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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bia Feb 10. 2017

녹터널 애니멀스(Nocturnal Animals)

부조리한 세상을 버티는 힘


프랑스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카뮈의 사상에 따르면 인간이 사는 세상은 불합리와 불가해, 모순으로 이끄는 부조리한 세계라 규정하고 있다. 질투와 야심, 방종을 만드는 세상에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항하는 반항적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이해불가하고 일정 부분 불합리하고 모순 덩어리인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떤 액션을 취하며 살아가야 할까? 

카뮈의 말처럼 반항하며 염세주의적 행동을 취하며 살아갈 것인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둘러싼 이 부조리한 세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버텨내며 살아가야할 것인지에 대한 숙제가 남는다. 


영화 녹터널 애니멀스는 스릴러라는 외피를 입고 있지만,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부조리함과 모순 투성이인지를 직접화법이 아닌 간접화법으로 풀어낸다. 

영화 시작과 함께 등장하는 수잔(에이미 아담스)의 전시회 오프닝 무대는 기존의 아카데믹한 예술에 저항하며 새로운 경향의 예술장르로서 예술가 개인의 개성이 독특하게 표현된 일종의 전위 예술을 보는 듯 하다. 

거대한 유방과 축 늘어진 뱃살, 허리둘레를 측정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거구의 여성들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올 나체의 형태를 예술로 활용한 이 기이한 퍼포먼스는 마치 수잔의 내외면 세계의 충돌을 상징적으로 담아낸 장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회 오프닝 무대는 환상적이었으며 당신은 굉장히 성공한 사람'이라 치켜세우는 동료를 향해, 그것은 정크(Junk:쓰레기)라 말하는 수잔의 모습을 통해 다분히 현실과 그녀가 바라는 세계 사이의 단절과 괴리를 담아낸 장면으로서 추론해봄직하다. 

그녀는 얼핏 성공한 커리어 우먼처럼 보이지만, 재혼한 남편은 꼭 성공해야만할 새로운 계약을 핑계로 다른 여자와 밀회를 즐기는 중이고 그녀는 늘 불면에 시달리며 약을 복용해야만 버텨지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새로운 행복과 새로운 사랑을 향해 기존의 사람과 사랑을 버리고 뛰어든 세계 안에서 그녀는 또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여전히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인가. 


이런 그녀에게 어느날 19년 전 헤어진(그녀가 일방적으로 버린) 전남편 에드워드(제이크 질렌할)로부터 녹터널 애니멀스란 한 편의 소설의 감수본이 도착한다. 

'For Susan'이란 에드워드의 메모는 사실 관객입장에서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의도가 명백히 'For Revenge'의 의미임을 알기에 어쩐지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영화 안에, 에드워드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 속 이야기가 진행되는 액자식 구성


이 영화는 전형적인 액자식 구성에 충실한 작품이다. <녹터널 애니멀스>라는 전체 영화 안에 에드워드의 소설 '녹터널 애니멀스'가 이중교배되어 있다. 그래서 수잔이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건넨 소설의 감수본을 읽어내려갈 때마다 소설 속 인물이 영화 안에서 자동 재생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제이크 질렌할은 현실 세계의 에드워드와 그 자신이 쓴 소설 속 토니라는 1인 2역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토니 = 에드워드'임을 인식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폭력적이면서도 빠져드는 소설이라던 수잔의 대사는 그 자신과 에드워드의 모습을 에드워드가 쓴 소설 속 토니 가족에게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통해 인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수잔이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 과거 자신과 에드워드 사이에 있었던 일련의 기억의 조각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이유도 그 때문으로 보인다. 


(에드워드가 쓴)'녹터널 애니멀스'의 소설 속 토니 가족은 텍사스 서부로 여행을 떠나는 중이다. 텍사스는 과거 에드워드의 고향이자 에드워드와 수잔이 결혼 생활을 영위했던 곳이기도 하다. 

토니 가족이 이 텍사스로 향해가는 도중, 고속도로에서 레이 일행들과 시비가 붙는다. 

한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낯선 세 명의 남성들에 의해 파괴되어가는 그 현장 속에는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토니의 아내와 딸 인디아가 동참하고 있다.

(현실에서 에드워드는 수잔과의 이별 후 19년 동안 재혼을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의 소설에 의해 소설 속 세계에 존재하게 된 그의 아내와 딸은 이 영화에서 에드워드에 의해 심어진 중요한 메타포이다. 

그 메타포는 고속도로에서 우연히 얽힌 세 명의 낯선 이들에 의해 처참히 파괴된다. 그런데 파괴의 이유는 그들이 한 날 한 시각에 그 고속도로를 우연히 함께 지나갔다는 그 사실 뿐이다.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그 낯선 남성들에 의해 아내와 딸을 잃게 되는 토니의 상황은 부조리 이상의 말로 그 세계를 설명하기 힘들다. 부조리하고 이해불가한 세계 안에 던져진 토니의 상황은 그대로 소설 밖 세계에 존재하는 수잔의 심리를 뒤흔든다. 


로라와 인디아가 성폭행을 당한 후 살해되는 장면을 읽다가 수잔이 자신도 모르게 딸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확인하는 이유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서 바로 자신의 모습과 과거 에드워드에게 자신이 저지른 일(그것이 무엇인지는 영화 후반에 밝혀진다)의 조각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 에드워드와 수잔이 결혼을 결심했을 때 수잔의 엄마는 사귀는 것도 좋고 함께 사는 것도 좋으니 결혼만은 하지 말라고 수잔에게  신신당부 한다. 지금의 좋은 점이 세월이 흐르면 그 점 때문에 싫어질 거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는 엄마에게 수잔은 그녀가 속물적이며, 눈 앞의 계산에 밝고, 자신은 절대 엄마 같지 않다며 강조한다. 그리고 에드워드의 장점은 바로 자신과 수잔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며 나약한 것이 아니라 센서티브한 사람이라 항변한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늘 수잔이 엄마와 닮았으며 수잔의 어머니의 눈빛이 늘 슬퍼보인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하지만 내가 싫어하고 절대로 나는 그/그녀와 같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상대의 그런 부분들을 그대로 닮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인지하기까지 실상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것 역시 우리 인생의 함정이다. 


이 세계는 늘 행복이라 생각했던 것들에서 불행이 싹 트고, 장점이라 생각했던 것들에서 상대의 단점과 지리멸렬함을 확인받는 부조리한 세상이다. 

이런 세계에서 수잔의 행복은 에드워드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오래가지 않는다. 도망치지 말고 노력해보라는 에드워드의 애원에 자신은 그럴 수 없다며 딱 잘라 말한다. 


녹터널 애니멀스는 과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좀 써보라는 수잔의 말에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이야기를 쓸 수 없다는 에드워드의 말이 단적으로 녹아있다. 

이 영화의 엔딩이 유난히 쓸쓸함과 먹먹함이 남는 이유는 자신이 박차고 나온 그 세계가 얼마나 안온하고 행복한 일상이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수잔의 후회와 뒤늦은 기다림이 너무도 애처로워 보이는 까닭이다. 

째깍째깍 속절없이 흐르는 기다림의 시간과 그녀가 안타깝게 들이키는 물 잔, 주변 테이블들의 손님들이 하나 둘 다 떠나가는 시간에 홀로 남겨진 그녀의 모습에서, 그 눈빛에서 우리가 생각했던 부조리한 세계의 그 일면식을 똑똑히 마주하게 된다.

결국 이 세상은 완벽히 행복하거나 완벽히 좋은 것들로만, 이해가능하고 수용가능한 것들로만 채워지지 않은 부조리하고 이해불가한 세계임을 인지하고 그것을 버텨나가는 힘에 의해 영위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인지하기까지 인간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또 거듭해야만 한다.


상대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복수는 그 어떤 물리적이고도 위압적인 폭력이나 폭언이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자신이 행한 말들과 행동들을 스스로 인지하게 하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일면 에드워드의 수잔을 향한 복수는 완벽해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 속 토니는 이미 살아있지 않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나?

상대에 의해 이미 죽임을 당한 거나 마찬가지인 인물이란 뜻일 것이다. 그러니 엄밀한 의미에서 그 복수를 행사할 실존이 제거된 무력한 상황인 것이다. 


톰 포드 감독에 의해 뉴욕과 텍사스라는 이질적인 두 세계가 현실과 소설이라는 세계의 벽을 뚫고 이 두 부조리한 세계를 비튼다. 다만 그 칼끝이 완전히 날카롭지 못하고 두루뭉술한 게 이 영화의 흠이라면 흠이다. 결국 우리들의 이상과 현실은 늘 이렇듯 어긋나거나 부조리하거나 서로 만날 수 없다. 이 영화의 마지막 엔딩의 상징처럼.

그렇다면 이런 현실과 이상의 괴리 앞에서 우리는 어떤 현명한 선택을 하며 살아가야할까? 현실은 늘 정크이며 이상은 닿을 수 없는 소설 속 세계일까? 


이 영화가 단순히 스릴러 영화로 보이는가? 


톰 포드 감독에 의해 영화 속 소설 야기라는 미학적 세계  위에서 인간 세계의 부조리함과 그 부조리한 세계 안에서 흔들리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인물의 내면을 감각적이고도 상징적으로 담아낸다. 

테이크 쉘터의 마이클 셰넌과 레이 역의 애런 존슨 등 조연들의 연기가 에이미 아담스, 제이크 질렌할만큼 인상적이다. 

그리고 에이미 아담스는 이제 명실상부 할리우드의 연기파 주연으로 확실히 굳히기에 들어간 모양이다. 제이크 질렌할은 데몰리션에서 보여준 상실에 처한 인물의 내면을 더 파괴적이고도 한 편으론 유약하게 토니란 인물을 통해 절절히 표현해낸다. 

마지막 장면의 여운이 꽤나 오래갈 듯 한 영화...

수잔 역의 에이미 아담스의 흔들리는 눈 속에 어린 슬픔에 한동안 가슴먹먹함이 떠나질 않는다. 






이 영화에 대해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영화 속에 잠깐 수잔의 친구 부부가 등장 한다. 그런데 이 부부의 면면이나 그들이 수잔에게 하는 말은 실상 이 영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의미있게 소비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이유인즉슨, 이 수잔의 친구 남편은 게이이다. 그럼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비결에 대해 수잔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나는 저 사람 인생에서 유일한 여자야. 적어도 이런 쪽의 문제로 우리가 헤어질 없은 없다는 거."


어쩌면 우리 인생이란 이런 부조리와 모순 가득한 세상에서 스스로 긍정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버텨가는 힘, 그것에 의해 영위되는 것이 아닐까?

얼핏 이 영화가 단순한 스릴러 영화쯤으로 비춰질 수도 있겠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좀 더 심오한 주제의식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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