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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묻는 사람 K Feb 23. 2022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황보름 장편소설. 클레이하우스. 2022.

 십칠 년째 독일에서 살고 있는 지인이 얼마 전 귀국했다.  재작년엔 엄두조차 낼 수 없었고, 작년엔 오락가락하다 포기했는데, 올해는 기어 왔노라 했다. 일주일 격리 끝에 흩어져 사는 가족을 만났고  친구 만날 기대에 부풀었다고 했다. 하지만 출국 일이 임박 그녀와  출장을 앞둔 남편, 다수를 만나야 하는 나, 조직 생활을 하는 이들 모두 '바람 한 자락에도 몸을 사려야' 하기에  심사숙고 끝에 온라인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러한 변화를 누군가는 코로나가 준 축복이라고 했는데, '축복'까지는 모르겠으나 필요한 적응은 맞는 것 같다. 기계치인 나도 컴퓨터, 노트북, 휴대폰 화면을 앞에 두고 이야기 나누는 것이 이제는 그다지 어색한 일이 아니니 말이다. 되레 학회 참석이나 업무 관련 회의가 온라인으로 바뀐 건 무지 다행이고 환영하고 싶을 정도다.


 이런 시국에도 놀랍도록 질서 정연하더라고, 규칙을 알아서 지키는 사람들이라 가능한 거라고, 이게 우리 민족성이라고, K양심과 K 속도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그녀는 쉬지 않고 화면 속 우리를 향해 이야기했다. 누구도 말 사이를 끼어들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으로, 손 모양으로 맞장구쳤다. 그녀는 돌아갈 일상이 적지 않게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모임이 무르익자, 지쳤다고, 외롭더라고, 모든 게 부산스럽게만 느껴진다고 했다. 힘든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나이 탓인 것도 같고 이방인으로 사는 탓인 것도 같다고 했다. 하지만 번 아웃은 확실하다며 농담인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한 달에 한 번쯤은 지금처럼 만나자고, 시차를 고려해서 시간을 정하면 된다고, 모두 비슷비슷한 마음이고 상황이라 서로를 다독였다.


 감정을 추스르 그녀가 대뜸 가져갈 책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한국어로 된 책을 구하기 쉽지 않으니 가능한 만큼 챙겨갈 거라고. 다만 쉽게 흔들리는 일상이므로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자극 없는 책이어야 한다고도 말했다. 요즘 카뮈에 빠져 있는 남편은 <페스트>와 <이방인>을 추천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 방황>은 몇몇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에는 말이 없다가 불평등 문제에서 만큼은 핏대를 세우는 성철이 책 목록을 주르륵 풀어놓았을 때는 이구동성으로 ' 왜 래' 라며 입을 막았다.


 나는 최애 캐릭터 <빨강머리 앤>과 전날 밤 완독 한 황보름 작가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를 추천했다. 따끈따끈한 신간이라고, 하지만 뭣보다 단정한 소설이라고, 그러니 당신이 피곤에 지쳐있을 때에나 이리저리 치여서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위로가 될 거라고 했다. '다정한'이라고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단정한'이라고 바로 잡아주려다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아 마음대로 생각하도록 그냥 두었다.



단정한 소설, 정한 작가. 



 저자를 조금 가까이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시절 인연 덕에 그의 표현처럼"거리를 지킬 줄 아는 사람들끼리의 우정과 느슨한 연대' 그 언저리 어딘가에는 내가  않을까 믿고 있다. 그래서 소설이 그를 꼭 닮다는 걸 안다. 나는 글과 사람의 간극이 너무 커서 종종 실망하고, 순진한 바람망하곤 한다. 글 쓰는 사람을 의심하고 경계하면서 '알고 싶지 않음으로' 내 환상을 지키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번엔 그럴 필요가 없어서 좋다.


 소설에는 작가의 성실함과 솔직함, 고유한 삶의 태도와 전방위적 호기심이 촘촘하게 투영되어 있다. 물론 유머도 있는데 그건 눈을 크게 뜨고 찾아야 알게 된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마음이 아릴 만큼 좋았다.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뿌듯해지곤 하는데 그 사람이 친구이니 마음이 아릴 듯 좋았다. 321,322쪽>


 아웃이 확실하다며 웃던 그녀가 사는 독일 시골 마을에, 남자 친구 기일에 맞춰 그의 고향인 페루로 떠난 A옆에 휴남동 서점 같은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동네에도. 그렇다면 수시로 드나들며  정서처럼, 민철 엄마이자 전희주처럼 공간의 품위를 지켜주는 꽤 괜찮은 손님이 될 자신이 있는데.... 그곳에서라면, 어쩌면 나도  조금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마음이 너덜너덜한 상태였어서, 단정함이 필요했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펼쳐 서점으로 향했다.

그래서 꽤 괜찮은 며칠이었다.




      영주는 민준과 한 공간을 사용하며, 침묵이 나와 타인을 함께 배려하는 태도가 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어느 누구도 상대의 눈치를 보며 일부러 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는 상태. 이 상태에서의 자연스러운 고요에 익숙해지는 법 또한 배웠다. (43쪽)    


      그 남자의 삶은 지루하긴 했지만 글도 그럭저럭 괜찮았거든요.  조용히 탁월한 사람들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아는 사람들은 알아주는 그런 탁월함. 그런 탁월함을 지니고 잘 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평생 그 순간만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하루아침에 스위스를 떠나는 거예요. 도착한 포르투갈에서 그는 뭘 찾을 수 있을까. 그는 그곳에서 행복할까. (48쪽)    


      책을 덮으며 생각했어요.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는 생각에만 골몰하지 말자. 그럼에도 내겐 여전히 기회가 있지 않은가. 부족한 나도 여전히 선한 행동, 선한 말을 할 수 있지 않은가. 실망스러운 나도 아주, 아주 가끔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은가 하고요. 이렇게 생각을 하니 조금 기운이 나네요. 앞으로의 날들이 조금 기대도 되고요. (112쪽)    


      승우의 경험이 하나 알려준 건, 잘 모르겠을 때는 우선 멈추는 것이 낫다는 사실이었다. 질문해도 될지 모르겠을 때는 질문하지 말 것.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는 듣는 역할에 충실할 것. 이 두 가지만 지켜도 최소한 무례한 사람에선 벗어날 수 있었다.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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