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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롤 Oct 14. 2023

나는 부끄러움을 쓰기로 했다.

2023년, 나는 금세 공백기 2년을 맞이했다. '지속가능한 공백기'를 위해 이사 온 원룸도 이젠 정말 내 집처럼 느껴졌고, 전철을 타고 지나치기만 했었던 낯선 동네는 어느덧 우리 동네가 되었다. 여전히 계속 지원서를 썼고 간간히 면접을 봤고 어김없이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점차 바닥을 드러내는 통장잔고를 보며 할 수 있는 단기 알바를 하며 밑 빠진 독에 조금씩이라도 물을 붓기 시작했다.


역시 시간이 약이라 하던가. 난 이미 '허용된 공백기'인 1년을 훌쩍 넘어 2년을 기록했고, 나이는 한 살 더 먹어 취업의 가능성은 매 순간 한없이 낮아져 갔지만 이젠 스스로를 '취준생'도 아닌 '백수'라 부르며, 나 자신의 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의 이런 현실이 싫었지만, 내가 싫든 좋든 30대 백수로서의 이 삶을, 이 상황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일명 '죽음의 5단계'라 불리는 그 '부정, 분노, 협상, 우울, 수용'의 과정에서 공백 2년을 채우고 나서야 드디어 마지막 단계인 '수용'에 이르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내 굽은 어깨엔 가차 없이 흐르는 시간과 비어 가는 통장 잔고가 주는 압박감이 바위처럼 얹혀있었지만, 공백 2년에 들어서며 그런 나를 그냥 그대로 보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상황을 부정하지도, 연민하지도 않으며, 그냥 나를 그렇게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째 '백수'인 나의 모습에 스스로 화가 나거나 스스로를 불쌍하게 보지도 않고, 수치심이나 자괴감 같은 감정도 흘려 보내며, 지금의 '나'를 그냥 '그렇구나' 하고 살짝 한 발짝 떨어져 볼 수 있게 되자, 나는 내 지난 2년을 기록할 용기가 생겼다.




내겐 새긴 지 몇 년이 지난 타투가 있다.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도 생각하고, 나 스스로 먼 미래에 나 자신을 보았을 때 후회 하지 않을 타투를 새기고 싶어 고심의 고심을 한 끝에 꽤 오래전 첫 타투를 새겼었다. 레터링 타투였다. 오른쪽 어깨 위에, 민소매를 입어도 충분히 가릴 수 있는 위치에 새겼다.


'vulnerability(연약함, 취약함)'


나는 첫 타투로 어깨 위에 이 단어를 새겼다. 'The power of vulnerability (연약함의 힘)'*이라는 TED 강연으로 유명한 브레네 브라운 교수의 강연에서 영감을 받은 말이었다. vulnerability(연약함)와 weakness(나약함)의 차이를 분명히 하며, 자신의 연약함(또는 취약함, 결함)을 충분히 받아들이고 이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진 힘, 그런 사람만이 가진 '스스로를 믿는 힘'에 대해 연구해 온 그녀의 강연은 정말 강렬했다. '긍정의 힘' 같이 자기계발서의 단골소재 같은 말들은 일단 거리를 두고 한껏 경계하며 보는 나였지만, 그녀가 말하는 '연약함'을 포용할 수 있을 때 발휘 될 수 있는 자신을 믿는 힘, 그리고 그 힘이 가진 단단함은 새로운 충격이었다. 대학 입학 후 때늦은 사춘기를 겪으며 스스로를 부정하며 스스로에게 끝없이 물음표를 던지던 때에 보게 된 강연이라, 그 충격이 유독 더 크게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스스로 오래 꿈꿔왔던 꿈을 버리고 방황하던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었다.


'대체 왜?'


좋아하는 것을 찾아 해외를 유랑하면서도 좀처럼 잡힐 것처럼 잡히지 않는 '좋아하는 것'에 집착하는 날 보며 나는 또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체 넌 왜 그 모양이냐?'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고 또 방황을 시작하며 스스로 무모하게 공백의 2년을 만든 나에게도, 나는 늘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늘 같은 질문이었다. 답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스스로에게 물음표를 던지는 일을 멈추지 못했다. 내 삶은 늘 물음표로 가득했다.


'대체 난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여전히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모른다. 대체 내가 왜 '좋아하는 것'을 알지도 못하면서 좇으려 하는지, 왜 그렇게 거기서 삶의 이유를 찾으려 집착하는지, 매일의 작은 행복을 찾지 못하고, 그 가치를 알지도 못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보통의 사람에 불과하면서 내 삶이 특별한 것마냥 그렇게 자꾸만 많은 사람들이 걷는 고속도로를 놔두고 자꾸 옆 길로 새어버리고 마는지. 그런 날 향해 나는 끝없이 질문했고 여전히 질문한다. 하지만 답은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냥 그게 '나'라는 사람인데, 거기에 물음표를 던져봤자 나올 수 있는 답이 애초에 존재할까.


브레네 브라운이 말하는 'vulnerability'는 이런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단어였다. 그냥 나 조차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받아들이는 것. 나 스스로에게 끝없이 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해답을 내놓지 못하는 스스로를 몰아세우고 마는 나의 본질적인 '연약함'마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곧 나를 믿는 강한 힘으로 이어진다는 것. 그게 끝없이 꼬리의 꼬리를 무는 내 삶의 물음표들의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단어를 몸에 새겼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닌, 정말 나 스스로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매일 거울을 보며 스스로 되새기기 위해 새긴 타투였다.


하지만 지난 2년 동안 나는 거울도 잘 보지 않았다. 대충 힐끗 보고 마는 거울에 민소매를 입어도 잘 가려지는 이 타투가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스스로를 원룸에 고립시키고, 현재의 '나'를 보는 것이 괴로워 과거의 '나'로 돌아가려 발버둥을 쳤으니 거울을 똑바로, 제대로 보는 게 싫었던 건 당연했다. 하지만 공백기가 2년을 찍고, 3년 차에 들어서면서 겨우 거울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정면에서 응시한 거울엔 지난 2년 동안 부쩍 살이 찐 통통한 얼굴에, 생기가 없는 눈이 비쳤다. 그리고 내가 스스로 되새기기 위해 오래전에 새겨 놓았던 오른쪽 어깨의 'vulnerability' 타투가 눈에 띄었다. 심장에 새기듯, 어깨에 새겼던 이 말의 의미를, 내가 그때 무엇을 다짐하며 새겼는지를, 공백기 2년을 지나서야 다시 떠올릴 수 있었다. 나의 연약함을, 결함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 그게 내 삶의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해답임을 나는 2년이 지나서야 다시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내 부끄러움을 쓰기로 했다. 이력서에도 자기소개서에서도 쓸 수 없는 지난 2년간의 나의 발버둥과 같은 처절한 몸짓을 쓰기로 했다. 이력서에도 자기소개서에도 지난 내 2년은, 그리고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는 나의 '백수'로서의 시간은 철저히 공백으로 남을 테지만, 이력서와 자기소개서가 아닌 이 현실에서, 내 삶에서 지난 2년은 결코 공백이 아니었다. 생산성으로 모든 것의 가치가 매겨지는 이 시대에 지난 2년은 생산성으로 따지면 0에 수렴했지만, 나는 어떻게든 매일을 살아왔다. 살아내었다. 나 스스로를 고립시키면서, 부정도 하면서, 꿈을 향해 나아가는 반짝이는 이들의 멀어지는 등을 보면서, 과거의 '나'를 돌이키려 하면서, 또 누군가를 동경하면서. 지난 2년간 나는 이력서에 단 한 줄이라도 채울만한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지만, 살아내었다. 누군가에겐 전혀 치열해 보이지 않았던 2년이겠지만, 난 2년간 살아내기 위해 매일 발버둥 쳤다.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고, 매일 그 답을 찾아 헤매었다. 찾아 헤매다 지쳐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있던 순간에도 나는 끝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미련해 보이고 게을러 보이고 철없어 보이는 그 순간조차도 내겐 어떻게든 삶을 이어나가기 위한, 생의 이유를 찾기 위한 답을 찾기 위한 치열한 순간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부끄러움을 쓰기로 결심했다. 2년간의 백수 생활. 30대의 백수 생활. 부끄럽기 그지없는 지난 2년이지만, 난 이 부끄러움을 그대로 세상에 드러낼 용기를 내기로 했다. 지난 2년간 내가 겨우 칮아 낸 것이 이 용기라면 결코 지난 2년이 무용하지는 않을 테니까. 적어도 내가 오른쪽 어깨에 새긴 다짐에게는 부끄럽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 용기를 동력 삼아 아직도 찾지 못한 내 삶의 답을 찾기 위해 조금씩 나아갈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니까.


그래서 나는 내 부끄러움을 쓰기로 결심했다.





*TED  'The power of vulnerability'  - 브레네 브라운 (https://www.ted.com/talks/brene_brown_the_power_of_vulnerability/%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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