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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용원 Apr 05. 2020

[앙띠-오이디푸스](1972) - 질 들뢰즈

자본의 '물신성' 속 '욕망하는 기계'들

자본의 '물신성' 속 '욕망하는 기계'들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른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자본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 1867.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자본가가 가진 것은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을 주는 생산관계를 그 경제적 토대로 한다. 여기서 '지불되지 않는 노동(부불노동)'은 '잉여가치'가 되고 자본으로 축적되며, 이러한 과정은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자기운동"이라는 헤겔식 표현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서술된다.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의 과정이 노동 '착취'며, 자본 축적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독점'인 바, 이것이 자본주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현상하면서 그 본질인 '인적 관계'를 은폐하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물신성(Fetishism)'으로 표현한다.

'기계'라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구조주의식 표현은, 말 그대로의 '기계'가 아닌 '은유'인데, 위와 같이 각 역사적 특정 단계의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자기운동'에 의해 가동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말한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 조차 자본주의를 '주체'도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보는데, 고도로 발전한 복잡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온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질 들뢰즈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주변의 괴상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좌파 정신분석의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앙띠오이디푸스]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인간들을 '욕망하는 기계들'이라 표현하는데, 난해하지만, 거대한 '기계'와 연결된 장치로서 '부품'들이기는 하나 '욕망'이라는 본질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았으되, 사회적 '생산관계'가 아닌 개인적 '가족관계'로 한정된 프로이트의 '무의식-초자아(id)'는 거부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개념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e)]이다.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첫째 차원의 사회적 심상들이 둘째 차원의 가족적 삼상들에 일치하는 데서이다... 오이디푸스는... 돈-자본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타고 도래한다... 오이디푸스 개념은 자본주의 '기계'의 상상적인 오이디푸스의 개념이 됨으로써만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화한다...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거니와,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하는 독특한 의미에서이다."
- 가타리/들뢰즈, [앙띠오이디푸스], <결국은 오이디푸스>, 1972.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고 왕을 죽인 후 왕비를 차지한 그리스 시대 오이디푸스가 결국 본인이 죽인 왕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본인이 겁탈한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고는 '정신분열'에 빠진 이야기. 프로이트는 '아버지-어머니-나'의 '가족적 삼각관계' 속에서 '오이디푸스'라는 '나'를 두고 '성적 억압'과 '정신분열'을 다루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개인적 '가족관계'가 아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통해 현실화된다고 한다.
[앙띠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점'은' "가족에 포개는 일 밑에 무의식의 사회적 공급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개인적 환상 밑에 집단의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혹은, "환영이 심상의 심상이기를 그치는 점까지 환영을 밀어붙여, 환영이 숨기면서 포장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상들, 즉 '분열들-흐름들'을 찾아내는 것"인데, 사회적 '오이디푸스'인 '정신분열자' 분석의 과제는 개인적(가족적) 오이디푸스라는 "표상의 극장을 '욕망하는 생산'의 질서 속에 다시 옮겨놓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에 의해 개인적이고 가족적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 그 특정 '생산관계'의 '질서' 속에 "이미-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리카도가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서 '양적 노동(추상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학(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리카도가 '단적으로 노동 자체'를, 또한 표상을 실제로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듯이,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찾아낸 사람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1972.

마르크스주의에서 소비에트 러시아혁명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세계체제 변혁이라는 '거대담론'을 고민하고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에 주력한다. 그러나, [앙띠오이디푸스]에 의하면, "레닌주의의 이 '절단'은 사회주의 자체에 국가자본주의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관계 속 개인들의 '욕망'이 부각된다. 사람들 개인의 '미시담론'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체제와 정치권력의 정복이라는 '거시담론'이 해결되어도 미흡하다는 것인데, 계급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물신성(물신숭배)'의 문제인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로부터 나오며, 욕망하는 기계들 없는 사회적 기계 또한 없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세 가지 원천'(레닌)은 철학에서 독일의 관념론(칸트, 헤겔), 정치경제학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사회주의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듯,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론'은 프로이트의 '관념론적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신분열적' 난해한 이 책의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자들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혁명가는 더러운 관을 깨부수고, 홍수를 통과시키고, 흐름을 풀어놓고, 분열을 다시 절단한다. 정신분열자는 혁명가가 아니지만,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자-분석의... 마지막 명제는 사회적인 리비도 공급의 두 극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동적이고 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극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분열적인 극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열자-분석의 적극적 임무>, 1972.

자본주의적 '물신성' 속에서, 가족관계에 머무는 관념론적 '오이디푸스'는 '편집증'의 형태로 '반동화'되고 '파시즘화'되는 반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긍정하는 유물론적 '오이디푸스들'은 '정신분열'은 겪지만 '혁명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이 난해한 저서의 결론이다.
즉, '욕망(리비도)'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계'를 전복하는 '잠재력'을 '욕망하는 기계들'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에서 찾아낸다.

다만, [앙띠오이디푸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적고 있다.
첫째, 예술과 과학만이 혁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하부구조(경제적 토대) 자체 속에 근거를 두는 '계급'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셋째, '혁명가'가 '정신분열자'이거나 그 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편집증'이 반동적 파시스트적이라는 '극단적' 의미로 '정신분열증'이 혁명적이라는 것이며, 그 전제는 위 두 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오이디푸스'의 한 극단이 '파시즘적 편집증'이라면, 다른 극단은 '혁명적 정신분열증'이라는 결론인데, [앙띠오이디푸스]라는 책 자체가 '정신분열'적인 이유 아니겠는가.


"'욕망' 자체, 욕망의 위치의 문제가 제기... 즉, 욕망의 극단적인 두 극 간에,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간의 내재적 관계의 문제... 이 두 극의 한쪽에서는 욕망이 '파시스트적인 편집병적' 조직체들을 공급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정신분열' 기질의 '혁명적인' 흐름들을 공급한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부록>, 1972.

***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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