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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04. 2017

걸어도 걸어도

동상이몽, 그 닿지 않는 마음의 거리

어떤 관계는 크게 싸우고나서 확 깨어지기도 하지만 또 어떤 관계는 그런 특별한 이유가 없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다 영영 닿을 수 없게 되기도 한다.

이 세상에 100% 완벽한 인간관계란 게 존재할 수 있을까? 특히 가족이기에 더 상처 주고 상처받는 관계의 틈새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균열을 넘어 영영 건널 수 없는 위험한 크레바스가 되기도 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걸어도 걸어도>는 아무리 걸어도 서로에게 닿을 수 없는 가족 간의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거리를 눈에 보이는 그 무엇으로 시각화시킨다. 그 현장은 마치 이 세상의 여느 가정에서나 볼 법한 풍경 한 조각처럼 친숙하고 익숙하며 영화라는 예술을 구현하기 위해 드라마틱한 방식으로 과장하거나 어떤 목적을 위해 전시 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 포장되지 않은 가족이란 이름의 우리들의 민낯이 그대로 들어앉아 있다.

우리의 일상은 늘 무너지지 않으려 버티는 혹은 무너졌다가도 다시 무너지지 않았던 그때로 되돌아가려는 각자만의 생의 관성들에 의해 영위된다.



사건, 어긋남, 동상이몽

걸어도 걸어도 속 료타(영화의 주요 화자)의 가족들 간의 균열과 점증적 틈새는 어떤 사건을 계기로 심화된 듯 하다. 물론 그 어떤 사건 이전에도 여느 가정들처럼 사소하게 투닥거리는 정도의 다툼들이야 있었겠지만 료타 가족의 분열은 적어도 특정 사건을 계기로 봉합이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으리라 짐작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가족의 장남 준페이의 죽음(익사사고)이다. 그것도 타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대신 지불된 준페이의 죽음은 료타 부모님으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흔을 남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자식이 잘못되는 댓가로 평생을 스스로의 감옥 안에 투옥되는 행위나 진배 없다.

이미 10년이나 흘러간 과거의 일이지만 아들 특히 집안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장남의 죽음은 이 가족의 첫 번째 관계의 균열을 만든다.


두 번째는 차남 료타의 가출과 결혼 문제이다. 의사였던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은 잘난 장남의 그늘에 가려져 늘 평가절하 되었던 료타의 가출은 안그래도 못마땅해하는 아버지의 심기를 더욱 건드리는 단초를 제공 한다. 게다 띄엄띄엄 한 번씩 집에 들리느라 집도 제대로 찾지 못하는 료타가 결혼을 하겠다며 데려온 당사자는 (료타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고르다 고른 게 하필 애 딸린 중고이다.

총각인 아들의 배우자감으로 애 딸린 중고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문화는 우리나라나 바다 건너 일본이나 어렵긴 매한가지이다.


게다 실질적으로 료타는 현재 임시 실업 상태이다. 임시라고는 하지만 언제 일을 재개할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 료타의 직업이 미술품 복원사라는 것은 아버지의 기대치에서 벗어난 인물이 그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밑천 삼아 그나마 그렇게라도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했던 몸부림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사람을 살리는 의술을 베풀 수는 없지만 죽어가는 미술품을 살려내는 일을 한다는 점이 단순한 설정은 아니었으리라 짐작 된다.

그들은 가족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아니 가족이기에 서로 다른 꿈을 꾼다. 아들은 늘상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불편하고 아버지는  장남도 떠난 마당에 여전히 빌빌거리는 둘 째 아들이 성에 차지 않는다.


영화의 오프닝은 주방에서 분주하게 요리를 준비하는 엄마와 딸의 대화와 함께 료타가 배우자 유카리와 그녀의 아들 아츠시와 함께 형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가족을 방문하는 장면으로부터 시작 된다.

료타가 오랜만에 가족을 방문하는 시점인 당일 점심 즈음부터 그 다음날 아침 식사 후 다시 도쿄로 떠나는 료타 가족의 모습까지를 담아내는 걸어도 걸어도의 시간적 서사는 이처럼 지극히 짧다. 불과 24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적 서사를 꼼꼼히 메우고 있는 플롯의 힘은 그 어떤 작위성도 동반하지 않은 채 물 흘러가듯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정말 저런 가족이 이 지구상 어디쯤에 살아가고 있을 것 같은 풍경 한 조각.

그래서 낯설지 않다. 굳이 영화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서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벌어질만한 상황이고 충분히 납득가능한 대사들로 채워져 있다.

무기는 들지 않았지만 가끔씩 툭툭 던지는 말 한 마디에 뼈가 있고 심각한 갈등은 없어보임에도 여전히 친밀하지만은 않은 이들 가족의 모습은 영화라는 프레임을 해체시키고 일반적이고 흔한 가족 풍경의 일환으로 대체시킨다.


인사만 받는 둥 마는 둥 다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버리는 아버지의 모습을 의도적으로 로우 포커스로 잡아 아래에 앉아있는 다른 가족의 머리 아래를 날려서 보여주는 장면은 '준치는 썩어도 준치'라 그 어떤 상황에서도 가족들의 왕으로 군림하고 싶은 우리들 아버지의 모습과 어딘지 닮아있으며 장남 준페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들 부모의 애처롭고도 날 선 모습은 세월호 유가족과 그대로 겹쳐보일 정도이다.

특히 중고라는 도발적이고도 신선한 표현으로 자신의 아들이 데려온 배우자감에 대한 불편한 심경을 여실히 드러내 보이는 료타의 엄마의 모습은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를 완성해낸다.

코믹한 모습 속에 날을 세운 채 한 번씩 그녀가 툭툭 내뱉는 대사는 그저 무심히 흘려넘길 수 없는 무거움과 날카로움을 동반한다.


내년에도 와서 얼굴 보여줘야지. 반드시 와야 돼."


준페이가 살린 요시오라는 청년이 매년 준페이의 기일에 맞춰 이들 가족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요시오를 향해 내년에도 꼭 다시 와야 한다고 반드시를 힘주어 말하는 엄마의 모습에서는 다분히 그 의도가 읽히는 섬뜩한 장면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것은 폭력은 아니되 요시오를 향해 행사되는 분노란 이름의 속성을 본다. 아들의 생명과 맞바꾼 요시오의 존재가 하필이면 우스꽝스런 스모 선수를 닮았다는 데서 엄마의 분노는 더 치명적이다. 뚱뚱한 몸에 25살에 아르바이트로 생활한다는 요시오의 보잘 것 없는 현실 또한 이런 료타 부모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언짢은 일이다.


"저런 하찮은 놈 땜에 하필 우리 애가?"



요시오가 떠난 자리에서 아버지가 그를 향해 내뱉는 독설은 이들의 불편하고 언짢은 심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적어도 아들 준페이와 맞교환된 그 가치가 누가 보아도 좀 탐낼만한 그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세상의 중심이 자신의 자식들인 부모란 이름의 숙명을 지닌 자들에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유사한 분노와 그 분노의 크기를 더 키우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그만 요시오를 안불러도 되지 않겠다는 료타의 말에,


그래서 부르는거야. 겨우 10년 정도로 잊으면 곤란해. 그 아이 때문에 준페이가 죽었으니까.

증오할 대상이 없는 것만큼 괴로움이 더한거야. 그러니 1년에 한 번 정도 그애에게 고통을 준다고 벌 받지는 않을거야. 그러니까 내년, 내후년에도 오게 만들거야.


라는 엄마의 말은 세상 그 어떤 존재나 가치도 자신의 자식과는 대체될 수 없는 무거움이란 걸 짐작하게 한다. 누구에겐 10년이나가 되는 상황이 어떤 이에겐 10년 정도로 인식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 모습이 겹쳐보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요시오는 바로 이런 대체불가한 준페이와 교환된 가치인데 그 가치가 그들의 눈에 고작 이 정도의 인물임을 확인받는 고통은 받아들이기 힘든 일일 것이다.


영화 걸어도 걸어도의 이미지는 준페이의 죽음과 료타와 아버지 간의 심리적 거리로 압축되지만 실상 그 안에는 모든 가족 구성원들의 심리적 거리감이 차례대로 포착 된다.

늘상 필요할 때면 바쁘다는 핑계로 자리에 존재하지 않았던 남편의 빈자리, 심지어 남편이 다른 여자와 함께 하는 외도의 현장에 어린 료타를 업고 출동해야 했던 엄마의 상처가 한 곡의 노래로 승화되는 지점, 집 나간 둘 째 아들이 언젠가 들어와야할 자리에 먼저 들어앉겠다고 하는 딸과 사위 부부에 대한 불편함, 애가 생기면 영영 헤어지는 길도 딱 막히게 될 료타와 유카리 사이의 임신 문제를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까지.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폭력은 없지만 그 이상의 불편함들이 내재하는 이 영화 속 가족의 상황은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불편한 시선들로 가득차 있다.

그나마 이런 불편함들 사이에서 가장 중도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딸도 선뜻 집으로 들어와 살라고 허락하지 않는 엄마를 향해,


팔자 좋지 뭐. 우린 살아있는 사람 돌보기도 벅찬데...


라는 말로 살아있는 자식 돌보기도 벅찬 세상에 죽은 오빠에 매여 사는 엄마에 대한 불편한 기색을 여지없이 피력한다. 그것은 곧 죽은 오빠가 아니라 살아있는 딸 가족을 챙기라는 말의 에두른 표현일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맛깔나고 실감나는 대사들 덕에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리게 되는 이 묘한 상황은 억지스럽지 않아 더 공감이 되고 설득력을 획득 한다. 우리는 다 자신의 입장이 먼저인 사람들이고 그런 자신의 뷰파인더로 상대를 바라보는, 가족이라 해도 그렇게 조금은 가까운 타인들일 뿐이다.


영화의 엔딩은 이런 가족이란 이름의 구성원들의 동상이몽을 단적으로 프레이밍 한다.

료타와 아츠시, 그리고 료타의 아버지 세 사람이 바닷가 산책을 나선 장면에서 이들 부자 사이는 얼핏 화해모드로 들어선 듯 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이라고 해서 이 관계의 틈새를 억지로 그리고 섣불리 봉합시켜려 노력하지 않는다. 아츠시에게 료타의 존재가 아빠도 새아빠도 아닌, 그냥 료짱인 것처럼.

관계에 미숙한 인간이란 동물은 늘 그렇게 상대보다 조금씩 빠르거나 조금씩 늦다.


아버지가 축구를 봐요? (료타)

기회 되면 같이 갈까? 저 녀석 데리고?(아버지)

그러죠 기회 봐서요.(료타)



'다음에' 혹은 '기회가 생기면'이란 말은 결국 만날 의사가 크게 없다는 말과 다름 아니다. '기회를 봐서'란 말은 기회가 없다는 말의 다른 이름이다.


아 생각 났다. 그 스모 선수 말야. 쿠로히메야마. 늘 이렇다니까. 꼭 한 발씩 늦어.(료타가 유카리에게)


"다음은 설에야 보겠군."(아버지)

"설엔 안와도 되겠어. 1년에 한 번 보면 됐지."(료타가 유카리에게)


(계단을 걸어올라가며)아 생각났다.스모 선수 이름요.(엄마가 아버지에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냉철한 통찰력 안에 녹아있는 이런 관계의 어긋남과 동상이몽은 이어지는 료타의 내레이션과 함께 가슴 저미는 여운을 남긴다. (그 여운과 아픔은 직접 영화에서 확인해보시길)


늘 사회에서 소외된 아이들의 이야기 혹은 가족문제를 화두로 풀어내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은 역시 다 보고나면 늘 옳다라는 확신을 안겨주기에 부족함도 넘침도 없다.

딱 그만큼의 진실에 다가서는 그의 시선과 대사들은 영화라는 낯선 풍경 속에서 낯설지 않은 우리들의 모습 한 조각을 소환시킨다.

강요하고 설득시키려 하지 않음에도 가슴을 쿵 하고 때리는 무언가를 남기는 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들엔 그런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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