는 사람에게는 유카타도 빌려주고 고양이들에게 밥도 챙겨주고. 어떨 땐 다다미 위에 아무것도 안 깔고 누워 있기도 하고 좋은 향의 입욕제를 사면 묵는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고. 낮에는 하루 종일 청소하고 밤늦게는 노곤한 몸으로 전등 아래서 책도 읽겠지. 어떨 땐 글도 쓸 거고. 어떨 땐 그림도 그리겠지. 기분이 정 좋으면 노래도 흥얼거릴 거고. 바다 내음이 계속 불어올 거고. 그러던 어느 날 이부자리에서 마음이 영 간지러우면 새로운 꿈을 가져야지. 또 그 꿈을 먹으면서 살아야지.
상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늘 기대보다 덜 아름답기 마련이었다. 그런 실망조차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을 땐, 역시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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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레비에 카모플라쥬.
그 햇살 조각을 쐬면서 이대로 남들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다던 내가, 커서는 어느 고민가 의자에 앉아 읽는 책 위로 다시 같은 그림자가 지기를 바라고 있다.
무성히 드리운 한여름의 나뭇잎 사이로 어떻게든 내게 닿겠다는 의지로 내리는 빛.
내가 가장 연약한 생명체였을 때 나를 숨겨주었던 초록이 다시 싱그럽게 나를 부르는 것만 같다.
이리 와, 내가 너를 또 살게 해줄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