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시작은 '신화(神話)'로
언제나 시작은 '신화(神話)'로
- [아서왕(King Arthur) : 전설로 태어난 기사의 수호신], 안 베르텔로트, 채계병 옮김, <시공사>, 2003.
"서(敍)한다.
대저 옛날 성인이 바야흐로 예악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교화를 베풀되 괴력난신(怪力亂神)은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왕이 장차 일어나려고 하면 부명(符命)이 응하고 도록(圖籙)을 받아 반드시 다른 사람과 다름이 있은 연후에야 큰 변화를 하여 대기(大器)를 장악하고 대업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수에서는 도가 나왔고, 낙수에서는 서가 나와 성인이 일어났다. 무지개가 신모를 감싸 복희를 낳았고, 용이 여등과 교감하여 염제를 낳았으며,... 요 임금은 잉태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고, 용이 큰 못에서 교합하여 패공(한고조 유방)을 낳았는데, 이 이후의 일은 어찌 다 기록할 수 있으리오. 그러니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한 가운데서 나온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무엇인가? <기이(紀異)편>을 이 책의 첫머리에 싣는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기록으로서의 '역사', 특히 '정사(正史)'는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다.
지배자들은 자신이 도둑질한 천하가 '안정'되었다고 판단되면 지난 역사를 정리하였다. 자신들의 권력이 '정당하다'는 증명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이 '정사'는 제왕의 기록'인 <본기(本紀)>와 제후 또는 영웅들의 기록으로서 <열전(列傳)>을 엮어서 펼치는 '기전체(紀傳體)'가 이 '정식 역사'의 서술방법이었다.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역사가 사마천이 처음 시도한 [사기(史記)]의 '기전체'는 비록 그 당시에는 '정사'가 아니었으나 이후 여러 왕조를 거쳐 '정사'의 기술방식이 되었다.
13세기 고려시대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를 썼는데, 우리 역사에서 '정사(正史)'에 대비되는 '야사(野史)'의 대표작이다. 고려 당대 최고의 승려인 '국존'으로서 일연은 1289년 입적 전까지 경북 군위 인각사에서 100여 편의 책을 지었다는데 [삼국유사]는 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일연은 한세기 전 '정사'인 김부식의 [삼국사기] 부류의 역사서들이 담지 않는 불교적, 향토적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는데 주된 내용은 삼국시대 불교의 전파와 대표적인 승려들에 의한 '흥법(興法)', 탑과 불상 등에 대한 이야기, 지역의 기릴만한 이야기들이다. 후세대인 우리에게는 '단군설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족보'를 정리한 사서로 알려져 있다.
사마천이 중국의 열국들의 시조로서 '삼황오제'의 거대한 족보를 완성했듯, 일연은 한반도와 요동의 자손들을 '단군왕검'의 자식들로 '족보화'하였다.
일연이 <본기> 같은 '정사'가 아니라 <기이(紀異)편>으로 [삼국유사]를 시작한 이유다.
아마도 일연이 가장 비판하고 싶었을 한세기전 유생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고구려 등의 시조는 다들 '괴력난신(怪力亂神)'들이었다. 신라의 박혁거세나 고구려 동명성왕 고주몽도 정체불명의 알에서 태어났고 백제의 온조도 고주몽의 아들이니 보통사람과 다른 '신의 자식들'이었다. 이제 일연은 우리 고조선을 세운 단군왕검을 천신인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웅녀의 아들로 확정한다.
구전되는 설화와 민담, 혹은 그 당시까지 있었을 기록을 토대로 구축한 '신화(神話)'다.
아마도 '신의 아들(천자)'을 자칭하는 환웅이 나타나 호랑이를 숭상하는 씨족은 몰살시키고 곰을 숭상하는 씨족과 결합하여 '고조선'을 세웠으리라.
[삼국유사]의 관점은 고려시대에 우리 한반도 또는 요동까지 하나의 '역사공동체'로 인식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짧지만 말갈족까지 아우르는 발해국에 대한 기록도 포함한다.
"그는 해안으로 내려가 허리띠 검집에서 검을 뺐다. 그는 오랫동안 검을 유심히 보다가는 마침내 '아! 훌륭하고 고귀한 검... 이 시대 가장 훌륭한 검인 엑스칼리버여! 이제 너는 주인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고 나서 아서왕은 그리플레를 불렀다. '저기 언덕 밑으로 가거라.' 왕은 명령했다. '그곳에 가면 호수가 있을 것이다. 내 검을 호수에 던져라.'...
그리플레는 더 이상 왕의 명을 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검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유심히 살펴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는 될 수 있는 한 호수의 가장 깊은 곳으로 검을 던졌다. 검이 물에 닿는 순간 그리플레는 주인을 알 수 없는 손이 물에서 팔굽까지 보이도록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그 손은 검을 움켜쥐고는 하늘을 향해 서너번 흔들기 시작했다. 그 손은 검을 쥔 채로 물속으로 사라졌다."
- 토머스 맬러리, [아서의 죽음], 15세기
고려시대 [삼국사기]가 출간된 12세기 영국에서는 헨리2세가 즉위한다. 십자군전쟁기 유럽 프랑크족 '대장'인 프랑스 카페왕조(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에 대항한 영국의 앙주왕조 출신인 그는 소수 노르만족 계통으로 라틴계통의 다수의 '브리튼'들 사이에서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다. 노르만족과 브리튼의 연대로 영국내 게르만족 일파인 색슨족에 대항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필요에 의해 12세기의 헨리2세는 5세기의 '아서왕(King Arthur)'을 소환한다. 마치 우리 고려 12세기의 김부식에게 1~7세기 '삼국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아서왕이 고대 켈트족이었든 근거지 '캐멀럿성'이 어디였든, 영국 불가사의 '스톤헨지'가 마법사 멀린의 작품이든 외계인의 소행이든, 아서왕은 영국내 노르만족 왕조의 '정통성'을 위해 명검 엑스칼리버를 들고 전설의 기사들과 함께 등장한다. 물론 지배이데올로기는 기독교 교리이며 그가 처단하는 색슨족은 '이교도'들이다. 카페왕조의 '프랑크인'들이 중근동에서 '이교도' '사라센인'들과 대적하듯, 영국의 헨리2세는 영국의 '샤를마뉴'인 아서왕의 '신화(神話)'로써 '이교도' 색슨족에 대적한다.
기독교 신화에서 '신의 아들'은 하나일테니 아서왕은 '신의 자식'은 아니다. 알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다. 우터 펜드라곤이라는 전설의 왕이 마법사 멀린의 도움으로 콘월 공작의 부인과 관계하여 낳은 아들이다. 다른 부모 아래 기사수업을 받던 아서(Arthur)는 돌에 박힌 검을 뽑아 왕국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이는 귀족들의 반발을 무마하고 후계자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작업의 성격이 짙다. 실제 아서의 명검 엑스칼리버는 바위에서 뽑은 그 검이 아니라 호수의 여신 비비안이 주었다고 한다.
다소 어색하지만, 5세기의 '기독교'적 영웅 아서는 영국민족의 통합을 위해 분투했고 각지의 전설적 기사들을 원탁으로 모은다. 호수의 기사 랜슬롯과 녹색기사 거웨인, 성배찾은 갤러해드, 퍼시벌, 아서를 배신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아들 모드레드 등. 그러나 '원탁의 기사'에 둘러싸인 아서왕은 예전의 그가 아니었고 '평화' 시대에 사냥과 시합에 열중하던 그가 가진 건 결국 '원탁' 뿐이었으며 '근친상간'으로 얻은 아들 모드레드와의 마지막 결전 후 아들과 함께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영국의 다수 민족 '브리튼'들은 이 아서와 호수에 버려진 엑스칼리버가 죽지 않고 '구세주'처럼 다시 부활한다고 믿었다는데, 이 '구세주(그리스도/메시아)' 아서는 헨리2세 정권의 정통성을 선전하는 이데올로기로서 딱 맞는 소재였다.
이렇게 정권의 안정을 위해 소환되고 조작된 '영웅설화'는 봉건체제의 반영으로서 힘없는 아서의 '원탁'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뜬금없는 '성배(聖杯:The Holy Grail)'의 등장으로 애초 계획에는 없던 수많은 이야기와 전설들을 양산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영문학에서는 아마도 15세기 작가 토머스 맬러리(Thomas Malory)의 [아서의 죽음]이 최초로 집대성된 이야기일 것이다.
"옛날 열국에서도 또한 각기 사관을 두어 사실을 기록하였으므로 맹자가 말하기를, '진나라의 [승], 초나라의 [도올], 노나라의 [춘추]가 그 한가지다.' 하였습니다. 이 해동의 3국도 역사가 오래 되어 마땅히 그 사실을 서책에 기록해야 될 것이므로, 이에 노신으로 하여금 편집하도록 하셨으나 스스로 돌아보건대 부족됨이 많아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지금의 학사대부들이 오경과 제자의 글이나 진한 역대의 사(史)에 대하여, 혹은 널리 통하여 상세히 말하는 사람이 있으나, 우리 나라 사실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망연하여 그 처음과 끝을 모르니 심히 탄식할 일이다.'...
신은 본래 재주가 없고 또 깊은 학식도 없으며, 노년에 이르러 날로 혼몽을 더하여 비록 부지런히 독서를 한다 해도 책만 덮으면 곧 잊어버리고, 붓을 잡아도 힘이 없어 종이를 대하면 써내려가기가 어렵습니다... 삼가 <본기> 28권, <연표> 3권, <지> 9권, <열전> 10권을 편찬하여 표와 함께 올립니다. 위로 천람을 입게 되니 부끄러워 땀이 나고 황송함이 이를 길 없습니다."
- [삼국사기(三國史記)], <올리는 글>, 김부식, 1145.
'정사'를 편찬한 학자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을 것이며, 고려 인종대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하기도 한 당대 최고의 관료이기도 했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의 창업이 정당한 '하늘의 순리'임을 지난 삼국의 역사를 통해 입증해야만 했는데, '역작'을 올리면서도 전전긍긍한다. 실제로 '정사'를 편찬한 대학자들은 당시 군주에게 '올리는 글'에서 진땀을 흘리며 죽을 죄를 지었다고 땅에 코를 연신 박고 있다.
'정사'의 한계란 그 내용의 치밀함은 둘째로 하고 이 <서문>에서 정체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기전체'의 창시자, 사마천이 [사기]를 펴내면서 "과연 하늘의 도는 있는가?"라고 던지는 탄식에 어찌 비하겠는가?
언제나 시작은 '신화(神話)'라는 '이데올로기'로 기술되던 '정사(正史)'의 시대는 오래전에 종말을 고했으나, 소수 지배자들은 언제가 되었든 역사를 '사유화'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한편으로, '정사'로서의 '기전체'는 지배권력의 '정당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용되어 왔으나, 원래 '기전체'는 <본기>의 날줄과 <열전>의 씨줄이 교차하면서 침묵 속에 드러나는 사실의 모순과 그로 인한 맥락의 서사가 참된 묘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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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서왕(King Arthur) - 전설로 태어난 기사의 수호신], 안 베르텔로트, 채계병 옮김, <시공사>, 2003.
2.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3.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