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성'의 역사학, 그 '실용성'에 대하여
'평범성'의 역사학, 그 '실용성'에 대하여
- [내 안의 역사], 전우용, <푸른역사>, 2019.
"신성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신과 신의 아들=영웅의 이야기가 역사였다... 유럽 68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는 국가 운영 원리를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조직하는 기본 원리로 재정의되었다... 보통사람의 삶은 거의 전적으로 '평범성'이 점유한다... 인류 역사의 본류는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는 '평범성'이다. '비범함'이란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가 바위를 만났을 때 물보라로 튀어 오르는 입자 같은 것이다. '평범성'이 '비범함'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성취들은 '평범성' 안에 깃든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책머리에>
국사학을 전공하고 동아시아문화 연구교수인 역사학자 전우용은 다수 민중의 '평범성'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돌아본다. SNS를 통한 그의 '사회비평'은 그 적폐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물론, '수구세력'과 '토착왜구'들과 결연히 분투하는 최근의 시원한 포스팅의 결론은 대부분 민주당과 현 집권세력의 '진영논리'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평범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니, '평범성'이 전부인 우리에게 그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학자의 깊은 노고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신성'하고 어려운 '구름 위의 역사'는 땅으로 내려온다.
"[삼국지연의]에는 '전국새'가 나온다. '전국새'는 진시황이 천하의 명옥 '화씨벽'을 얻어 만든 도장으로, '수명우천, 기수영창' 여덟 자, 즉 '하늘로부터 받은 명이여, 영원히 번창하리라'라는 글자를 전서로 새겼다. 글씨는 재상 이사가 썼고, 조각은 옥공 손수가 맡았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이름은 '전국새'가 아니었다. 진시황은 이 도장을 '천자새'로 쓰면서 금이나 옥으로 만든 도장은 황제만 쓸 수 있도록 했다. 황제나 왕의 도장을 '옥새'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전국새는 한나라 말의 혼란기에 황궁에서 흘러나가 손견, 원술, 조조의 손을 거친 뒤 다시 황제의 도장이 되었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와 수, 당, 오대십국시대까지 전승되다가 후진의 출제가 요나라 태종에게 사로잡힌 서기 946년에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지금 진품 '전국새'가 발견된다면, 이제껏 지구상에서 거래된 골동품 중 최고가를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원칙적으로 황제의 것은 '새', 왕의 것은 '보'라 했고, 제후의 것은 '장'이라 했으며, 그 밖의 것들은 '인'이라 했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태초에 도장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도장'이라는 사물과 그로 인한 '근대적' 계약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먼 옛날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근대의 개인들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사람'이 아닌 '문서'로서의 '계약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는데(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물신성'의 한 형태), 근대 국가(우리에게는 슬프게도 일제총독부다)는 이름 석 자도 못 쓰는 인민들에게 '도장'을 부여했고 '인감증명'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확정했다. 이전 '신분사회'에서야 '도장'이나 '서명'의 형식이 차별되었겠지만, 근대에 들어 글도 모르고 이름도 없던 다수 인민들의 '평범성'은 이 과정에서 국가로 하여금 정식 이름 조차 없던 '꽃분이'나 말순이' 같은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짓게 만들었다. '여성'도 '시민'이 된 것이다.
'도장'의 역사를 더 보면, '단군 설화'를 담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천부인'은 '하늘의 명이 새겨진 도장'이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신라왕들의 옥새 이야기도 나오며, 고려는 요, 금, 원나라로부터,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을 금도장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찍었다. 더럽지만 살기 위해 찍은 '도장'이었겠으나, 어떤 지배계급에게는 '사대주의'의 큰 명분이었다.
[내안의 역사]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의 마지막 3부로, '유리거울'이나 '도장' 등의 <개인사>, '연애', 'TV', '담배' 등 <가족과 의식주>, '탕수육과 짜장면', '소 보험과 암 보험' 등 <직업>, '한양도성', '경찰' 등 <공간과 정치>, '입시제도', '문화재' 등의 <가치관과 문화> 등의 사소한 영역에서 실로 재미있는 역사를 소환한다.
'보험'의 역사에 관한 역사를 한 번 보자.
"소를 잃는 일과 훔치는 일이 이토록 큰 일이었기에, 우리나라 초창기 보험업이 선박 다음으로 소를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영조) 당시 보험 조건은 매년 엽전 한 냥씩을 내면 기르던 소가 갑자기 죽거나 도둑맞을 경우 소 값을 물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치적 특권과 결합한 독점상업 체제, 즉 '도고상업 체제'가 쌓아올린 적폐는 질기게도 오래 버텼다. (1897년) 대조선보험회사 사원들은 소 키우는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고 윽박질러 보험료를 강제로 징수했다... 보험금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없다. 보험이 뭔지 모르던 농민들은 없던 '우세'가 생겼다고 분개했고... 당황한 정부는 곧 회사 허가를 취소했지만, 그 뒤에도 우척보험회사(1898), 무본보험회사(1900)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비슷한 짓을 되풀이했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소 보험'에서 ' 암 보험'까지, 시대의 불안감>
보험의 동기는 '위험(리스크)'이므로 17세기(1666년) '런던 대화재'의 '화재보험' 동기도 있었으나 원래 그 이전인 근세 '대항해 시대'의 경제활동 중 가장 큰 '위험'과 '손해'의 원천인 '선박'과 '해상무역'이 보험의 첫 물건이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후기 '호상보험회사'가 정부와 결탁하여 사업을 시작했으나 '보험금 지급 기록'은 남기지 않았고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철폐되었으나 1897년 조선의 '자본가'들은 '대조선보험회사'를 열고는 오로지 '소 보험'만 팔았고 역시 '보험금 지급 기록'은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자본주의 '시초 축적'의 민낯은 역시, '양아치' 또는 '악마의 맷돌'이다.
"역사학은 인간의 집단 기억을 다루는 학문이다.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기억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이자 자기 성찰의 원천 재료다.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 단정할 수 없으나, 그를 기록하여 전승하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것이다...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역사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그런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정의'로 취급되나, 나는 결코 무효화할 수 없는 정의라고 생각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는 카(E.H.Carr)위 말대로,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 과거를 소환하여 그 과거가 가르치는 바를 배움으로써 변화하는 존재다. 그 변화가 진보인지 퇴보인지, 발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전우용, [우리 역사는 깊다], <책머리에>
현대 사회가 고도화되고 자본주의 '산업 혁신'이 가속화되면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의 '실용성'에 더더욱 의문의 제기하는 세태를 두고 역사학자 전우용이 내놓은 답변이다.
"자기 필요에 따라 과거를 소환"하는 인류의 '집단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항상 '승자의 역사'로 기록되고 전승되기도 했으나, '기록'만이 아닌, 아니 그 '기록의 문장' 사이의 맥락에서도 선대의 역사기록자들은 수많은 '암시'들을 남겼을 테고, '평범성'의 큰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는 우리 다수대중은 그 '맥락의 역사'에서 다수의 '비범함'을 캐낼 수 있다.
다수의 '평범성'들이 영웅적 '비범함'으로 전화되도록 도와주는 역사학자의 노고에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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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전우용, <푸른역사>, 2019.
2. [우리 역사는 깊다 1~2], 전우용, <푸른역사>,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