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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n Jan 27. 2017

브로드웨이에서 만난 페미니즘(2)

#4 여성의 연대를 노래하는 [더 컬러 퍼플]

<위키드>로 만족을 하고 난 후, 하나만 보긴 아쉬우니까 하나 정도는 더 봐야지 라고 생각하고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뮤지컬과 페미니즘 관련 기사나 몇 가지 글들이 검색되긴 했는데 내가 원했던 건 지금 상영하고 있는 뮤지컬이나 연극이었으니까, 브로드웨이 닷컴(Broadway.com)이나 타임아웃(Timeout) 등도 검색하면서 범위를 좁혀나갔다. 


일단 하나 발견한 건 <웨이트리스>(Waitress)라는 작품이었다. 2015년에 프리미어 공연을 한 후, 2016년부터 브로드웨이에서 상영 중인 이 작품은 동일명의 영화가 원작으로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제나가 웨이트리스로 일하면서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여자 동료들과 함께 우정을 쌓고 서로 응원하며 힘을 얻게 되어 ‘파이 만들기 콘테스트’에 나가는 꿈을 키우는 이야기라고 한다. 마침 캐스트에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주인공은 아니지만 주인공의 웨이트리스 친구라는 중요한 역할을 맡았길래 옳다구나 하고 예매하려고 했는데, 홈페이지에서 정보를 더 찾아보니 지금은 캐스트가 변경되어 그 배우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길래 일단 후보에만 올려두었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을 선택하지는 않았지만, 리뷰 등을 보니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여성이 자신의 꿈을 찾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 나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 안에서 여성들 간의 우정을 보여준다는 점, 그리고 연출진들이 여성(프로듀서, 감독, 음악, 극본, 주인공)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성의 목소리를 전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작품이다. 그러나 제나가 폭력가정에서 탈출하고자 마음을 결정하는 도화선이 되는 것이 결국 출산(모성애)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 제나에게 또 다른 남성이 나타나는 점 등은 그동안의 진부한 클리셰에서 벗어나지 못해 아쉽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래도 전반적인 평가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의 모습을 부각해서 어두웠던 영화에 비해 뮤지컬은 그 과정을 이겨내는 것에 집중하고 있어서 밝고 동기부여가 되는 분위기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에 점수를 주고 있다. 그리고 <웨이트리스>의 음악을, <러브 송>(Love song) 등으로 유명한 팝 가수인 사라 바렐리스(Sara Bareilles)가 담당한 탓에, 사라의 감성이 들어가 있는 부드럽고 아름다운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고 하니 꽤 매력적일 것 같다.


내가 발견한 또 다른 작품은 <뷰티풀: 캐롤 킹 뮤지컬>(Beautiful: The Carole King Musical). 미국 팝계의 대모라 불리는 캐롤 킹의 실제 이야기를 담은 뮤지컬이다. 여성 팝 가수가 거의 없다시피 하던 1960-1970년대 큰 인기를 얻으며, 이후 다양하고 더 많은 여성 가수들이 노래를 만들 수 있도록 선구자 역할을 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게다가 캐롤 킹의 명곡들이 나오는 탓에 여성 팬들(특히 베이비부머 세대 여성들과 197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호응이 굉장히 높다고 한다. 캐롤 킹의 노래를 들어보지 못한 건 아니지만, 내가 그 세대는 아니었던 탓에 그녀의 노래를 많이 알지도 못하고 해서 결국 후보에만 머무르게 되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보고 싶은 뮤지컬 중 하나다.


더 컬러 퍼플의 토니어워드 수상 소식을 자랑하는 포스터
배우들의 퇴근길을 기다리다가 만난 대니얼 브룩스

결국, 고민 끝에 선택한 뮤지컬은 <더 컬러 퍼플>(The color purple)인데 이 작품은 1982년 출간되어 퓰리쳐상을 수상한 앨리스 워커의 소설이 원작이다. 이 작품은 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하고 우피 골드버그와 오프라 윈프리가 출연한 영화로도 유명한데,  여성인권, 특히 흑인 여성의 권리가 아예 없다시피 하던 그 시절에 한 여성이 성적 학대를 받던 어린 시절을 지나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과의 삶 속에서 다른 여성들의 조력을 얻어 자신의 꿈을 찾아가는 내용은 지금의 한국 여성들이 봐도 공감될 부분이 많다. 불행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중간중간 지금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은 부분들도 보인다.


뮤지컬은 2005년 시작되었으며, 2006년 뮤지컬계의 아카데미 어워즈인 토니 어워즈에서 베스트 뮤지컬 부문을 비롯해 7개 부문 후보로 오르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이후 미국 투어 등의 공연이 이어지다가 2015년 리바이벌 공연이 다시 시작되었다.(이 리바이벌 공연은 2017년 1월 8일에 끝났다.)

그리고 2016년 토니 어워즈에서는 베스트 리바이벌 뮤지컬 상과 베스트 여배우 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그 명성을 뽐냈다. 토니 어워즈에서 베스트 여배우 상을 수상한 신시아 에리보(Cynthia Erivo)의 연기와 노래를 듣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고, 이야기도 흥미로울 것 같아 선택하긴 했는데 뮤지컬이 시작하고 나서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다. 미국 남부 흑인의 억양이 들어간 영어는 너무 알아듣기 힘들었던 것.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초반에 단체로 나오는 장면들이 지나가고 나서 주인공인 씰리의 이야기에 집중이 되면서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는 원작 소설을 읽지도 않았고 영화를 보지도 않았고 세부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고 뮤지컬을 관람했는데, 기본 줄거리에서 느껴졌던 무거움보다는 코믹한 요소들이 많아 정말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특히 씰리가 원치 않은 결혼을 한 후에 만나게 된 친구인 소피아 역의 다니얼 브룩스(Danielle Brooks. 넷플릭스 대표작 중 하나인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Orange is the new black)에서 테이스티 역으로 출연)가 당돌하고 자기주장이 뚜렷하며 남자에게 기죽지 않는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감초 같은 연기를 하는 것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놀라웠던 점은 스토리 안에 여성의 바이섹슈얼리티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었다. 또 그 시대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씰리가 남편의 옛 애인인 슉과 사랑에 빠지는 것에 대해 극 중의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점도 놀라웠다. 오히려 나중에 슉에 대해, 씰리와 남편은 ‘우리가 공통으로 사랑한 사람,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는 말도 한다.


앞에서 <위키드>에서 즐길 수 있는 관람 포인트를 몇 가지 이야기했는데, 개인적 감상으로는 <더 컬러 퍼플>이 조금 더 좋았던 것 같다. <위키드>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가 더 강인했고, 씰리와 네티, 씰리와 슉, 씰리와 소피아의 관계에서 표현되는 여성들의 우정(사랑)과 연대는 더 깊었다. 대표곡인 “아이 엠 히어”(I’m here)는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고, 화려한 연출은 없었지만 내 감정을 그 무엇보다 풍부하게 해주는 꽉 찬 스토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건 약간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데, 마지막 즈음에 가정폭력을 가했던 남편이 자신의 과오를 깨우치고 돌아와 용서를 빌고 ‘사실 나 정말 너를 사랑하는 것 같아, 다시 결혼해 주지 않을래?’라고 했을 때 그걸 받아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는데… 씰리가 ‘아냐, 우리 그냥 친구로 지내자’라고 거절하는 장면에서 쾌감을 느꼈다.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


나는 이 뮤지컬들을 보고 나서, 여성이 주체가 되는 이야기 속에 빠지지 않는 ‘여성의 연대’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흔히 남성들의 우정, 요즘 말하는 브로맨스 대해서 사람들이 집중하고 남성들의 의리가 대단히 가치 있고 깊은 무언가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듣고 보는 대중문화가 그들의 이야기를 대변하는데(그와 상반되게 여성들의 이야기는 ‘질투’에 집중한다), 더 깊은 감정 교류와 서로에 대한 지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여성들의 우정(사랑)과 연대에 대한 이야기에는 왜 흥미를 가지지 않는지 의아할 뿐이다.


그리고 여성들에게 이 ‘연대’라고 하는 특별한 고리는 단순히 ‘우리가 남이가’라며 어깨를 툭 치는 그런 말로 치부될 수 없는 감정과 상황의 공유(나도 그거 뭔지 알아… 내가 너와 함께 해줄게)가 깔려있고, 브로맨스와는 다른 결이 있다.


최근에 ‘우리는 서로의 용기당’에서 이야기하는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여성들의 연대를 표현하는 가장 정확하면서도 아름다운 말이라고 무릎을 탁 쳤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들은 남성들의 이야기에 비해 부족하거나 모자라지 않다. 여성들이 서로의 용기가 되어주는 뮤지컬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더욱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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