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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Mar 14. 2020

[자본론을 읽는다](1966) - 루이 알튀세르

[자본]의 '철학적 독해'에 관한 노트

[자본]의 '철학적 독해'에 관한 노트 (1998.2.)

- [자본론을 읽는다](1966), 루이 알튀세르,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L. Althusser,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1, ‘대상(對象)’이라는 문제
 
인식과 관련된 존재론의 보편적 범주.
‘주체’와 ‘객체’로서 그 구성요소가 기본적으로 분화되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토대를 전제했을 때, 우리가 접하게 되는 개념들 중 하나가 바로 ‘대상’이라는 개념일 것이다. 위의 기본적 전제 하에서 인식의 행위를 하는 인간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의 ‘주체’적 요소가 되는 반면, 그러한 행위 이전에 이미 존재를 이루고 있는 인간 이외의 세계요소는 ‘객체’가 된다. 이런 인식론적 관계에서 후자, 즉 ‘객체’적 세계는 인식적 측면에서 다름 아닌 ‘대상’이다. 한마디로 말해, 인식론의 기본적 범주에서 ‘객체’는 철학적으로 그 성격을 부여받기 이전에 이미 ‘대상’으로서의 자기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좀더 명확하게 이야기해보자. 인식론이라는 이론적 분파는 흔히 철학이라는 이론적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즉, 인간의 인식과 인식론의 관계, 현실행위와 이론 사이의 관계가 그것이다. ‘인식’이라는 것, 그 행위 자체는 ‘인식’의 ‘이론’과 다르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당연한 말이지만 ‘인식’이라는 행위가 ‘인식론’의 이론적 출발 이전에 이미 인간생활 속에서 존재하고 있어 왔다는 사실은 그 누구도-의식적이든 자생적이든 만약 그가 유물론자라면- 부인할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떤 개별적 행위나 현상들이 쌓이고 쌓이면서 ‘보편성’을 향한 그 나름의 내적인 요구에 의해 그것들의 이론을 형성하듯이, 무의식적이고 무언적인 그러한 인간 인식의 행위들 또한 위와 같이 계속 누적되고, 또 그것이 역사라는 끝없는 지평 위에서 보편성을 획득하려는 그 자체의 요구에 당면하면서 비로소 탄생하게 된 역사적 산물이 다름아닌 ‘인식론’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론’의 발생, 그 역사적 경위를 본다면 그 뿌리는 바로 철학에 닿아있음을 알 수 있다. 삭막한 물질세계에서 첫울음을 터뜨렸던 인간. ‘목구멍이 포도청’이기에 살기 위해서 자신을 낳아준 물질적 자연과 치열하게 싸울 수밖에 없었고 그런 기본적 욕구로부터 노동을 배워나간 인간. 그 과정 속에서 보다 나은 노동력의 진보를 이루기 위해, 그 자체 노동의 필요로 인해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과 사유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그냥 그때그때 잊혀지고 마는 단순한 형태로서의 그것이 아니라 마치 생식의 본능과도 같이 다음 세대에게까지 이어질 수 있는, 그런 인식과 사유를. 그러기 위해서는 각기 행위들의 개별성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필요했을 테고, 그 필요에 의해 보편성을 지향하는 ‘이론’이라는 것은 비로소 인간역사의 발전 속에서 그 자신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역사 초기에, 당시의 역사적 한계로 말미암아 각기 세분화된 영역을 가지지 못했던 과학적 지식들은, 그리고 여타 ‘이론’들은 단지 ‘철학’의 동일 개념일 뿐이었다. 기원적으로, ‘이론'은 ‘과학’에 다름 아니었으며 ‘철학’ 그 자체였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넓어지고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각기 이론들도 세부영역을 점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인간은 과학1)과 철학을 동일시할 수 없게 되었다. 각각의 세분화된 과학은 고대의 철학자들-당시에는 과학자이기도 했던-이 그랬던 것처럼 그냥 뭉뚱그린 ‘세계’라는 것을 자신의 ‘대상’으로 삼는 데 그칠 수 없게 되었으며 이제 그 나름대로의 ‘대상’들을 갖게 되었다. 역사의 흐름에 따라 과학과 이론의 세분화와 함께 ‘대상’도 세분화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은 각각의 이론적, 실천적, 실험적 활동을 통해 자신의 ‘대상’으로부터 이론적 지식들을 생산해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으로 인해 이제 철학은, 아주 오래 전에는 이론으로서의 과학의 모체가 되었으며 그것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인식되었던 철학은, 하나의 뭉뚱그려진 ‘세계’라는 막연한 자신의 ‘대상’을 갈가리 찢어진 형태로서 과학에게 넘긴 채 과학의 꽁무니만 쫓아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2)
“지혜3)의 여신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왜 밤에만 날아다니는가”라는 일견 식자연해 보이는 의문은 엄밀히 말해 “미네르바의 새가 왜 밤에만 날아다니는 올빼미일 수밖에 없는가”하는 의문으로 정정되어야 할 것인데, 아무튼 이 물음은 바로 과학의 발전과, 그것이 철학과 분리되는 역사, 세계라는 객체적 범주가 세분화된 형태로서 철학의 ‘대상’으로부터 과학의 ‘대상’으로 넘어가는 바로 그 역사 속에서 풀릴 수 있다. 우리가 지금 세분화된 학문으로서 과학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그 개념으로서의 과학이 태동하게 된 근대에 이미 철학자 헤겔은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철학은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은유적 명제로 표현했다. 즉, 수많은 가지를 이루고 있는 각각의 과학이 그 자신의 지식을 생산해내는 것이고, 철학은 그 조건 아래에서만이 진정 자신의 ‘대상’을 가질 수 있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과학과 철학의 관계에 대한 위와 같은 역사적 인식은 진정한 철학이 왜 유물론일 수밖에 없는가, 라는 철학적 근본문제의 해결에 좋은 증거로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철학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던 관념적 전통과는 달리, 전혀 새로운 위치에서, 전혀 ‘새로운 실천’4)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어 버린다.
여기 하나의 함축적 문장이 있다.
 
"간단히 말해 철학은 분열한다는 냉혹하고도 기본적인 사실에 관한 의식이다. 과학이 하나로 된다면 철학은 분열한다.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철학적 꼬뮈니까씨옹(communication)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 L. Althsser, [레닌과 철학], 1968.


역사적으로 볼 때 과학은 그 자체의 세분화와 더불어 갖가지 혁명적인 모습들을 거쳤다. 즉, 토마스 쿤의 이론처럼 새로운 패러다임에 의해 전통적인 그것이 폐기됨으로써 결국에는 ‘진실적인’ 이론만이 남게 되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알튀세르에 의하면 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즉, 과학이 그 자신의 ‘대상’에 대한 진리를 향해 ‘하나로’ 나아간다면, 철학은 그 과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여러 가지 경향의 테제들을 생산하는데 이 과정은 철학의 근본문제인 관념론과 유물론으로의 ‘분열’을 조장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철학의 근본문제인 관념론적 경향과 유물론적 경향. 일찍이 엥겔스에 의해 정식화되었던 이 근본문제5) 속에서 양자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은 어느 시기에 한 경향이 우위를 점하였다고 하여 그 반대 경향이 역사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은 역사 속에서 이 근본문제적 갈등을 무수히 반복하기만 할 뿐이다.6) 따라서 철학의 전장에서 경향성과 관련하여 근본문제에 대한 투쟁은 영속적이다.
과히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철학적 토론은 없다"라는 명제에 관해서는 역시 과학과의 관계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는 바, 즉 역사적으로 철학과 인간 사상에 영향을, 그것도 아주 혁명적인 영향을 끼친 과학적 ‘대륙’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의 대륙’과 중세말기의 ‘물리학의 대륙’, 그리고 근대말기의 ‘역사의 대륙’이라는 세 가지이다. 탈레스로부터 시작한 첫 번째 시기에는 플라톤에 이르러 그 철학적 정점을 이루었고 갈릴레오로부터 시작한 두 번째 시기에는 철학적으로는 데카르트로서 대표된다고 할 수 있다. 한정된 시기 내에서 과학이 철학에-구체적으로 말해 철학적 경향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과학적인 철학적 경향은… 유물론밖에 없지 않은가- 끼치는 영향은 대략 그 즈음에서 그친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이후에 특정 ‘대륙’ 사이의 일정한 시기에 벌어지는 ‘철학적 꼬뮈니까씨옹’이라든가 ‘철학적 토론’은 예의 근본적인 경향들의 지리하고도 ‘무의미한’7) ‘세력다툼’을 반복한다. 이후의 철학적 “재탄생을 야기하는”8) 과학적 대륙이 나타나기 전까지.
이런 양상을 볼 때, 헤겔의 ‘철학은 황혼 녘에 날개를 편다’라는 명제는 옳다. 또한 이런 입장에서 본다면, 관념론자인 데카르트가 그 역사적 의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그 과학성(유물론적인)일 뿐인 것이다. 그러나 그 ‘의의’는 근대 말에 이르러 마르크스가 ‘역사의 대륙’을 발견하게 됨으로써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마친다. 이제 역사는 역사철학이나 사회철학이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하나의 과학이 되었고-그럼으로 인해 역사적유물론은 정당하다-, “황혼 녘에 날개를 펴는” 철학은 변증법적유물론, 유물변증법으로서 정식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더 이상 ‘무의미한’ 토론은 역사적 의미 또한 잃었다. 남은 건 주지되어 온 것처럼 ‘새롭게 만들어진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9)이자 정치적 계급투쟁에 있어 과학적 ‘심급’을 유지시켜주는 하나의 ‘개입으로서의’ 정치가 되었다.10)
여기까지가 과학과 철학과의 관계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의 대개이다.
 
철학은 다른 과학들처럼 그 나름대로의 ‘대상’을 지니고 있지 않다. 철학적 대상은 다른 과학들의 ‘대상’을 통해 생산된 과학적 지식들을 기초로 행해지는 이론적 작업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철학의 ‘대상’은 따로 존재할 수 없으며, 과학적 지식의 발견과 발전에 힘입어 우리가 지금 흔히 볼 수 있게 된 ‘~학’, ‘~론’ 등속의 것들이 모두 다름아닌 철학의 ‘대상’인 것이다.
철학의 ‘대상’은 바로 과학의 ‘대상적 지식’이다
 
2, 철학적 대상, 혹은 그것의 혁명적 전화(轉化)
 
어떤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독해’가 필요한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즉, 그 텍스트가 전통적으로 ‘표방’해왔던 특정 과학의 입장에서만 읽혀진다면 그것은 진정한 역사 위에 올라설 수가 없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과학으로서의 역사이다.
반면, 특정 과학의 틀 속에서만 이해된 텍스트는 관념의 나열, 혹은 기껏해야 사건들의 단순한 열거로서의 역사 이상은 될 수 없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 그 자체로 과학으로서의 역사는 그 내부로부터의 혁명적 전화를 통해서만이 실로 제 위치를 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보의 역사가 출발하게 되는 지점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또한 하나의 과학적 텍스트로 알려져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이론적 원천11) 중 하나인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이라는 하나의 ‘과학’으로부터 출발하며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일반을 경제학적으로 분석한 저서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본]은 ‘경제학’이라는 특정 ‘과학’의 눈으로 읽어서만은 안되는 이론서이다. 만약 기존 경제학의 분석틀로 해석을 한다면 [자본]에서 마르크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계급투쟁으로서의 현실 사회구성체를 진정한 ‘대상’으로서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영국의 고전파 경제학이라는 과학적 학문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한 사상적 원천이라고는 하나, 마르크스 자신은 [자본]을 비롯한 그의 저서 속의 어느 한 문장에서조차도 고전파 경제학을 ‘경제학’적으로 해석하고 있지 않다. 즉, 모든 개인이 ‘공정한 룰’에 의해서 자유로운 경제활동을 한다는 이론적 전제를 하고 있는 아담 스미스를 읽을 때도, ‘노동의 가치’, 가치를 생산해내는 담지자로서의 노동의 발견을 이야기하고 있는 데이비드 리카아도를 읽을 때도 마르크스는 전혀 ‘경제학’적인 시각에 한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칭 ‘순수이론’이라고 자부하는 고전파 경제학이나 근현대의 주류경제학과는 다르게 현실 사회구성체 그 자체를 자신의 ‘대상’으로 하면서 연구를 출발할 수 있었고, 엥겔스가 말한 것처럼 ‘역사적유물론’과 ‘잉여가치’라는 두 가지 위대한 역사적 발견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유물론적 사고체계에서 언급하고 있는 ‘정치경제학’인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과 정치경제학의 차이는 무엇인가.
도식적일지는 모르지만 단언하자면, 그 ‘개별과학’ 속에 철학이 함께 존재하고 있는가 아닌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하면 ‘대상적 전화’가 가능하도록 하는 철학의 눈으로써 그 과학을 읽어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즉, ‘순수이론’이자, 단순한 ‘개별과학’으로서의 전자에는 철학적 사고가 수반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러한 경향의 한 측면에서는 현실에서 정치, 즉 힘의 관계로서 현상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정치-과학으로서의 ‘정치학’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를 대변하는 존재로서의 ‘철학’을 전혀 상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12) 만약 이러한 ‘순수이론과학’에 위와 같은 철학이 개입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순수성’은 더 이상 그 어디에서고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정치경제학은 다르다. 정치경제학은 그 자체로 유물론적 사고에서만이-엄밀히 말하면 유물변증법이다- 가능한 과학분야이므로 당연히 이론의 ‘순수성’을 현실과 유리시키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은 더 이상 ‘순수성’을 자신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정치경제학의 대상은 과학의, 나아가 이론의 원료로서의 현실, 바로 현실 그 자체일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본]을 가지고 ‘순수한 이론서’라고 규정하는데 무리수가 개입된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상적 평균’13)으로서 [자본]이 서술하고 있는 이론적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유물론적 전제에 입각하여 이미 위와 같은 ‘철학적 독해’와 그로 인한 ‘대상적 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현실적 이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이 말하고 있는 ‘이상적 평균’으로서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또 다시 현실을 분석하는 자료와 기준으로서 객관적으로 충분히 기능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경제학은 역사라는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 계급투쟁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고, 온갖 ‘순수성’의 장식으로 꾸며진 ‘이윤’만이 아닌 계급사회에서의 인간노동을 통해 발생하는 ‘잉여가치’를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상’,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철학적 대상’의 전화, 그것도 ‘혁명적’인 전화이다.
‘대상’에 대한 정확한 규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지향하고자 하는 것이 진정한 이론적 작업이라며 ‘순수성’이라는 이름으로 현실 위에 또 하나의 ‘왕국’14)을 만들고 있는 ‘대상’의 오류들에 대한 정정과 나아가 그것의 ‘혁명적’인 전화가 반드시 필요하다.
 
3, [자본]에 관한 철학적 독해
 
철학은 이미 우리의 ‘순수이론’으로서의 ‘경제학’에 개입되어 존재한다. 설령, 경제학이 자신의 독립성을 내세우며 이러한 진리를 부정하고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리하여 ‘[자본]의 경제학’이라는 것은 고전파 경제학과 주류경제학이라는 개념들에 빗대어서 쓰이는 하나의 은유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정치경제학을 지칭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의 윗부분에서 우리가 짧고도 미흡하게나마 고찰한 것, 그것들에 전제한 채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철학적 독해’에 대해 언급할 수가 있고, 또한 그것에 대해 언급해야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지하다시피, 과학적 대상, 그리고 그런 대상적 지식 자체는 철학이라는 이론적 작업에 의해 그때그때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다른 여타의 과학-경제학도 예외일 수는 없이-과 함께 공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철학에 의한 ‘대상’의 규정, 재규정과 나아가 그것의 혁명적 전화는 과학의 진보에 필수불가결한 이론적 작업이며, 그 작업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텍스트에 대한 ‘철학적 독해’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사용한 읽기 방식도 바로 이것이었으며, 또한 아무런 경향성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새로움만을 요구받는 현재의 우리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읽어야 하는 방식도 바로 이래야 하는 것이다.15)
철학적 독해, 그것의 필요성은 죽은 마르크스를 대신하여 [자본] 2권을 출간했던 엥겔스에 의하여 이미 언급되어 있는 바, 이 글을 맺으면서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만 하다.
 
"선학(先學)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그-마르크스-는 문제만을 보았다.16)"
 
(1998년 2월)


주)


1) 여기서 계속 언급되는 ‘과학(科學)’이라는 것은 주지하다시피 자연과학만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역사적이고 이론적 행위들 속에서 점점 세분화된 학문, 각각의 이론적 영역들을 말하는 것이다.
2) 이하에서 언급되는 내용은 철학에 대한 L. Althusser의 테제들, 즉 “철학의 새로운 실천”과 관련된 주장(['자본’을 읽는다], [레닌과 철학],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을 참조하고 있음을 밝혀 둔다. 또한 각각의 명제들을 인용할 때에는 그때그때 출처를 밝힐 것이다.
3) 철학의 어원이 ‘philos(사랑)’와 ‘sophia(지혜)’의 합성어인 ‘philosophy’라는 것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철학적 행위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을 넘어선다. 즉, 철학은 각각의 지식들의 보편화, 이론화, 그리고 그 운용에 관한 학문이다.
4) 주12) 참조
5)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에르바하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8.
엥겔스는, 철학에 있어서 이러한 근본적인 두 경향 사이의 문제는 고대철학의 발생 때부터 꾸준히 존재해 왔지만 결정적으로 중세사회에서 교회, 즉 종교적 논리가 사회적으로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 본격적으로 ‘첨예화’되었다고 쓰고 있다.
“…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히 존재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진다. 자연에 대해 정신의 일차성을 주장하고, 따라서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세계창조…를 가정하는 사람들은 관념론의 진영을 구성했다. 한편 자연을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은 다양한 학파의 유물론에 속한다.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이 두 가지 표현은 원래 바로 그러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ibid.)
6) 이하, 약간 언급되듯이, 철학은 과학적 지식의 발견이라는 각 계기를 거친다. 예를 들면 갈릴레오에 의해 정립되기 시작한 역학적(力學的) 발견-그 자체로 과학적 혁명-은 데카르트 철학의 유물론적 성격에 의해 ‘철학적으로’ 재정립되며, 이후 마르크스가 역사라는 ‘과학적 대륙’을 발견하기 이전까지 관념론과의 지리한 투쟁을 반복한다. 하지만 역사라는 ‘대륙’의 발견 이후 그것은 다시 유물론적 재정립으로 복귀하게 되는 것이다.
7) 비록 레닌의 말처럼 인류가 존재하고 또 그들이 사고를 하는 한 철학적 관념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 경향이 인간이 만들어온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적 책동에 철저히 복무하게 되기 때문에 계급투쟁으로 현상하는 과학적 입장에서는 더더욱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8) L. Althusser, [레닌과 철학], 1968.
9) “철학은 이론에 있어서 계급투쟁을 나타냅니다…”  - L. Althusser, <마치오키와의 대담>, 1968.
10) ”철학은 이론 형식 내에서 수행된 정치적 개입의 실천이다…”  - L. Althusser, <헤겔 이전의 레닌>, 1969.
11) V. I. Lenin이 마르크스 사후 30주년을 기념하여 1913년 4월 볼셰비키의 합법적 월간이론지 <프로스베시체니에>에 게재한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부분]이란 소논문 참조.
레닌은 이 글에서 인류의 전통을 가잘 잘 계승한 사상은 마르크스, 엥겔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이며 이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원천과 구성부분’을 가진다고 쓰고 있다. 즉 (1) 근대 계몽기의 기계적 유물론과 독일 고전철학의 사변적 변증법의 결합으로서 ‘변증법적유물론’, (2) 영국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을 토대로 한 ‘정치경제학’, (3) ‘자유와 평등’의 기치로 일단의 봉건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 등이 그것이다.
12) ”… 철학은 어떤 영역에 있어서 어떤 현실에 관한 정치의 어떤 연속이다. 철학은 이론 영역 내에서, 보다 정확히 말해 과학 곁에서 정치를 대변한다. 그리고 역으로, 철학은 계급투쟁에 참가한 계급 곁에서 정치의 과학성을 나타낸다… 마르크시즘은 실천의 (새로운)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
- L. Althusser, [레닌과 철학], 1968.
13) 마르크스는 [자본]의 모델로서 당시 자본주의 최고 발전국가였던 영국을 상정하였지만, [자본]에서 영국자본주의를 개별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그는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한 나라에서 나타나는 자본주의 체제의 제 요소를 ‘이상적’이고 이론적으로 보편화하면서 자본주의 체제 일반에 대한 하나의 ‘이상적 평균’을 [자본]이라는 저서를 통해 구성하고 분석, 비판하는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L. Althusser, [자본을 읽는다], 부록 <’이상적 평균’과 이행형태들에 대하여>, 1965, 두레, 김진엽 譯, 1991. 참고.
14) K. Marx,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중 4번째 테제
“… 세속적 토대가 자기자신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여 스스로 구름 속에서 하나의 독립적 왕국으로 자리잡는다는 사실은 오직 이 세속적 토대의 자기분열과 자기모순에 의해서만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15) L. Althusser, ['자본’을 읽는다], 제1장 참조
16) F. Engels, [자본] 2권 <서문>, 1884.


***


- [자본론을 읽는다],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 칼 마르크스 사후 [자본]권과 권을 편찬한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1884년 [자본론] 권 <서문>에서 “선학들이 해답을 본 곳에서 그(마르크스)는 문제만을 보았다.”고 하였다.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그의 제자 에티엔 발리바르와 함께 [자본론을 읽는다](1965년)라는 연구작업을 통해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라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정치경제학’ 텍스트가 아닌 ‘철학적’ 텍스트로 다시 독해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에 대한 철학적 독해는 우리의 연구대상 그 자체인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 적용해야만 가능할 뿐이다. 이 원환이 인식론적으로만 가능한 이유는 마르크스주의 저작 속에 마르크스주의 철학이 실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정확한 의미에서 생산한다는 문제이다. 생산한다는 말의 의미는… 실제로는 이미 어떤 의미에서 실존하고 있는 것을 (목적에 적합한 대상의 형태를 이미 존재하는 원료에 부여하기 위해) 변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생산은 생산작업에 원환이라는 필연적인 형태를 준다는 이중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생산’이다”라고 하면서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다루는 ‘인식의 대상’을 ‘실재적 대상’과 ‘지식의 대상’으로 구별하는데 [자본론]에서 탐구하는 영국은 실제 자본주의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의 정치경제체제가 아니라 “추상적으로 분석되어지는 자본주의 체제의 ‘모델’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또한 알튀세르는 구조주의 철학자답게 “정치경제학의 진실된 ‘주체’는… 생산관계들, 그리고 정치적 및 이데올로기적 사회관계들”이라는 전제 하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논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제 양식의 ‘이상적 평균’은 “현실에 대한 (이론적) 개념을 의미”하며 “마르크스의 이론적 대상은 영국이 아니라 그 ‘핵심적 형태’와 그 ‘핵심적 형태’의 결정에 있어서의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며 자본주의 생산양식 연구에 있어 완전히 ‘순수’할 수는 없으나 하나의 ‘모델적 사례’로 다루어지는 영국과 관련하여 “영국 자본주의의 불순성은… 생산양식들의 이론과 관련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 한 생산양식으로부터 다른 하나의 생산양식으로의 이행이론과 관련된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이 이론은, 모든 각각의 생산양식이 이전의 한 생산양식의 존재형태들로부터만 구성되기 때문에 하나의 일정한 생산양식의 구성과정에 대한 이론인 것이다.”라고 쓰고 있다.
즉,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당시, 특히 자본주의 ‘선진국’으로서의 영국의 자본주의 현실 체제를 분석한 것이 아니라 영국이라는 ‘이상적 평균모델’을 통해 ‘상품’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개별적인 형태로부터 시작하여 ‘자본주의 총생산’의 가장 복잡하고 보편적인 ‘생산양식의 구성과정’을 서술하고 있다는 것이다.


***


1. [자본론을 읽는다](1966), 루이 알튀세르,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2.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 루이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옮김, <백의>, 1990.

3. [레닌과 철학](1968), 루이 알튀세르, 이진수 옮김, <백의>, 1991.

4.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967), 루이 알튀세르,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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