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에 대한 리뷰도, 비평도 썼으나 여전히 말하지 못한 부분이 남았다. 모르고 지나치면 아쉬운 이야기.
아래부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 남자는 왜 하필 새우를 먹을까
하비(데니스 퀘이드)는 엘리자베스 스파클(데미 무어) 앞에서 새우를 쩝쩝대며 먹는다. 이 장면은 그의 탐욕스러움과 품격 없음을 직관적으로 드러내지만, 그가 택한 음식이 하필 새우인 것에는 이유가 있다.
서브스턴스인 '수(마거릿 퀄리)'는 스파클의 등을 찢고 탄생한다. 이 모습은 하비가 새우의 등껍질을 벗겨 살을 발라내는 모습과 겹쳐진다. 그러니까 하비가 스파클 앞에서 새우를 까먹는 것은, 영화가 그녀에게 건네는 잔인한 농담이다.
또한 하비가 새우를 쉴 새 없이 먹는 것은, 그가 이 잔인한 구조의 최상위 포식자임을 드러낸다. 그는 새우 껍질(엘리자베스 스파클)을 까서 나온 살(수)을 속속 취하며 그 과정에서 손에 묻는 찌꺼기(스파클의 피와 고통)를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새우 껍질을 이리저리 지저분하게 버리는데, 이 모습은 그가 나이 든 수를 대하는 성의 없는 모습과 닮았다. 하비는, 그리고 이 산업은 얼마나 많은 서브스턴스를 취하고 또 버렸을까.
<서브스턴스> 스틸컷 ○ 스파클이 동창과 데이트하려는 이유
스파클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동창생의 번호를 받고, 그와 데이트를 시도한다. 그 남자는 겉으로 보아 스파클만큼 매력적인 사람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가 이런 선택을 감행하는 이유는 스파클이 진정한 사랑에 눈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그녀가 갈망하는 이미지, 즉 자신의 젊고 아름답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을 원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동창생에게 그녀는 감히 우러러보기 힘들었던 스파클이고, 그녀는 남자의 머릿속에 새겨진 그 이미지를 갈구한다. 그러나 이런 시도는 거울 속에 나타난 현재의 이미지에 밀려 실패하고 만다.
사실 이런 현상은 한때 잘 나갔던 사람에게 흔히 보인다. 이들은 왕년에 빛나던 나를 기억하고 칭송해 줄 사람에게 기꺼이 어떤 호의도 베풀 용의가 있다. 이들이 과거 인연에게 친절한 이유는 철이 들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결핍을 채우기 위함에 가깝다.
남자가 연락처를 적은 종이가 땅에 떨어지자, 그는 구정물이 묻은 연락처를 스파클에게 준다. 그녀는 지저분한 종이를 받아 드는데, 이 모습은 서브스턴스의 탄생조차 감당하는 엘리자베스의 과감하고 독한 면모와 겹쳐진다. 결국 그녀는 어린 시절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구정물도 손에 묻히게 된다.
○ 몸을 대하는 방식의 폭력성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젊고 아름다운 몸을 향한 욕망에 집중한다. 그러나 정작 가장 눈여겨볼 부분은 이 영화가 몸을 대하는 방식이다. 원하는 이미지를 얻기 위해, 지금 우리가 얼마나 폭력적으로 몸을 대하고 있는지 말이다.
수는 스파클의 몸을 마치 짐덩이나 물건처럼 취급한다. 그녀는 탄생한 후 스파클의 찢어진 등을 듬성듬성 꿰매는데, 이는 벽에 못질하는 모습과 닮았다(스파클의 등뼈와 벽의 마디는 서로 닮았다). 이 장면은 하비의 새우 먹방과도 이어진다.
이쁜 몸에 대한 판타지가 커지며, 그렇지 못한 현실 속 육체의 가치는 바닥에 떨어진다. 이는 벽, 새우와 다를 바 없는 물질일 뿐이다. 영화는 그에 대한 이미지를 연속적으로 제시하며 지금의 인식을 풍자한다.
<서브스턴스> 스틸컷 ○ 스파클이 하는 요리의 의미
수가 토크쇼에 등장해 아름다움을 뽐내자, 스파클은 요리를 시작한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수의 매혹적인 육체와, 스파클의 요리 장면은 번갈아 등장한다. 이것은 수의 몸이 요리 재료와 다를 바 없음을 의미한다. 스파클에게 수는 자신이 이리저리 재료를 조합해 만들어낸 유기물에 불과하다. 아무리 이쁘다 해도 마찬가지다. 스파클은 그 아름다움의 위태로움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이를 비하하고 조롱한다. 너는 내가 열심히 만들어서 내놓은 맛있는 요리에 불과해. 이런 심리 상태는 수를 파괴하는 선택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것 역시 사회에서 흔히 보이는 심리다. SNS 속 이쁜 이미지에 집착하면서도, 그것이 허울뿐인 가짜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남이 선보이는 이미지를 깎아내린다. 이쁜 이미지를 향한 집착 속에서 그것은 갈망과 혐오의 대상으로 동시에 등극한다.
○ 결말의 의미
결말에 등장한 '몬스트로 엘리자수'는 기괴한 형태를 하고 있다. 그녀의 존재는 인체를 통합된 신체로 대하지 않고 입술, 가슴 등 조각난 부위로 인지하는 현실을 풍자한다. 어차피 너네는 몸을 조각내서 바라보잖아. 자, 여기 멋진 몸을 봐. 뭐가 문제야? 영화는 심술궂은 태도로 신체의 통합성을 완전히 부정한 존재를 탄생시키는데, 그것이 몬스트로 엘리자수이다.
하지만 전에도 밝혔듯이,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 공격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기형적 신체에 대한 혐오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의 결말이 아쉽다. 영화는 처음 신체에 대한 폭력을 반대하는 듯하다가, 결말에 이르러 다른 폭력적 사고에 기대어 진행되고 만다.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몸에서 나온 피가 모두를 적실 때, 이것은 피로 일군 쇼비즈니스 왕국을 직유적으로 풍자한다. 실은 그녀의 등장부터 죽음까지 모두가 영화의 환상이라 볼 여지도 있다. 그녀가 무대에 서는 과정, 그녀가 죽는 과정은 앞부분의 전개에 비교하면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러니까 스파클과 수의 싸움 끝에 두 여자는 죽었고, 이후의 과정은 영화가 쓰는 환상노트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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