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변혁'은 실패하지 않는다
'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변혁'은 실패하지 않는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귀이다.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녀는 덧붙인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나아가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풍운의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己卯)사화'이고 사약을 마실 당시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아직 조선 시대 '당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당쟁', 즉 권력을 중심으로 '정파'를 만들어 수행하는 '정치투쟁'은 '사림파'가 조선의 정치를 장악한 이후인 선조대부터 이야기다.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사대부'는 민본적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하고 사회 '개혁'을 중심으로 두 정파를 형성하는데, 하나는 정도전의 급진적 '역성혁명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몽주의 온건적 '고려개혁파'였다.
전자는 조선을 건국하고 100년의 기득권 기간을 거쳐 보수적 '훈구파'가 되었고, 후자는 현실정치에서 배제된 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진보적 '사림파'를 형성한다. 이후 출사한 사림파 선비들은 기득권 훈구파와 투쟁하며 연산군대에는 '폐비 윤씨 사건' 등을 둘러싸고 두 차례의 '사화(무오, 갑자)'를 겪고 패배하는데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건'이다. 그것도 대규모 숙청이다.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 두 번의 '사화(기묘, 을사)'가 더 반복되는데, 세 번째 '기묘사화'의 주인공이 바로 정암 조광조이다.
연산군을 폐하고 반정을 일으킨 훈구파 대신 3인방 공신(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죽은 후 중종은 '개혁'을 명목으로 공신 세력 견제를 위해 개혁적 사림파 조광조를 천거받는데, 중종 10년(1515년)에 천거받은 조광조는 그 해 문과에 응시하여 원칙적 '도학정치'를 설파한 '책문'으로 급제한다.
급진적 '정치 개혁'을 추진한 조광조는 가짜 공신을 없애는 '위훈삭제'와 이전 사화로 희생된 스승 김굉필과 더 거슬러 정몽주의 성균관 문묘종사에 올리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중종과 뜻이 맞지 않아 사사당하고 만다.
개혁의 명분과 이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그 한계는 이해해야 하지만, '적폐 세력'의 씨를 말릴 힘이 없음에도 비타협적 '정치투쟁'만 한 결과 '기묘사화'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고, 왕안석이 그랬으며, 로베스피에르와 트로츠키도 같은 길을 갔으니 '실패한 개혁가'의 한 표상이고, 당시는 잊혀졌으되 현재의 역사에서는 그래서 더 기억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원칙적이었고 협잡하지 않았으며 실력이 부족해 쓰러질 지언정 적에게 굴복하지 않은 점이다.
<중종실록>은 조광조 개혁 4년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조광조들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류가 화를 입음에 이르러 염절(청렴과 절제)이 따라서 무너지니 조정은 재물에 때가 끼고 군현도 그 바람을 타서 이를 데가 없게 되었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중종실록, 15년 10월>
일제시대 '식민사관'은 조선인들을 모이기만 하면 '붕당'을 만들어 싸우는 하급 민족이라 폄하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사대부들의 '사화'와 '당쟁'이었다.
물론, 조선의 '송자'로 불라면서 서인 노론의 '일당독재'를 구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은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은 당시의 '다당제'라 할 수 있는 '당쟁'을 통해 기득권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음을 설파한다.
조선 '당쟁사'의 '문제적 인물' 송시열을 비판하고 그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쓴 책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이다.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싸움이 발생한 것은 선조 임금 때였다. 선조 7년(1574) 전랑으로 있던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자신의 후임으로 이조정랑에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심의겸이었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조선의 '이조정랑'은 '3사' 관리 추천권을 지닌 자리인데, '3사'는 사헌부(감찰), 사간원(언론), 홍문관(학술정책) 등의 임무로 '도학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에게는 중요한 직책이었으니, 이 자리의 추천권을 두고 첫 '분당'이 이루어진다.
김효원은 한양 동쪽에 살아 '동인', 심의겸은 서쪽에 있어 '서인'이 되는데, 이후 상대당을 몰아내고 처단 수위의 강경-온건에 따라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이 광해군과 함께 패배한 뒤에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고, 장례복식 등의 쓰잘데기 없는 '예송논쟁' 등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최후의 승자 '노론'은 다시 강경파인 '벽파'가 끝까지 살아남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니 아마도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린다.
이덕일이 보기에 현재 우리나라 '적폐'와 '수구보수'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어쩌면, '송자' 우암 송시열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육은 효종에게 '삼남에는 부호가 많습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확대 실시를 주장했으나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힌 효종은 확대 실시를 주저했다. 그러자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배수진을 쳤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100년 동안의 조세개혁, '대동법'>
조선 시대 '성공한 개혁'은 단연 '대동법'이다. 공납의 폐해를 없애고 토지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로 '근대국가'의 기틀이 되고 다수 민중들에게도 공평한 조세제도로 당시 지배계급인 대지주에게만 불리한 법이었다.
당연히 지주와 관료, '토호열신'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국 확대에만 100년이 걸렸고 그 중심에 김육이라는 '서인' 정치가가 있다.
잠곡 김육은 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호란으로 출사 기회를 잃기도 하고 성균관에서는 상소운동 등의 '학생운동'도 주도했다는데, 본인의 자리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결국 숙종대에 대동법이 전국 확대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또한 김육의 새로운 역법과 상평통보 주조 등의 경제관은 조선 후기 실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서인'은 '한당'과 '산당'으로 분열하는데, 김육은 '한당'의 지도자였고 '산당'의 우두머리는 송시열이었다.
대동법은 광해군대에 경기도, 효종대 충청도, 숙종대에 전국 확대된 바, 효종이 호서지역 민심을 묻자, 대동법 반대파 송시열 조차도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도도한 '시대정신'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개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득 있는 곳에 과세있다"는 대원칙 아래
소득과 자산에 따라 공정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민중의 '보편복지'를 위해 평등하게 분배하는 '시대정신'은 대동법의 조선이나 현재의 대한민국이나 보편적인 것 아닐는지.
다수 민중을 위한 '보편복지'의 '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개혁'이든 '혁명'이든 사회 변혁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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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2.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