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영화평론가 홍수정 Oct 18. 2024

미워했던 과거를 향해 웃음을

왜 그런 적 있지 않나? 과거의 나를 문득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러니까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 나는 종종 예전의 그 인간이 한심하고 안타까웠다. 조금만 생각을 달리 했더라면, 아니 조금만 멀리 보거나 일순간 들끓는 마음을 내려놓고 행동했더라면 지금의 내가 훨씬 편안했을 텐데 싶은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큰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도, 문득 과거의 나를 온전히 끌어안게 되는 순간이 있다. 



예를 들어 로스쿨을 입학했다가 변호사시험을 네 번 보고 관뒀던 기억은 내게 일종의 원형적 트라우마 같은 것이다. 내가 일생동안 풀어야 할 숙제, 과업, 업보. 그 7년의 시간이 나는 못 견디게 아까웠다. 그 시간에 취업을 했으면 돈이라도 벌었을 것을. 아니, 그냥 잠이라도 푹 잤으면 하다못해 건강했을 것을. 


변호사가 되지 못한 것은 아쉽지 않다. 내게 맞지 않은 직업이다. 다만 노력을 들였음에도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다는 것에 꽤 오랫동안 화가 났다. 너는 대체 로스쿨을 왜 간 거야? 갔더라도 도중에 나왔어야지. 너 때문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괴롭잖아. 


대신 나는 그 무렵 우연히도 <자객 섭은낭>이라는 영화를 무척 감명 깊게 보았고, 몇 달 뒤 씨네21에서 주최하는 영화평론상 공모에 글을 냈고, 우수상을 받으며 영화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때 마음이 퍽 묘했다. 그렇게 매달린 변호사시험은 안 되고, 예상도 못했던 등단은 되다니. 게다가 그해 2016년 씨네21 영화평론상 공모에 지원한 사람은 110명 가까이 되었고 단 한 명이 상을 받았으니, 나는 분에 넘치게 아주 좁은 문을 통과한 셈이다.


그래서 나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한 것은 안타깝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선물처럼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해 왔다. 전자가 머릿속에서 열병처럼 퍼지면, 후자를 진통제 삼아 통증을 눌렀다. 



그런데 어느 날엔가,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로스쿨은 실패, 등단은 성공. 이렇게 별개의 사건으로 볼 수 없다는 생각 말이다. 

내가 로스쿨을 들어가지 않았다면 그토록 간절하게 글을 써서 냈을까? 그렇게 힘든 시절이 아니었다면 <자객 섭은낭>이 이다지도 아름답게 느껴졌을까? 물론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했으니 평론가가 안 됐어도 어디선가 무엇이든 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가 지금과 같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다. 내가 비평을 하며 느꼈던 무수한 행복은 내 과거에 빚을 지고 있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나는 종종 과거를 돌아보며, 잘했다 싶은 선택을 치하하고 잘못했다 싶은 선택을 미워했다. 지금의 나는 이것 덕에 행복하고, 저것 때문에 불행하구나. 이때 다른 선택을 내렸다면 내 인생은 더 나아졌을까? 마치 범인색출하는 형사처럼 내 과거를 대했다하지만 그렇게 단정 지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겪은 실패와 성공, 행복과 불행들이 실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다고. 너무 희미해서 보이지 않지만.



나는 지금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나는 이 말에 묻은 무책임한 낙관주의가 싫다. 어떤 실패는 그냥 실패일 뿐인데). 다만 인생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내가 사랑했던 순간과 증오했던 순간이 서로 얽어져 현재로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마치 깊은 땅 속에 묻혀 있는 자잘한 뿌리들이, 땅 위에서 단단한 줄기로 만나, 눈부신 가지와 잎으로 흩어지고, 그 끝에 예쁜 열매를 맺는 것처럼.


 

나는 찌질하게 과거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누구보다 많은 후회를 곱씹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런 찌질한 행동을 계속하겠지. 하지만 무엇 하나 따로 떼서 생각할 수 없이 서로 얽혀있는 것이 인생이라면, 지금의 내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과거의 모든 순간들을 조금은 편하게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후회하고, 미워하고, 또 자랑스러워하는 그 순간들이 합쳐져 현재를 만들었으니까.



우리는 마블 영화처럼 다중우주를 이동해 다니며 다른 선택을 내린 나를 관찰할 수 없다. 과거로 돌아가 아쉬웠던 선택 하나를 바꾼다 한들 지금의 내가 더 나아지리라 장담할 수 없다. 인생의 인과관계를 어렴풋이 추정할 수는 있지만, 그것들을 하나하나 분해해 분석하기란 불가능하다. 


삶은 결국 미지에 쌓여 있기 때문에 이렇게 내 속을 터지게 만들지만 그래서 더 신비롭다. 나는 다만 오늘의 내가, 내일의 내가 볼 때 여전히 답답하고 한심할 내가, 생각하는 최선을 매 순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선택들이 나를 좋은 곳으로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수밖에.  


그런 생각을 하면 실수라 생각했던 순간들도 토닥이게 된다. 조금은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인과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너희들 덕에 지금의 내가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내가 오래 미워했던 그 순간들이 실은 보이지 않는 곳의 토양이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든 것 같다고. 때때로 다시 성질을 못 참고 불러내어 눈을 흘기겠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추석, 평범함을 확인하는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