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의 '맹자'이자 '트로츠키', 정.도.전 !
한반도의 '맹자'이자 '트로츠키', 정도전!
-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민심을 얻으면 민은 군주에게 복종하지만,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은 군주를 버린다."
- 삼봉 정도전, [조선경국전], 1394.
맹자는 위나라 양혜왕에게 "'인'을 해친 자를 '적'이라 부르고 '의'를 해친 자를 '잔'이라 부른다. '잔적'은 일개 필부에 불과하니 (은나라)주왕이라는 일개 필부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뿐 군주가 시해되었다는 말을 들어보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이는 아시아 정치사상사에서 최초로 '민본주의' 또는 현재의 '민주주의'를 설파한 아마도 최초의 기록일 것인데, 조선건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신생국 조선의 '제헌법전'격인 [조선경국전]에서 위와 같이 쓴 명제의 기원이기도 하다.
'혁명'을 버린 이 시대에 정도전의 소환은 즉, 역사에서 '혁명의 정당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선건국이 봉건체제의 일대유신을 도모한 혁명적사건이라는 주장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파쟁과 정체로 상징되는 조선사에 그 같은 격동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기자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그 길로 나는 서점과 도서관을 뒤지며 정도전을 취재하기 시작하였다... 그(정도전)는 그가 살았던 시대 이상이요, 그가 세운 나라 이상이었다. 고조선 이래 수천년간 이어 내려온 귀족중심체제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기도한 모반자이자, 이미 6백년전에 군주제의 한계를 인식하고 재상 중심의 정치를 실현한 합리주의자였으며, 열강들 사이의 일시적 권력공백을 파고들어 만주 수복을 도모한 야심만만한 국제전략가였다. 선비인가 하면 정략가였고, 유교이론가인가 하면 군사전략가였다. 수학과 의학, 불교에 두루 밝았고, 직접 악기를 제작할 줄도 알았다. 조선의 문물제도, 경복궁과 태평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의 기본설계, 4대문과 4소문,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건국의 공으로 치더라도 단연 으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시대 내내 만고역적의대명사였으니, 역사를 주재하는 신은 그에게 너무 각박했던 게 아닐까. 나의 귀에는 6백년간 '역적'으로 낙인찍혀 사료 창고 속에 처박혀 있던 정도전이 자신의 진실을 알아달라고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 [정도전을 위한 변명], <머리말 - 의로운 자는 왜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져야 하는가>, 조유식, 1997.
21세기 들어서야 '역사 재조명'을 통해 소설이나 대하드라마 등을 통해 익히 알게 된 내용이겠으나, 20세기 후반까지도 우리 역사에서 '정.도.전'이라는 이름은 태봉국의 궁예나 조선후기 허균 등과 같이 일반인들에게 '진실되게'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1997년 당시 <월간 말>지 기자였던 현재 알라딘문고 대표 조유식 선생이 1990년대 초 어느 젊은 정치인으로부터 "정도전을 파보라"는 권유를 받고 '서점과 도서관을 뒤지며' 취재하고 [정도전을 위한 변명](1997)을 발간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대중에게 정도전이라는 인물은 아예 관심이 없거나 '역적'에 불과했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정안군 이방원은 훗날 태종이 되기 위한 1398년 '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최후의 정적 정도전의 목을 베고는, [태조실록]에 기록하기를 "옛날에도 정안공이 정몽주를 죽여 나를 살려주었으니 이번에도 한 번만 더 살려주시오"라면서 정도전이 이방원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고 했다.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 아니라 정도전, 남은 등의 '거사일'에 그들의 난을 진압한 것이 '2차 왕자의 난'이라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거사일'에 '반란수괴 정도전'은 동지 남은의 첩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발각되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고 이후 반세기 동안 '만고 역적'이 되었다.
알다시피 '승자의 기록'으로서의 역사인 것이다.
물론, 역사학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겠으나 대중에게 '혁명가 정.도.전'을 알린 최초의 책이 바로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이며, 그 덕분에 삼봉 정도전은 우리 역사에서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되었다.
"아득한 세월에 한 그루 소나무
푸른산 몇 만겹 속에 자랐구나
잘 있으시오 훗날 서로 뵐 수 있으리까
인간세상이란 잠깐 사이에 묵은 자취인 것을"
- [용비어천가] 중,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대면
위 시는 정도전을 '조선의 역적'이라 규정한 이방원의 [태조실록]을 그대로 인용한 [용비어천가]에서 정도전과 이성계의 첫 만남 중에 정도전이 이성계의 함흥군영 소나무에 남긴 시다.
고려말 유학자 목은 이색의 문하생 중 개혁적 신진사대부 2기였을 동기들 모임 '동심회'를 결성하고 그 중 가장 따르던 선배 정몽주의 주선으로 당대 최고의 무력을 자랑하던 '변방 장수' 이성계를 처음 만났던 1383년의 기록인데 이 만남으로부터 '역성혁명'의 서막이 열린다.
원래도 타협을 모르는 강직한 성품이었겠지만 어머니가 서얼 출신이라 고위관직에 오르지 못했던 정도전은 원나라 사신 접대 거부 사건으로 친원파 이인임에 의해 정몽주와 함께 유배를 당했다. 정몽주가 유배에서 풀려나 다시 출사할 때도 정도전은 신분의 한계로 계속 낭인 생활을 이어가는데 나주 유배생활부터 삼각산 '삼봉재'에서의 교육자생활, 정적의 핍박으로 부평과 김포까지 쫓겨다니는 고난의 여정을 통해 '민본주의'를 체득한다. 부패한 불교에 대항하여 도덕정치, 군자정치, 이상사회를 기획한 급진사상으로서의 당시 성리학이라는 이념에 고난한 민중의 삶을 통한 공자의 '애민 정신', 맹자의 '여민 정신'을 현실적으로 접목시키는 과정에서 중앙정치로부터 소외된 '변방 장수' 이성계의 무력까지 결합하여 '역성혁명'은 드디어 본막에 진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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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사건으로서의 '조선건국'과 '역성혁명'은 잘 아는 내용일테니, '사상혁명'으로서의 조선건국을 보면, 단연 [맹자]가 보인다.
부패한 불교가 지배이념인 고려말에 이미 신진사대부 정몽주와 정도전은 유교의 예법인 부모 '삼년상'을 '선구적'으로 지킨 인물들이었는데, 정도전은 그 삼년상 시기에 정몽주로부터 받은 [맹자]를 하루에 한 두 장만 읽을 정도로 정독하고 연구했다. '민중을 사랑하라(애민 정신)'고 했던 공자를 넘어 '민중과 함께하라(여민 정신)'고 말하며 '민심을 얻지 못하면 민중은 군주를 버린다(역성 혁명)'고 주장하는 맹자의 '혁명론'이 정도전의 실천적 이념이 되었고 그는 죽는 날까지 그 뜻을 꺾지 않았고 타협하지 않았다.
현대적 토지공개념 제도인 '계민수전(인구수에 따라 토지분배)'의 토지개혁을 경제적 토대로 하고, 군주제의 한계를 넘어 이상사회 구현의 중심인 재상과 사대부들이 체계적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정치체제로 조선의 기초를 닦으려 했던 정도전의 '혁명'은 '왕권강화 쿠데타'를 획책하던 이방원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역사는 '이익과 실리'를 앞세워 승리한 소인배들이 '인의'를 꿈꾸는 의로운 군자들을 역사로부터 지웠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승자의 역사'가 아니라 다수 민중을 사랑하고(공자의 '인(仁)'), 모두 함께 살아가고자 했던(맹자의 '의(義)') 의로운 '패자(敗者)들의 역사'라는 사실을, 한반도의 '맹자'이자 '트로츠키'인 정도전의 부활을 통해 재차 각인하며, 무려 23년전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에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현실에서는 비록 패배하였으나, 역사에서는 결국 승리한 '혁명가' 정도전을 닮은 소비에트 '영구혁명가' 트로츠키는 정도전이 죽은 6세기 후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장 강력한 서기장(스탈린)의 복수보다 '역사의 복수'가 더 무섭다."
- 레온 트로츠키, [역사의 복수](앨릭스 캘리니코스)
(2020년 3월 7일)
* 추천도서 :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가장 추천하는 책이며, 소설형식으로는 김탁환의 [혁명 1,2]도 적극 추천합니다~ ^^*
1.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2. [혁명 1,2], 김탁환, <민음사>, 2014.
3. [역사의 쓸모], 최태성, <다산북스>, 2019.
4. [역사의 복수], 앨릭스 캘리니코스, <백의>, 1993.
5. [부자의 길, 이성계와 이방원], 이덕일, <옥당>, 2014.
6. [조선왕조실록 - 1 : 태조], 이덕일, <다산초당>,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