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이 생각할 수 있는 성장을 위한 옵션은 뻔하다. 생각나는 대로 나열해보면 이직, 대학원, 자격증, 독서, 커뮤니티, 멘토링, 프로젝트, 리더 경험 등이다. 이 옵션 중에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찾더라도 그것을 실행에 옮겨서 원하는 결과를 얻기까지는 또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 이 무언가는 자신만의 루틴일 수도 있고, 누적된 경험에서 비롯된 노하우일 수도 있다. 이것이 있는 경우는 계속 활용해서 성장할 수 있고, 없는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하는데 이때 다른 사람의 루틴이나 노하우를 참고해보는 것이 크게 도움된다. 나 역시 나만의 루틴 또는 노하우가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 직장 생활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었다. 간절한 바람이 게으른 내 몸을 움직였고 원했던 결과를 얻으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2005년 12월, 첫 회사 신입사원 연수 중이었다. 선배들로부터 조언을 듣는 시간에 조직문화혁신TF팀장이라는 분이 들어왔는데 굉장히 젊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좋은 평가를 받아 인재 그룹에 선발된 후 해외 MBA에 합격해 회사 지원을 받아 다녀와서 젊은 나이에 팀장이 되었다. 당시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지 몇 달 되지 않았던 나는 솔직히 MBA가 뭔지도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졌다.
'멋있다. 나도 꼭 MBA 가야지!'
회사 적응을 마치자마자 해외 MBA를 가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아봤다. 두 가지였다. 하나는 최근 3년의 업무 평가 중에 2년 이상을 5점 척도 기준으로 4점 이상을 맞아야 했다. 그렇게 해서 회사 인재 그룹에 선발된 후에는 MBA에 지원에 필요한 GMAT, 토플 점수를 획득해 미국 Top 20위 내 MBA에 지원해서 합격해야 했다. 한마디로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잠을 줄여가며 공부해야만 했다. 간절한 바람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나 혼자 열심히 준비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다. 뭔가 전략이 필요했다.
내 첫 번째 전략은 바로 주변에 내 간절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널리 알린 것이다.
가장 먼저 가족과 친한 동기들에게 내 바람을 알렸다. 동네방네 '나 MBA 시작한다'고 알리자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내 바람을 들은 이들은 나를 만날 때마다 내 바람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먼저 물어보기 시작했다.
"마크, GMAT 학원은 잘 다니고 있어?"
"마크, 시험은 언제 보는 거야?"
이렇게 물어봐주니, 요란한 빈수레가 될 수 없었다. 긍정적인 스트레스가 되어서 장기전을 펼쳐야 하는 MBA 준비 과정에서 큰 동기부여가 되었다. 그렇게 2년 정도 주위에 알렸더니 주위 사람들의 질문이 달라졌다.
"마크, 그래서 언제 가는 거야?"
"마크, 올해 지원하는 건가?"
언제부턴가는 다들 '마크는 곧 MBA 갈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상황이 나쁘지 않았다. 나 자신을 더 단속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바람을 이루기 위해 세운 두 번째 전략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었다.
GMAT 시험공부는 재미있었지만 점수는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이 상태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과감히 시험 등록을 했다. GMAT은 시험 비용만 약 30만에 1년에 다섯 번 밖에 못 보고, 한번 본 점수는 5년 동안 지원한 학교에 공개되는 무시무시한 시험이었다. 특히 당시 취소 수수료가 무려 80%여서 일단 지원하면 무조건 봐야 했다.
무작정 등록하고 나니 마음 가짐이 달라졌다. 퇴근하면 아내와 돌이 갓 지난 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향하지 않고 곧장 모교 도서관으로 향했다. 대학 다닐 때는 그렇게 멀리 했던 도서관을 졸업하고 내 집 드나들듯 했으니 인생은 모를 일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가족의 희생이 들어가면 이건 정말 배수의 진 전략이다.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집으로 돌아와서 피곤한 아내와 잠든 첫째 얼굴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엄청난 희생을 감수하며 공부하고 있는 거구나!'
이게 전쟁이라면 무조건 이겨야 하는 전쟁이었다.
그러다 2008년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회사는 MBA 스폰서십 프로그램을 중단했다!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심정이었다. 뭔가 방향을 다시 잡아야 했다. 내 선택은 회사 일을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MBA를 가기 위해서 업무 평가도 좋아야 했기에 프로그램이 중단된 것을 오히려 평가를 잘 받는 데에 집중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았다.
그렇게 해서 내 세 번째 전략은 버티면서 타이밍을 기다리는 것이었다.
간절한 바람을 지속적으로 알리고 배수의 진을 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치 거대한 쇄빙선과 같다. 쇄빙선이 아무리 두꺼운 빙하를 지나더라도 묵직하게 얼음을 부수고 나아가는 것처럼, 바람이 크면 언젠가는 막혔던 문제들이 해결되는 시기가 찾아온다.
2009년 늦여름, 여전히 MBA 프로그램은 중단된 상태였다. 갑자기 사내 공지가 떴다. 일본정부장학생 MBA 지원자 모집 공지였다. MBA 지원 프로그램 중단됐지만 이 건은 일본 정부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지원하는 경우여서 회사에서도 예외로 1명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사내 지원자로 선발되어도 본인 스스로 필요한 시험 점수를 얻고 MBA에 지원해 모든 절차를 통과해야 했다. 놀랍게도 사내에 준비된 직원이 나뿐이었다. 준비를 망설였던 직원들 모두가 프로그램이 중단되면서 마음을 접었던 것. 사내 지원자로 뽑혔지만 기뻐할 겨를이 없었다. 제출 서류 마감까지 남은 기간은 정확히 두 달. 우선 내가 보유한 GMAT 점수는 지원 자격인 X00점에 미달했다. 곧장 가장 가까운 시험 날짜로 등록했다. 그리고 시험 당일. 4시간 넘게 시험을 보고 나면 점수가 화면에 뜬다. 바로 확인할 용기가 없어 손바닥으로 화면을 가리고 일의 자리부터 하나씩 확인했다.
0...... 0...... X!!!
정확히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 X00점이었다. 역시나 기뻐할 시간이 없었다. 좋은 점수가 아니기에 인터뷰에서 승부를 봐야 했다.
인터뷰는 MBA 미국인 교수님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인터뷰를 진행했다. 공대 출신이었기에 솔직히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 공부한 것이 전부였던 내 전략은 예상 질문을 뽑고 답변을 준비해서 통째로 암기해버리는 것이었다. 인터뷰가 있던 날, 놀랍게도 교수님은 'Why MBA?' '졸업 후 10년 뒤 모습은?' 등 내가 준비한 질문만 콕 집어 물어보셨다. 여러 번 모의 인터뷰 연습했던 나는 막힘 없이 답할 수 있었다. 심지어 교수님으로부터 영어 점수가 다른 지원자에 비해 낮은데 영어 커뮤니케이션에는 전혀 지장이 없다는 피드백을 듣기도 했다.
그리고 두 달 뒤...
이렇게 내 첫 번째 바람이 이뤄졌다.
MBA를 마치고 돌아와 운 좋게 인하우스 컨설턴트가 되었다. MBA에서 머리로만 배웠던 것들을 실전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 실력이 늘었던 시기였다. 한 번의 작은 성공을 바탕으로 나에겐 또 다른 바람이 생겼다. 바로 외국계 기업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MBA에서 배운 것들을 적용하기에는 아무래도 유연한 조직을 갖춘 외국계 기업이 적합했고 3년을 목표로 잡았다. 이때 내가 써먹었던 방법도 처음과 같았다.
먼저는 가족, 지인, MBA 동기들에게 내 바람을 얘기했다. 회사에서는 정말 친한 선후배들에게만 공유했다. 3년을 생각했지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컨설턴트 일은 성장을 보장하지만 삶의 질은 솔직히 최악이어서 주중에는 가족들 얼굴 볼 시간 조차 없었던 것.
그래서 바로 두 번째 전략으로 일단 저지르고 보기로 하고 이직 시장에 뛰어들었다. 얼마 안 있어 글로벌 매출 100조가 넘는 외국계 회사에서 전략기획 매니저 자리 제안이 왔다. 헤드헌터는 연락한 다음날 아침 회사 로비로 찾아왔고, 인터뷰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이전 회사에는 최소한의 도리를 다하기 위해 컨설팅 프로젝트 종료 이후로 이직 날짜를 정했고, 한 달 만에 외국계 회사에 출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내 두 번째 바람이 이뤄졌다.
세 번째 바람을 정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사실은 신입사원 때 세웠던 목표가 하나 있었다. 바로 나이 마흔 전에 해외에 나가는 것이었다. 외국계 회사로 간 이유 중에 하나도 바로 그 목표 때문이었다. 그런데 너무 오래전에 세운 목표다 보니 간절함이 덜했다. 회사의 본사가 있는 독일을 비롯해 다른 나라 법인도 알아봤지만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그렇게 세 번째 바람은 이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다 마흔이 넘어 늦바람이 들었다. 바로 '더 늦기 전에 스타트업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바람이었다. 사실 늦은 나이에 스타트업에 노크한다는 것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다. 나도 잘 알았다. 그런데 더 늦으면 아예 시도조차 못할 것이라 생각했고 이력서도 넣는 한편 스타트업에도 일하는 지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이때도 역시 내 전략은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내가 스타트업에 도전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몇 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지만 결과가 좋지 않았다. 그중에 몇 곳에서는 비공식적으로 내 나이가 스타트업에 들어가기에 애매하다고 했다. 진짜 늦은 건 아닌지 고민했다.
'이제 스타트업은 포기하고 원래 잘하던 일을 해야 하나?'
그런데 마음 한편에 미련이 남았다. 스타트업에 대한 간절한 바람을 이렇게 포기하기엔 자존심이 상했다. 그때 생각난 분이 바로 지금 회사의 대표님이다. 내가 진행하는 영어 토론 모임에 멤버로 합류하셔서 자연스럽게 회사 얘기를 많이 하셨던 분이다. 나 역시 모임을 진행하면서 스타트업 이직에 대한 바람을 때마다 언급했었다.
스타트업 이직을 정말로 포기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하던 어느 날 대표님이 떠올랐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고민은 길게 하지 않았다. 이번이 아니면 '스타트업'에 대한 도전은 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돌하게도 대표님에게 카톡을 보냈다.
내 진심은 마지막 줄에 담겨 있었다. 나중에 물어보지 않은 걸 후회하긴 너무나 싫었다. 현재의 창피함보다 미래의 후회가 크다면 난 언제든 현재의 창피함을 무릎 쓸 자신이 있다. 한 번뿐인 인생이지 않은가.
후에 대표님은 내가 먼저 연락을 해와서 놀랐다고 했다. 대표님도 역시 나와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간판이 좋은 외국계 기업을 다니는 나를 데려올 엄두를 내지 못하셨다고. 그래서 내 연락을 받고는 회사 직원들이 진행하는 외부 강의를 먼저 듣고 핏(fit)이 맞는지 확인 후 만나자고 하셨다. 강의를 듣고 나서 일주일 후 대표님은 나에게 회사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들려주셨고 나는 그렇게 바랐던 스타트업에 합류했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있다.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기 자랑과 같이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인생은 성공보다 실패가 많았고, 밝은 면만큼 어두운 면도 가득했다. 누군가의 실패를 통해서 공감과 위로를 얻듯이, 누군가의 성공을 통해서 노하우와 동기부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단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평범한 내 인생의 대부분을 키운 것이 바람이었기에 이 글을 읽는 누군가도 간절한 바람을 갖고, 주위에 알리고, 일단 저지르고 보고, 좋은 타이밍을 기다려서 성장하길 간절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