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도, ‘성군(聖君)’도 되지 못한 주원장(朱元璋)
'희망’도, ‘성군(聖君)’도 되지 못한 주원장(朱元璋)
-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지주계급의 농민에 대한 잔혹한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압박은, 농민들을 여러 차례 봉기하도록 하여 지주계급의 통치에 반항하도록 만들었다. 진나라의 진승, 오광, 항우, 유방으로부터 한나라의 신시, 평림, 적미, 동마, 황건, 수나라의 이밀과 두건덕, 당나라의 왕선지와 황소, 송나라의 송강과 방랍, 원나라의 주원장, 명나라의 이자성을 거쳐 청나라의 태평천국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수백 번의 봉기는 모두 농민의 반항운동으로서 농민 혁명전쟁이었다… 중국봉건사회에서 오직 이러한 농민의 계급투쟁, 농민봉기, 농민전쟁만이 역사발전의 진정한 동력이었다. 매번 비교적 큰 농민봉기와 농민전쟁의 결과로 그 무렵의 봉건통치에 타격을 가하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사회생산력의 발전을 어느 정도 밀고 나아갔다."
- [모택동선집], <중국혁명화중국공산당>, [주원장전] 제6장 주석 발췌.
중국 역사에서 기층 농민 또는 무산계급 출신의 황제는 단 두 명이었다. 하나는 기원전의 한(漢)나라를 세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고, 또 하나는 14세기에 명(明)나라를 건국한 명태조(明太祖) 주원장(朱元璋)이었다.
한족(漢族) 중심의 전통적인 ‘중화(中華)사상’으로 보면, 유방의 초한전쟁은 중국 최초 통일 국가였던 진(秦)나라의 분열 후 재통일을 위한 ‘내전’이었던 반면, 주원장의 ‘반원(反元)’ 전쟁은 외세에 대항한 ‘민족해방전쟁’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아시아 역사 장악을 위한 중국의 각 ‘공정’을 토대로 보면, 주원장의 투쟁도 그냥 단순한 권력교체 단계에 불과하겠다.
아무튼, 찢어지게 가난하여 굶어죽지 않기 위해 행각승(行脚僧)도 되었다가 도적떼의 행동대장으로 반란 투쟁을 시작한 주원장은 당시의 기본계급인 농민 출신으로서 한 국가를 건국했고, 중국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가혹한 독재정치를 실시한 군주로 기억된다. 영웅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불세출의 영웅이요, 반란과 혁명으로 점철된 중국 역사의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원(元)나라 말기, 농민반란군인 홍건군(紅巾軍)의 창설자 팽형옥(彭瑩玉)은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와(彌勒佛下生)’ 세상을 구원한다는 교리로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이 종교집단은 ‘백련교도’와 같이 ‘미륵불(彌勒佛)’ 또는 ‘명왕(明王)’을 믿는데, 바로 ‘명교(明敎)’로서, 이는 당나라 시기 페르시아인 ‘마니’가 기독교와 조로아스터교, 불교를 혼합하여 창시한 ‘마니교’를 그 연원으로 하며. 결국 ‘명왕’에 의해 세상이 구원된다는 점에서 ‘미륵불’ 신앙과 비슷하다.
‘명왕’은 밝음과 어둠으로 나뉜 세상에서 어둠을 대표하는 ‘암왕(暗王)’을 타도하고 밝은 세상을 여는 자로서, 이 농민반란군 세력을 기본토대로 하여 국가를 세운 주원장이 국호를 대명(大明) 또는 명(明)으로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부패한 원나라의 ‘암왕’을 타도하고 ‘밝은(明)’ 세상을 열었다는 것이다.
저자 오함은 반원 투쟁의 출발점이자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이 ‘명교’ 자체가 한계를 지니고 있다고 하였는데, ‘명교’의 주요 교리는 ‘이종삼제(二宗三際)’이며,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세상에는 명과 암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나아가 오함은 ‘명교’적 반란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그렇지만 명교도가 주장하는 최후의 목표는 명암이 각기 제자리로 돌아가 서로 침범하지 않는 것인데, 암흑의 세력은 투쟁을 거친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농민에 대한 착취, 압박, 사역의 제도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도사상도 절충, 타협적이고 중도에 포기하는 식이었을 뿐 아니라, 기껏 피 흘리며 희생한 결과가 여전히 지주의 농민에 대한 통치, 한 계급의 다른 계급에 대한 압박이었다. 따라서 혁명을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해 철저하고 완전한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 역사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모든 봉기는 한결같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원장은 호주(濠州)의 곽자흥이라는 반란군의 휘하로 들어가서 후에 명태조의 황후가 되는 곽자흥의 양녀 마씨와의 혼인을 통해 그의 사위이자 신임받는 부하가 되는데, 곽자흥의 사후 그 세력을 장악하고 남경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오(吳)국공이 되었다가 서수휘, 장사성, 진우량 등의 각지 반란군 우두머리들을 무찌르면서 반원세력의 우두머리, 오왕이 된다.
주원장의 반원 투쟁은 두 단계의 국면이 있는데, 전반기는 홍건군 계열의 반란조직을 통합하는 과정이며, 후반기는 비홍건군 계열인 중소상인, 지주계급 등을 통합하는 과정이다. 전반기는 농민계층을 기반으로 한 ‘계급투쟁’의 성격이 강한 반면, 후반기는 유기(劉基), 송렴(宋濂) 등의 유교적 한족주의자 등의 적극적 기용을 통한 ‘민족해방투쟁’의 성격이 강했던 단계이다.
결과론적으로 주원장은 원나라 몽골 민족을 몰아내고 한족의 중국을 되찾지만, 이 과정에서 그가 선택했던 전략은 역사를 전진시켰던 기본 농민혁명 계급을 배반하고 지주들의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세력을 포장하여 반원 세력을 규합하는 것이었다.
오함은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주원장은 농민봉기로 기반을 세웠다. 바로 이 농민 혁명투쟁의 위대한 힘이 그를 승리로 이끌어 주었는데, (지주계급을 적극 기용한 이후) ‘천명론(天命論)’으로 꾸미면서 이와 같은 위대한 힘은 단번에 말살되고 말았다. 인민 군중의 힘과 함께 사회의 전진을 추동하는 혁명투쟁의 힘은 잘려 나가버리고, 혁명이 성공한 원인은 오직 주원장이 천명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홍군 봉기는 선명한 계급투쟁으로서 몽한(몽골족,한족)지주계급의 연합통치를 뒤엎고자 하였고, 낡은 봉건질서를 깨뜨리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북벌을 선전하는) 격문에는 정반대로 ‘기강을 세워’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기강은 봉건질서의 기강으로서 곧 ‘세상을 다스리는 규율’이다. 격문에는 봉건지주계급의 기강을 되찾는다는 목표를 명확히 제시하였으며, 얼마 전 장사성을 토벌하는 격문에서 소극적으로 홍군을 견책하고 홍군을 배반하였던 데서 또 한 걸음 나아간 것이었다.”
- [주원장전(朱元璋傳)], 오함, 1949.
즉, 주원장이 권력을 향해 다가가는 과정은 기본계급을 배반하고 지주계급의 이익과 그 이데올로기를 옹호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결국, 명나라를 건국한 태조이자 홍무제(洪武帝)로 불리는 주원장은 지주, 관료계급으로부터 왕권을 지켜내기 위해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중국사에서 유래없는 혹독한 독재체제를 구축한다. 명나라 대부분 관료들은 임기가 짧았으며, 봉급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고 하는데, 동시에 명나라 ‘주씨 황제가 나타난 이래 10년에 9년은 흉년이었다’는 등 민중의 생활도 피폐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독재군주 주원장은 왕위세습 조차 자기 뜻대로 하지 못한 채 자신의 아들과 손자의 권력쟁투를 촉발시켰으며, 명나라는 그 쟁투에서 승리한 주원장의 아들이자 명나라 성조인 3대 영락제 시기 이후 후금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조금씩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물론, 당시는 봉건적 사회발전 단계였으므로 계급타파를 통한 농민권력을 기획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회적 한계가 명확하다. 그러나, 당파성을 배반한 결과 또한 명확한 것이다.
주원장은 기본계급을 배반함으로써 ‘민중의 희망’도 될 수 없었지만, 지주계급의 사상을 옹호했음에도 끝내 '성군(聖君)'도 되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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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