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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명진 Apr 28. 2024

출근전쟁과 궁극의 기술

어느 하루의 이야기


반의 반 평생 정도는 출퇴근 지옥철과 더불어 살아오고 있다. 양 방향에서 밀려드는 사람파도에 의해 오징어가 될 위기에 처했다면 셀프 팔짱이 해법이 될 수 있다. 두 손을 감춤으로써 부적절한 접촉을 피할 수 있고, 상대와 한 뼘 정도의 공간을 단단히 확보할 수도 있다. 원활한 호흡에도 제법 도움이 된다. 만차일 때는 중심을 잡고 무리하게 버티는 것보다, 차라리 주변 사람을 적절히 쿠션으로 활용하며 진동에 맞춰 적절히 흔들리는 편이 낫다. 물론, 내가 도움을 얻은 만큼, 나 또한 타인에게 쿠션이 되어줄 너그러운 각오를 해야 하겠다.


지옥철 상황이 10분, 아니 30분 정도라도 어떻게든 정신력으로 버틸 수 있다. 나는 그만큼이나 성장한 것이다. 하지만 30분을 넘는 순간, 이따위 회사 그만두고 싶어진다. 내가 다니는 회사가 우리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대체 무엇이며, 동북아시아의 정세를 이렇게 해서 뒤바꿀 수 있는지, 트럼프의 재선을 막을 수 있는지, 대중교통 이용이 가속화되는 지구가열화 현상을 늦추는 일에 진정 도움이 되는 건지, 우리 은하 저편에 있다는 창조의 기둥에서 쓸데없이 왜 자꾸 새로운 별을 만드는 것인지 - 그래 봤자, 외계인 지옥철이 더 늘어나는 것뿐일 텐데 -, 그 모든 게 혼란스러워진다.


조금 혼란스럽다고 직장을 그만둘 수 있는 건, 적금이 2천 이상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나는 대체로 그만한 돈이 없었기 때문에 오래전부터 궁극기를 연마해왔다. 바로, 지하철 객차에서 '서서 자는 기술'이다. 기린도 아니고 인간이 서서 자는 기술을 연마한다는 게 우습지만, 결코 우스운 게 아니다. 나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절실하고 진중한 마음으로 궁극기를 연마했으며, 결국 체득하고 말았다. 나는 이 기술을 ‘기린쪽잠술’이라고 부르기로 지금 정했다.


아쉽게도 어느 정도 신체적 조건이 필요한 기술이다. 일단, 지하철 손잡이를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기둥으로는 난이도가 더 높아진다. 객차의 진동과 함께 자연스레 흔들리는 손잡이가 베스트다. 객차에 들어서면 일단 이 손잡이 하나를 내 것으로 확보해야 한다. 코로나19 이후로 잘 잡지 않는 추세라서 이 경쟁은 다행히 치열하지 않다. 손잡이를 잡았으면 손아귀와 팔목에 힘을 주어 자세를 고정한다. 이제부터 손잡이를 잡은 쪽의 팔은 고정된 강화플라스틱 혹은 쇠파이프라고 자기 최면을 건다. 몸을 편하게 뒤로 기울여서, 대략 85도 정도의 경사각을 만든다. 이제 눈을 감고 지하철과 물아일체의 경지로 빠져드는 것이다. 멈추면 멈추는 대로,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있는 그대로 내게 주어지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다만, 의식의 5% 정도는 지하철 안내 방송을 향해 켜두어야 한다. 역에 정차할 때마다 주변 상황이 크게 바뀔 수 있기 때문에 계속 자고 있을 수는 없다. 정차할 때는 희미하게 의식을 켜야, 주변에 민폐를 안 끼치고, 나도 공연한 봉변을 피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내려야 할 역을 지나치는 참사를 막을 수 있다.


몇 분 전에 ‘기린쪽잠술’이라고 붙인 이 기술 덕분에 나는 한 직장을 적어도 2년 이상은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만하면 꽤 착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주변 지인들은 한 회사를 10년째 다니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 걸 보면 사실 이런 기술과 근속은 별 상관관계가 없구나 싶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왜 이 글을 쓴 것일까. 혹시, 북극에 사는 북극곰이 읽고 푸슉 웃기라도 한다면 이 글에 들인 시간이 아깝지 않을 것 같다.


2024. 4. 28.   




*별 관련 없는 내 책 홍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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