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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Nov 08. 2023

앞선 자와 뒤따르는 자

 아내와 함께 등산을 한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 우리 둘 모두 산 오르기를 취미로 삼을 만큼 썩 좋아하지 않는 탓이다. 물론 내가 가끔씩 집 근처에 있는 광교산을 찾는 경우는 있었다. 하지만 그건 좋아서라기보다 하루의 운동량을 채우려는 의무감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내 역시 오르막과 내리막을 힘겹게 걷는 행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나와 함께 가는 건 의도적으로 피했다. 옆 사람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은 채 마치 쫓기는 사람처럼 무턱대고 앞만 보고 올라가는 나를 보며 진저리를 치곤했다. 

 그런 아내가 어제 저녁에는 완전히 달라져있었다. 내일은 달리기 대신 등산이나 해볼까? 매일 반복되는 아침달리기의 힘듦과 지루함으로부터 탈피하고자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내가 혼잣말을 내뱉었을 때였다. 이상하게도 아내는 그 말이 마치 자신을 향한 권유이기라도 한 것처럼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 광교산에 가자. 종주는 못해도 헬기장까지만 갔다 오지 뭐. 그건 달리기라면 기겁을 하던 그녀가 최근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2주째 아침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어도 달리기에 열을 올리는 것만큼이나 나를 놀라게 만드는 일이었다. 그 사이 우리에게 달리기라는 공통분모가 생긴 때문일까? 아니면 아내에게도 벌써 달리기에 대한 싫증이 운동에 대한 의무감에 겹쳐서 나타난 것일까?

 등산이든 달리기든 부부가 어떤 활동을 함께 한다는 건 굉장히 긍정적인 현상이다. 더욱이 우리는 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어가는 처지였으니 공통의 관심사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에게 의지가 될 뿐 아니라 삶에 보탬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모처럼 찾아온 호기를 놓치기가 아까웠다. 그래 선뜻 승낙을 한 것이 오늘로 이어진 것이다. 

 등산길 초입에 들어서면서 난 이전의 일을 떠올리며 각별히 유념했다. 더 이상 아내가 나를 허겁지겁 따라오게 만드는 실패사례를 되풀이할 수는 없었다. 아내를 앞세웠다. 그건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아내의 속도에 내가 맞추겠다는 의지의 표명에 다름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뒷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아내는 원치 않았지만 한사코 나는 그걸 관철시켰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아내는 전혀 나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고 난 동행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오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덕분에 산을 오르는 시간이 평소보다 한층 늘어나긴 했지만. 

 아쉬운 점은 있었다. 산을 오르는 도중 아내가 땀을 닦느라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낸 적이 있었는데 그걸 분실한 것이다. 딸아이가 선물한 것이어서 아내는 더욱 안타까워했다. 난 죄책감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앞에 가던 사람이 흘린 물건을 뒤따라가면서 발견하지 못했으니. 자칫하면 또 다른 오명을 덮어쓸지도 모를 위기감마저 느껴졌다. 왠지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착하면서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음이 밝혀졌다. 아내는 손수건에 대한 기억을 깡그리 잊은 듯 아주 밝은 표정이었다. 내게 셀카를 찍자며 핸드폰을 꺼내든 건 그 방증이라 할 수 있었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걸 탐탁찮아했을 뿐 아니라 찍어둔 사진조차 다시 꺼내보는 일이 없다며 사진촬영의 의미를 깎아내리기만 하던 아내였는데. 그뿐이 아니었다. 찍은 사진을 가족대화방에 올려 아이들에게 보여주자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실로 엄청난 변화였다. 계속 의아한 표정을 짓는 나에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대꾸를 하기도 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주 접촉해야 정이 깊어지지 않겠어. 새 식구가 된 며느리도 스스럼없어질 테고.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아이들과의 소통의지가 굳건해진 것만은 틀림없었다. 

 산을 내려올 때였다. 아내는 한술 더 떠 최근 들어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하는 여러 가지 활동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뜻마저 비쳤다. 여행에 달리기, 그리고 등산에 이르기까지 많은 활동을 함께 하고 있으니 비록 두 사람이지만 동아리가 아니냐면서. 우리 두 사람의 이름을 조합해가며 동아리의 이름을 정하는 장난기마저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일일이 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난 절로 흐뭇해졌다. 부부의 진정한 의미란 이런 게 아닐까? 끊임없이 무언가를 함께 하려 노력하는 관계.

 욕심이 생겼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앞으로도 계속 우리 두 사람 사이가 이렇게만 유지되었으면. 어쩌면 그 비법은 오늘 행한 등산에 숨어있는지 모른다. 그걸 찾아내려 몇 번이고 등산의 과정을 되돌려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오늘 달라진 점이라고는 아내와 나의 위치가 바뀐 것뿐이다. 그렇다면 그게 정답이 아닐까? 서로의 위치가 바뀜으로써 상대를 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한 가지를 더한다면 그로 인해 상대를 향한 배려가 필요하다는 인식의 공감. 두 사람 모두 직접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앞선 자와 뒤따르는 자의 입장이 모두 되어봄으로써 각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스스로 깨닫게 되었고 나름 그것들을 베풀어보려 했던 게 아닐는지. 산을 다 내려오자 저 앞 식당의 전광판에서 붉은 색의 광고성 문구가 지나가고 있었다. 내 눈에는 그 글귀가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사자성어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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