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롤 Oct 14. 2023

나는 살면서 처음 포기를 했다.

꽤나 오래전에 지원했던 포지션이 있었다. 구인 공고에 이미 면접 날짜부터 예상 출근일까지 상세한 일정이 안내되어 있었는데, 나는 명시되어 있던 면접 날짜가 지나도 어떤 연락도 받지 못해 '아 또 떨어졌구나' 하며 큰 실망이나 허무함조차 느끼지 않고 그냥 그대로 잊어버린 포지션이었다. 그 포지션에 지원하기 위해 열흘 가까이 쏟았었지만 '연락 없음'으로 대신 전해진 불합격 소식은 아무렇지 않았다. 지난 2년은 불합격 사실을 큰 감정의 동요 없이 그저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력서를 만들고 자기소개서를 쓰는 일은 대학원을 준비할 때부터, 대학원 졸업 후 해외에서 첫 취업을 알아볼 때, 한국에 귀국해서 새롭게 한국에서의 일자리를 구할 때, 그리고 이 2년의 공백기까지, 정말 몇 년 동안 계속해왔던 일이기 때문에 이젠 어느 정도 요령도 생기고 익숙해질 법도 한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난생처음 지원서를 썼을 때처럼 나는 여전히 지원서 하나를 쓰는 게 어려웠고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한 곳에 지원하는데 최소 3일에서 일주일은 기본적으로 필요했다.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성을 다했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정말 순전히 미련하다고 해야 할까. 그냥 아무리 몇 번을 반복해도, 똑같은 회사의 똑같은 포지션이 나오지 않는 이상 매번 다른 이야기를 풀 수밖에 없었고, 나는 고지식하고 미련하게 그 지난한 과정을 반복했다. 그래서 나의 지원은 항상 더뎠고, 수 백장의 지원서를 썼었다는 다른 지원자들의 노력과 열정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의 '최선'에 한계를 느끼며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공백 2년이 다가오던 어느 날, 평소처럼 지원서를 쓰던 중에 낯선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오래전에 지원했다 떨어진 줄 알고 까맣게 잊고 있던 포지션의 서류 심사에 합격했다는 소식이었다.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어리둥절해 전화를 받으며 황급히 저장 해 두었던 지원 서류를 확인했다. 그제야 열흘 가까이 쏟아 작성했던 지원서가 생각이 났다. 합격 소식을 전한 인사팀 분은 내게 면접 일정을 안내해 주고는 이틀 후까지 제출해야 할 사전 과제가 있다며 메일로 전달해 주겠다는 말을 남겼다. 이미 쓰고 있던 다른 지원서가 있었고, 이틀 안에 마감해야 할 다른 지원서가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럽게 잡힌 면접과 주어진 사전 과제가 당황스러웠다. 생각해 둔 며칠간의 스케쥴이 한순간에 꼬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모처럼의 서류합격 소식이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그동안  2-3시간 안에 말도 안 되는 양의 과제를 해내야 했던 사전 과제도 몇 번 경험했던 터라 이틀이면 그래도 아무것도 못하지는 않겠다싶어 나름 희망을 가지며 알겠다고 했다. 사전 과제의 자세한 내용을 확인하기 전, 나의 안일한 생각이었다.


메일로 전달된 사전 과제의 내용을 보니 그 직무와 관련한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해낼 수 있는 과제였다. 공고에는 특별히 정해둔 지원자의 최소 경력 기간도 없었고, 직무 레벨도 낮은 포지션이었기에 그 직무에 익숙하지 않은 나도 덤벼볼 수 있는 직무라고 생각했던 게 착각이었다. 요즘엔 신입을 뽑을 때도 경력이 빼곡한 '신입'을 원한다는 것을 안일하게 또 잊고 있었던 탓이다.


그나마 내가 내세울 수 있는 건 이 회사가 다루는 주제에 대한 관심으로 쌓아온 잡지식뿐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관심을 바탕으로 먹히든 먹히지 않든, 설득력이 있든 없든, 일단 아이디어로 밀어붙이는 것 밖에 없었다. 사전 과제에 대한 상세 사항을 읽고 과제에 반드시 넣어야 하는 핵심 사항을 체크하고 보니 아이디어가 하나 떠오르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이 아이디어가 과연 좋은 아이디어인지 나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전문지식을 0부터 익히고자 들여다볼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대충 과제 안에 들어가야 할 핵심 요소들만을 짧은 리서치로 파악하고 그 요소들을 담아 비전공자로서 최대한 설득력 있는 결과물을 만드는 게 최선이었다.


지난 구직 기간 동안 몇 번의 사전 과제를 경험하며 마감일까지 이틀이 남았다는 게 처음엔 양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과제를 자세히 살펴보니 이틀이 결코 여유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높은 난이도의 문제를 여러 개 주고선 한두 시간 안에 풀어 제출하라고 했던 과거의 다른 사전 과제만큼 높은 난이도와 짧은 시간이었다. 결국 나는 쓰고 있던 지원서는 과감히 내려놓고 이 과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잠도 거의 자지 않고 온갖 종류의 카페인의 힘으로 버티면서 처음 떠오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궤변이든 무엇이든 나름의 논리도 만들면서 나름대로 조금씩 풀어나갔다. 결과물에 꼭 포함되어야 하는 부분을 리스트로 적어둔 것을 하나하나 체크하며 진행했는데, 마지막 하나, 정말 전문적인 지식이나 경험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 부분은 최대한 마지막에 처리하려 미루고 미루었는데 이제 그 부분을 해야할 때였다. 그 기점이 내가 정신을 끊게 된, 정확히 말하면 정신을 놓게 된 포인트였다.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제대로 먹지도 않고 작업을 이어나가다가 미루고 미루던 그 마지막 하나에서 탁 막히자, 나는 뭐라도 좀 챙겨 먹고 짧게 쉬면서 에너지를 충전한 후 다시 일을 시작하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노트북을 덮었다. 머리를 좀 비운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는게 효율적일 것 같았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다. 그런데 난 그 이후로 더 이상 과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엄청난 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상황이 주는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다. 스스로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취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가 회피라고 들었다. 사실 나는 방어 기제로서의 '회피'를 잘 이해하지 못했었다. 고지식한 성격으로 과도하게, 비대하게 커져버린 책임감이라는 큰 혹을 달고 사는 내게, 마감 기간 내의 제출, 또는 어떻게든 완성시켜서 마무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감 시간 내에 제출하지 못해도 어떻게든 그래도 끝까지 과제를 완성시켜 제출을 하고는 했다. 대학교 때도, 대학원 때도, 사회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제출을 했고 마감 시간을 넘긴 데에 대한 페널티는 스스로 감당했다. 잘 해내지 못하더라도 일단 시작한 일의 마무리는 끝까지 지을 것. 그리고 그 후에 그만두든 말든 결정할 것. 그게 내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게 달린 책임감이라는 비대한 혹부리는 완벽주의라는 정말 불필요하기 짝이 없는 또 다른 혹과 함께 붙어 내 삶에 더 큰 무게를, 때때로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를 싣고는 했다. 그래도 난 그게 내가 가진 단점이자 또 장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감 12시간 전 노트북을 덮고 그대로 손을 놓아 버린 이번 일은, 정말 내 30년 넘는 삶에서 일어난 최초의 사고였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일에 부딪히고 깨지며 좋아하는 것을 찾고 좇아 끝없이 삶의 궤도를 틀고 수정하며 앞으로 나아갔던 나였기에 포기라는 행위 자체가 내 삶과 완전히 무연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내게 '주어진 일'을 포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학교든, 회사든, 무엇이든, 내게 누군가가 하라고 한 것, 그렇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된 것을 포기한 적은 없었다. 그놈의 비대한 책임감이라는 혹부리의 무게에 끌려 바닥을 기면서도 어떻게든 마무리를 했었다. 때문에 나는 분명 완벽하지 않아도, 비전공자, 비경험자로서 도저히 말 같지도 않은 결과물을 만들어 냈을지라도, 어쨌든 무언가를 만들어 결과물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는 마감 12시간 전, 잠깐 머리를 비우기 위해 휴식 시간을 갖겠다며 노트북을 덮고서는 잠도 자지 않고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며 침대에 누워 다른 일을 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한 시간만 더 쉬었다가 하면 되지 않을까. 아니 30분만 더. 아니 한 시간만 더. 그렇게 마감일의 동이 틀 때까지 나는 내가 당장 해야 하는 일이 분명히 내 코 앞에 있었는데도, 마감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단 것을 알면서도 과제를 하지 않았다. 회피했다. 내가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그 '회피'를 내가 하고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스스로도 이해 할 수 없는 그 회피는 마감 2시간 전까지 이어졌다. '아 사람들이 이렇게 회피를 하는구나'라면서 스스로 지금 회피를 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으면서도 계속 회피를 했다. 정말 스스로가 미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회피를 멈추지 못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약 10시간 동안의 말도 안 되는 회피 끝에 정말 말 그대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마감 시간 2시간 정도를 남기고는 노트북을 열었다. 해야 할 것들을 급하게 살펴보았다. 마침내 내가 열 시간 가까이 회피하며 자초한 결과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아있는 건 내가 여태까지 해본 적 없는 가장 어렵고 낯선 것을 만드는 것. 그리고 나는 알았다. 난 남은 시간 안에 이것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지난 이틀 동안 집중해서 해왔던 것들과 상관없이 남은 시간 안에 마무리해서 제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열 시간 전이었다면 완벽하지 않더라도 마무리는 할 수 있었겠지만, 마감 2시간을 남기고선 무리였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를 외치며 자기 최면을 걸어보려 해도 해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했고, 남은 과제의 양과 난이도는 더욱 분명했다


손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식은땀으로 등이 젖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난 더 이상 이 과제를 할 수 없다는 것을. 해낼 수 없다는 것을. 내 인생 처음으로 내게 주어진 과제를 스스로 포기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동이 터오는 아침, 마감 시간 한 시간 정도를 남긴 시점에서 결국 나는 이메일을 썼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사전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여 면접에도 참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게 주렁주렁 달려 비대하게 커져버린 책임감과 완벽주의의 혹이 나란히 날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역할도 제대로 못한 혹부리들 주제에 쓸데없이 그새 무게는 더 불어나 나를 짓눌렀다.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포기를 했다. 그리고 포기를 선택한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스스로였다. 그 사실에 나는 그냥 그대로 무너졌다.




사전과제와 면접을 포기하는 메일을 보내고 정신이 나가버린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야말로 패닉 상태에 빠져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이성적으로 생각할 힘조차 없었다. 그냥 누군가를 붙잡고 지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내가 무슨 사고를 쳤는지 이야기라도 해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아니, 그냥 누군가가 필요했다. 누군가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이 원룸에 나 홀로 있다는 것이 갑자기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꼭두새벽에 무작정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내가 이 포지션에 지원을 했었는지, 이런 과제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채, 그냥 평소처럼 하루를 일찍 시작하던 중이셨을테다. 그런 어머니의 일상에 내가 우박을 퍼붓는 전화를 걸었다. 지난 2년 가까이 '취준생'이란 허울 좋은 소리를 하며 백수로 지내는 동안, 어머니는 내게 단 한마디의 말도, 잔소리도 하지 않고 늘 믿고 기다려주셨다. 그래서 어머니께 '엄마 내가 그냥 포기했어'라고 하는 것이 정말 세상의 그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을 고백하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내가 '포기했다'는 사실을 말로 내뱉는 것이 너무 무서웠다. '포기했다'는 말이 내 입을 튀어나오는 순간 살아 움직여 내 목을 조여올 것 같았다. 그래서 어머니께 무작정 전화를 걸어 놓고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핸드폰을 붙잡고 한참이나 울기만 했다.


"내가 제출해야 할 과제가 있었는데 과제를 포기했어. 할 수도 있었는데, 내가 안 했어. 그냥 다 내 탓이야. 내가 못났어. 미안해 엄마. 내가 포기했어."


한참을 울다가 어렵게 어머니께 사실을 말씀드렸다. 긴 설명 없이 간단한 팩트만 전했지만, 사실 그게 전부이기도 했다. 완성해서 제출할 수도 있었던 과제. 그러면 이어졌을 면접. 그 이후로 어떻게 될지 몰랐던 가능성. 아니, 과제 제출과 면접 이후의 가능성은 차치하고서, 일단 내게 주어진 일을 스스로 포기해 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 이유가 전부 나 때문에 벌어지고 만 일이라는 것이 이 문제의 핵심이었고, 나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손을 진정시키며 그 말을 겨우 내뱉었다. 그러자 평소처럼 '그랬구나'라는 말이 나올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하셨다.


"왜 포기해? 지금이라도 할 수 없어? 당장 전화 끊고 지금이라도 해. 마감시간 못 지켜도 돼.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마. 대충이라도 해. 그냥 지금 다시 시작해서 마감시간 지나서라도 뭔가를 보내. 포기하지 마."


그래서 어머니께 나는 이미 이메일로 그 회사에 지원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젠 너무 늦었다고 어머니께 말했지만, 어머니는 그래도 그냥 해보라고 계속 설득하셨다. 지난 2년 동안, 아니 평생 내가 내리는 결정들과 선택들에 큰 말씀 안 하시고 항상 지지해 주고 믿어주셨던 분이 어머니였다. 그래서 이번에도 별말 없이 그냥 '그랬구나' 정도의 반응을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어머니의 말씀을 들으면 조금 진정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머니는 전혀 괜찮지 않으셨다. 어쩌면 스스로 포기했다는 사실에 자괴감과 패닉에 빠진 나보다, 포기하고 만 딸을 바라본 어머니가 더 괜찮지 않았던 것 같다.




어머니의 진심은 그날 오후에서야 알게 되었다. 새벽에 그 카오스가 지나가고, 나는 살면서 처음 스스로 포기했다는 사실 때문에, 다른 이유도 아닌 그냥 정면으로 돌파할 용기를 내지 못하고 회피를 선택하면서 포기로 이어졌다는 이유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이 그냥 100% 내 잘못이기 때문에 자기혐오의 늪에 빠져 허무하게 지나가 버린 시간만을 멍하니 침대에 누워 바라보고 있었다. 익숙해졌던 천장이 또 뻘밭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늦은 오후쯤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잠은 좀 잤니', '밥은 좀 먹었니', 늘 전화를 할 때마다 하는 인사로 대화를 시작한 어머니께 나는 아침부터 죄송했다는 말로 답을 했다.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난 네가 포기하는 게 싫어. 무엇이든 좋으니까 너가 절대 포기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엇을 꿈꾸든 절대 포기만 하지 마. 너가 이번에 포기한 게 어떤 일인지 난 정확히 모르지만, 그냥 너가 살면서 처음으로 '포기했다'는 말을 하니까, 너가 꿈꾸는걸 완전히 포기한 것 같아서 엄만 화가 났었어. 포기하지 마. 꿈꾸는 걸 포기하지 마."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내가 구체적으로 설명도 하지 않은 과제와, 포지션, 회사 이름, 이런 어떤 것과도 무관하게 어머니는 그냥 내가 '포기한다'라고 했던 것을 꿈을 찾고 꿈을 좇는 것을 포기한다는 말로 이해하셨던 것이었다. 서른 살을 훌쩍 넘은 딸이 결혼도 안 하고, 연애도 안 하고, 꿈을 찾겠다며, 좋아하는 것을 하고 싶다며, 이직처도 구하지 않고 무턱대고 회사를 그만두고선 2년 가까이 취직도 못하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이나 까먹고 있는데 그동안 단 한마디도 어머니가 내게 하지 않았던 건, 내가 꿈을 좇기위해 이 시간을 지나고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었다. 어머니에겐 그게 제일 중요했다. 돈도, 명예도, 어머니 친구분들에게 자랑할, "아 우리 딸, 어디 어디 다니잖아" 이런 게 아닌, "아 우리 딸, 지가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순간을 어머니는 묵묵히 기다리셨던 것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꼭두새벽부터 전화해서 한참을 울더니 '포기했다'라고 말하는 30대의 철없는 딸이 어머니는 얼마나 안타깝고 속상하셨을까.




'의사가 되어라, 교사가 되어라, 대기업에 들어가라, 취직을 아무 데나 빨리 해서 돈을 벌어와라. 아니면 결혼을 해라.'


그 무엇도 단 한 번도 내게 말한 적이 없는 분이었다. 11살에 처음 종군기자가 될 거라며 비혼선언을 했을 때도 그래 그러렴. 대학교를 졸업하고 석사 진학을 선택한다고 했을 때도 그래 그러렴. 그냥 내 선택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해 주신 분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으셨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꿈이 뭔지 잘 모르겠어서 헤매고 있다고, 퇴사 후 1년 정도 지났을 때 어머니께 털어놓자 어머니는 '꿈을 잃는 건 참 슬픈 일이다. 그래도 다시 잘 생각해 봐.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라고 하셨던 게 생각났다. 그랬다. 어머니에겐 회사의 크기도, 네임밸류도, 연봉도, 복지도, 타이틀도, 중요한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그냥 당신 딸이 좋아하는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느냐. 그게 가장 중요했던 것이다.


나는 점차 나이가 들어가며, 특히 귀국 후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나, 전화로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나며 어머니를 훨씬 더 잘 알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전과 달리 갑자기 감정적으로 말하시거나, 마음이 급해지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도 나이와 함께 변해가는 것 같아 하루빨리 어머니께 무언가를 해내어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하루하루 커져갔다. 그런데 난 여전히 어머니를, 정말 어머니의 진심을 알지 못했다. 흰머리도 얼굴의 주름도 늘었지만 어머니는 아직도 '꿈'을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당신의 딸들이 '꿈'을 꾸며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정말 진심으로. 미래의 무한한 가능성에 취해 요코하마의 밤하늘을 향해 꿈꾸는 미래를 쉴 새 없이 천진하게 떠들어댔던 20대 초반의 나보다 더, 어머니는 내가 '꿈'을 계속 좇기를 바라신다.


내가 이력서에도 자기소개서에도 단 한 줄도 쓸 수 없는, 한국 사회에서도 쉽게 허용하지 않을 2년의 공백기를, 면접관이 반드시 물어볼 '2년 동안 뭘 한 거예요?'라는 질문에 지난 2년을 생산적으로 포장하기 위해선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는지 고심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 그 답도 없는 지난 2년의 공백기를 어머니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계셨던 것이다. 진심으로 응원하며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꿈을 찾아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를.

꿈을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고 그렇게 끝까지 나아가 보기를.

그리고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찾아 어떻게든 계속 살아가 보기를.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을 2년의 공백기가, 나 스스로도 부정하고 잊고 싶은 지난 2년이, 누군가에겐 충분히 기다리고 응원해 줄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을 줄은 나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는 역시 바보였다.

이전 08화 나는 언니처럼 되고 싶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