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멸의 칼날>, 역대 일본영화 흥행 1위 찍고 2025년 1위 넘봐
올해 극장가를 재패할 주인공은 일본 애니메이션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성편>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나 해외가 아니라 이곳, 한국에서 말이다.
이 영화는 13일(수요일) 기준 관객수 561만을 기록, 1위인 <좀비딸>(563.6만)과 약 2~3만 명 차이가 난다. 하지만 여전히 왕성하게 관객을 불러 모으는 기세를 볼 때(지난 주말에만 만 오천 명이 관람) 곧 <좀비딸>을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실은 <좀비딸>의 홈어드밴티지, 각 채널을 통해 진행한 홍보 등을 감안하면 이미 넘어섰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만일 <귀멸의 칼날>이 관객수 563만을 초과한다면, 일본 영화가 그 해 한국의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것은 영진위가 집계를 시작한 2004년 이후 처음이다. 이것은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러한 기현상에 가장 많이 따라붙는 설명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찬란한 유산과 단단한 팬덤이다. 물론 사실이지만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일본 애니에 대해 아무리 분석해도 지금 극장가 현상이 해석되지 않는 것이다. 560만은 특정 팬덤뿐 아니라 극장을 즐기는 일반 관객층이 함께 움직였을 때 가능한 수치다. 그렇다면 이걸 가능하게 한 동력은 무엇일까.
나는 관객의 취향 변화를 먼저 꼽겠다. 영화뿐 아니라 전 분야에 불어닥친 '미세 트렌드'. 관객의 입맛은 깊고 예리해졌다. 더 이상 그들은 투박한 코드에 만족하지 않으며, 새롭고 신선하면서도 완성도 높은 작품에 반응한다. 그냥저냥 즐길만한 평범한 콘텐츠에 대한 수요는 OTT가 모두 채워주기 때문에, 극장을 찾을 때는 더 높은 까다로운 기준을 장착한다.
하지만 확실한 재미가 보장된다면, 이들은 이전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열광적으로 임한다. 매니악한 콘텐츠도 거침없이 즐기며, 미리 공부를 하고 n회차까지 불사한다. 오타쿠화 된 대중이라고 해야 할까. 지금의 관객은 10년 전과 질적으로 다르다.
이러한 니즈는 2025년 때마침 등장한 웰메이드 일본 애니와 시너지를 일으켰다. 하지만 이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굳이 일본 애니가 아니라도 이런 니즈를 만족시키며 국내 관객을 사로잡는 해외 작품은 이제 쏟아질 것이다. 그 한 사례로 일본 영화 <8번출구>를 꼽을 수 있다. 지금의 현상이 '일본 애니'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국내 프랜차이즈 영화, cj와 롯데가 투자한 한국 영화가 돌아가며 그해 박스오피스 차트를 차지하던 호시절은 끝났다.
관객의 취향이 변한 건 알겠어. 그런데 한국 영화는 왜 그걸 만족하지 못하지?
바로 이 부분이 문제다. 지금의 한국 영화들은 높아진 한국 관객의 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거장의 영화와, 상업 영화, 가능성 있는 독립 영화는 있지만 새로우면서도 완성도 높은 중간 규모의 영화가 없다. 대신 흥행을 노리면서 이전의 성공 공식을 반복하다가 실패하는 영화들이 쌓이고 있다. 요즘 젊은 관객은 이미 OTT와 유튜브로 단련된 상태(심지어 영상을 자유자재로 만든다). 이들을 붙잡을 독특한 대작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한국 극장은 지붕이 뚫린 상태. 그곳으로 독창성과 대중성으로 무장한 해외 작품은 점점 더 빈번하게 쏟아질 것이다.
내가 정말로 우려하면서도 강하게 확신하는 것은, 곧 <좀비딸>의 아류작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들이 따라 하는 포인트는 "인기 웹툰 원작을 그대로 살려내는" 전략이 될 것이다. <좀비딸>과 <전지적 독자 시점>이 이러한 환영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좀비딸>의 성공 요인 중 하나일 뿐, 보편적인 흥행 전략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또다시 코믹하면서 따듯한 원작 ip를 찾아낼 것이고, 조정석처럼 모든 세대에 호감을 주는 스타를 영입할 것이고, 천만 영화 노래를 부르는 어느 작품 하나가 대망하고 나서야 이 현상은 사라질 것이다. 앞선 작품의 공식을 따라 하면 흥행할 수 있다고 여기는 나태함이 계속되는 이상 한국영화의 체질 개선은 없다.
일본 애니가 한국 극장가에서 그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는 일은 많은 것을 상징한다. 달라진 관객. 하위 장르에 관대해진 문화. 높아진 안목.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 영화가 한국 관객의 취향을 간파하며 불러들이는 일에 실패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서부터 문제였던 것일까. 같은 공식을 반복하는 몇 편의 작품이 "천만 영화"가 되어 추앙받은 과거 때문인 걸까. 어떤 성공은 독으로 남는다. 그 독을 (만든 이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오랫동안 나눠 마셔야 한다는 점은 비극이다. 연말에 비관적인 진단을 내리고 싶지 않지만, 빨간불을 켜는 의미가 없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한국 극장가는 내부에서부터 허물어지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