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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여행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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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Sep 04. 2017

아무것도 하지 않는 혼자 제주 여행

2. 바다를 마주하고 이야기를 삼키고 내뱉다

이상하게도 여행 중에는 아침잠이 없어진다. 여행을 하면서 매번 만나게 되는 미스터리 한 상황 중 하나다. 출근해야 할 때는 그렇게 아침이 힘들더니. 꼭 이럴 때는 눈이 저절로 잘도 떠지더라. 


게스트 하우스 사장님이 맛있게 만들어준 아침을 든든하게 먹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도 한참을 미적거렸다. 때로는 새하얀 때로는 새파란 구름과 경계 없는 풀과 나무들,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그림 같은 세상이, 빼곡한 건물들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를 그 자리에 계속 머물게 했는지도 모른다. 


약간 늦은 오전, 드디어 길을 나섰다. 

뚜벅이에게 다양한 선택지란 없다, 일단 걸었다. 마침 숙소 근처에 있는 올레길을 따라 해안가로 걸었다. 난 사실 바다에 나름 익숙한 편이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고, 친가 집이 남해라서 바다를 보는 일이 명절 행사보다 자주 있었다. 


/제주 바다는 독특한 생김새가 있다. 평대리. 


그런데도 제주 바다는 무언가 다르게 느껴졌다. 바다의 생김새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내뿜는 에너지가 다르다고 할까. 한참을 그냥 바라보고 있었던 거 같다. 바다의 움직임을, 출렁이는 파도를 보면서 바다가 춤을 추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씩 변화하는 파도 소리가 정제되지 않은 어떤 노래의 리듬 같았다. 그리고 그건 바다가 말을 하는 방식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다음 날, 어쩌다가 뜻하지 않게 밤바다를 보러 가게 되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위험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지만 신나게 나갈 준비를 하는 사람들과 함께 섞여서 어느샌가 움직이고 있었다. 


검은 바다가 보였다. 보이는 건지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모를 정도이긴 했지만 소리는 확실히 들렸다. 파도 소리가 유난히 더. 


언제나 늘 바다는 이렇게 하고 있는 걸까? 누군가가 듣는지 마는지, 그런 거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소리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그 순간, 이상하게도 혼자서 이야기를 삼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듣는 이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말을 하는 것과 듣는 이가 없어서 말을 삼켜야 하는 것. 듣는 이가 있지만 말을 삼켜야 하는 것. 나는 요 며칠 혼자 돌아다니면서 많은 말들을 혼자 삼키고 있었다. 내뱉으려면 혼잣말이라도 할 수는 있었지만 그냥 다물고 있었다. 그건 어쩌면, 듣는 이가 있어도 말을 내뱉지 못했던 나 자신의 최근 생활의 연속 선상에서의 행동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부터인가 말을 내뱉는 것보다 삼키는 일이 많아졌다. 입 안에 맴도는 말들을 혼자 조용히, 삼키는 소리조차도 들킬까 봐 조용히 조용히 삼켰다. 그건 타의일 때도 자의일 때도 있었다. 타의로 말을 삼켜야 했을 때는 솔직히 화도 많이 났다. 하지만 그건 헤쳐나갈 방법을 찾곤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일 때도 있었지만. 


문제는 자의일 때다. 내가 결정한 거면서도 삼킨 말들이 나도 모르게 툭 툭 나올 뻔할 때도 있었고 삼킨 말들의 무게에 눌려 지칠 때도 있었다. 삼킨 말들이 너무 많아서 뒤엉키거나 길을 잃어서 혼란에 빠질 때도 있었다. 


그런 내 앞에 있는 지금 이 바다가 난 좀 부러워졌다.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밤에도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는 그 바다가 부러웠다. 어떤 소리(이야기)인지가 중요한 건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시원하게 들릴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애처롭게 들릴 수도 있고 듣는 사람에 따라 각자 다른 이야기를 생각하게 되는 그런 소리를 내는 게부러워졌다. 


나도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될까? 


평생 그런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맥주 캔을 손에 들고 바다와 마주하고 있으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자. 거창한 무언가를 하거나 무리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내가 원하는 말들을 내뱉어 보자고. 그리고 삼키는 말들을 차근차근 소화시켜 보자고. 솔직히 어떤 방법이 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또 잘못된 말을 내뱉고, 정작 해야 하는 말을 삼키고선 나를 상처 주거나 남을 상처 줄지 모른다. 그때마다 하늘색이 투영된 푸른 바다와 밤을 삼킨 검은 바다와 그 소리를 생각하며 나와 마주 볼 거다. 바다 앞에서 서서, 내 안의 이야기에 더 가까이 귀 기울이기로 다짐했던 걸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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