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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Oct 09. 2023

영혼의 집 - 이사벨 아옌데

 아옌데라면……. 읽기를 결심하는데 생길 법한 걱정이나 저항감은 없었다. 거기에는 불과 두 달 여 전에 읽은 ‘운명의 딸’ 영향이 컸다. 평범한 표현 속에 가득한 위트와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의 전개. 그걸 다시 한 번 체험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기대감에 부풀게까지 했다. 어디 그뿐인가. 영화와 연극으로도 제작이 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지 않는가. 독서욕을 자극하는 도화선 역할을 하기에 그보다 더한 것이 어디에 있을까? 지구상에서 우리나라로부터 가장 먼 나라의 이야기지만 물리적인 거리는 나에게 있어 어떠한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기대만큼이나 작가가 써내려간 한 문장 한 문장은 감탄사가 연이어 터져 나오게 만들었다. 큰 웃음이 폭발하지는 않았지만 엷은 미소가 계속 입가에 머물렀다. 큰 거 한 방이 아니라 잔잔한 감동이 독서를 하는 시간 내내 계속 바닷가의 파도처럼 마음속으로 찰싹거리며 다가왔다. 표현의 특징을 한마디로 정리해보았다. 익살스런 문체. 하지만 그것만으로 턱없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번에는 감상평을 간단히 풀어내려했다. 그러자 새삼 내가 간직한 어휘력의 부족이 더없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흥미와 감동,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동시에 찾아와 내 온몸을 흔들어 놓는 바람에 어지러울 지경이었다는 게 그나마 내가 표현해낼 수 있는 전부였다. 

 소설이 다루는 소재는 결코 가볍지 않다. 20세기 칠레의 정치적 지형을 바탕으로 근대사가 다루어진다. 자본의 극대화를 지향하는 보수정권은 부의 재분배를 통해 평등을 실현하려는 진보진영에 의해 정권을 빼앗긴다. 진보정권은 국민들의 탄탄한 지지기반에도 불구하고 여러 곳에서 문제점을 노출한다. 불안감은 쿠데타로 이어져 결국 군부가 정부를 장악한다. 이러한 흐름은 우리나라의 근대사와도 상당 부분 일치한다. 그런 만큼 난 책을 읽는 동안 자라면서 보고 겪었던 우리나라의 상황을 되돌려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으키곤 했다. 하기야 나름 정치체제가 안정된 나라치고 이러한 민주주의 발전과정을 거치지 않은 나라가 이 세상에서 과연 몇이나 될까? 

 소설은 근대사에 겹쳐 한 가족의 가족사도 고스란히 보여준다. 스토리는 니베아, 클라라, 블랑카, 알바로 4대째 이어지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이들의 가족사가 중심서사를 이룬다면 국가적 근대사는 배경으로 작용한다. 국가의 권력이 특정한 이념집단에 귀속이 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결정짓는 요소는 이념적 성향이다. 그건 아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크게는 보수와 진보로, 보다 세분화하면 극우와 보수, 진보와 급진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에스테반이 대표적 보수주의자라면 그의 쌍둥이 아들인 하이메와 니콜라스, 그리고 하인의 아들인 페드로 테르세로와 같은 젊은 층은 진보주의자에 속한다. 그런가 하면 쿠데타 세력의 일원인 에스테반 가르시아는 극우세력으로, 혁명을 통해 무장전복을 꿈꾸며 게릴라로 변신하는 미겔은 급진세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정권의 변동과 함께 이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은 복수라는 목적을 가지고 꽤나 긴장감 넘치게 전개된다. 

 그 과정에서 작가가 표현의 도구로 내세운 시점(視點)은 다소 특이하다. 전반적으로 전지적 작가시점을 유지하지만 드문드문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때의 화자는 에스테반이다. ‘나’로 나타나느냐 ‘그’로 나타나느냐의 차이는 시대가 가름한다. 다시 말해 현재 시점의 에스테반은 1인칭으로, 과거 시점의 에스테반은 3인칭으로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에필로그 역시 1인칭 시점으로 서술되는데 이때의 화자는 희한하게도 알바다. 

 화자를 바꾸어가며 소설을 쓴 이유는 주인공의 내면심리를 보다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내가 나를 아는 것만큼 나를 잘 아는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정확한 설명이 될까? 아니 그보다는 작가가 바라본 에스테반과, 에스테반 스스로가 바라본 에스테반, 그리고 손녀딸인 알바가 가족으로서 바라본 에스테반 모두를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더 어울릴 것 같다. 그 만큼 작품 전반에 걸쳐 에스테반의 모든 면이 촘촘하게 묘사되어 드러난다. 그렇다고 다른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소홀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내외면적인 특징들이 소상히 표현된다.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이미지가 쉽게 지워지지 않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니베아의 오빠인 마르코스, 모라 자매, 아나 디아스와 같은 인물들이 그러하다. 이런 점은 모든 내용에 개연성을 한층 더 부가하는 효과를 낸다. 

 에스테반을 제외하고 스토리를 끌고 가는 인물들은 거의 여성들이다. 이는 남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비난하기 위한 수단이다. 등장하는 여성들 대부분이 수동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매사 주도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점만 봐도 그러하다. 니베아와 클라라는 사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곳에서 남녀 간의 차별철폐와 여성의 참정권보장을 주장한다. 반면 아나 디아스는 학생운동을 주도하면서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쿠데타 세력에 체포되어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철의 여인상을 보여준다. 트란시트 소토의 삶도 조명해볼만하다. 비록 창녀에 불과하지만 그녀는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살아갈 뿐 아니라 마침내 사업가로서의 꿈을 실현시킨다. 그런가 하면 체포된 알바를 석방시키기 위해 쿠데타 세력에 로비를 하기도 하고, 아주 오래 전 50페소를 빌려준 에스테반에게 보은하는 의리를 과시하기도 한다. 

 내용 가운데에는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도 어김없이 나타난다. 무엇보다 조건을 우선시하는 당시 결혼풍습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블랑카는 테르세로를 사랑하면서 그의 아기를 임신한다. 그것을 안 에스테반은 자신의 입지가 허물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프랑스의 백작인 사티니와 블랑카를 결혼시키려한다. 사티니는 귀족인 자신의 가문을 블랑카의 아이에게 물려주는 대신 금전적 이익을 반대급부로 얻는 일에 기꺼이 동의한다. 이러한 결정은 결국 비극으로 이어진다. 블랑카와 테르세로와의 관계를 우연히 알게 된 사티니는 이를 에스테반에게 고자질하고 에스테반은 테르세로를 살해하려하지만 죽이지는 못하고 손가락을 자르는데 그친다. 그 일을 계기로 부녀간의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물론 클라라는 에스테반과 평생 더 이상의 대화를 거부한다. 부당한 결혼 강요가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깨트려버리는 요소가 된다는 걸 일깨워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동성애가 어느 정도 퍼져 있었으며 그걸 죄악시하는 풍조가 만연했다는 점 또한 알 수가 있다. 에스테반은 아내인 클라라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던 누나 페룰라를 은근히 배척하려한다. 그다지 돈독하지 않은 부부사이에 불만을 느끼던 그가 일종의 질투심을 발휘한 것이다. 우연히 두 사람이 한 침대에 있는 것을 발견한 에스테반은 두 사람의 동성애를 의심하고 페룰라를 내쫓아버린다. 페룰라는 이후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다 마침내 고독하게 죽는다. 이러한 사건은 에스테반에게 일정 부분 후회를 안겨주기도 하지만 클라라로부터는 더욱 멀어지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동성애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부부관계의 악화 사이에 모종의 연관성을 개입시켰다는 점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이 소설의 주제를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아마도 화해라는 단어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중요한 인물들 사이는 악연으로 빚어진 복수심으로 얽혀있다. 블랑카를 사랑한 죄로 죽음의 위기에 몰렸다가 손가락을 잃고 쫓겨난 테르세로의 에스테반을 향한 복수, 젊은 시절 하녀인 판차를 강간하는 바람에 그 자손으로 태어났음에도 손자로 인정받지 못한 채 버려지다시피 한 가르시아가 할아버지인 에스테반을 향해 가지는 복수가 그런 것들이다. 이런 복수는 용서와 사랑에 의해 용해된다. 블랑카와 테르세로의 지극한 사랑은 결국 에스테반의 마음을 움직인다. 에스테반은 자신의 지위를 최대한 이용하여 쿠데타 세력을 반대하는 그들을 망명시킴으로서 그들 사이를 인정한다. 또 알바는 체포되어 가르시아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고문과 함께 성폭행을 당하지만 외할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이해와 관용의 미덕을 베풀어 세대를 이어 계속될 수 있는 복수의 고리를 끊는다.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알바의 깨달음이 그걸 설명해준다. ‘내가 복수를 하게 되면 마찬가지로 처절한 복수의 연장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복수 받아 마땅한 사람들 모두에게 복수하기도 어려울 것 같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난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미가 바로 그것이라 확신했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바라는 삶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때문에 책을 덮으면서 매일같이 마치 주문처럼 외던 문장을 나지막이 읊조려본다. 그 어떤 상황 하에서도 남들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시고 항상 관대한 마음을 품게 하여 어떤 일이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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