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가 되다.
시간
박경리
커피 잔을
입술에 대는 순간
시간의 소리가 들려왔다.
세월을 마시듯이
커피를 삼킨다.
제발 소리를 내지 말아 다오
톱니바퀴에 끼어 돌아가는 시간
모터가 시간을 토막 내고
미치겠구나.
나는 강물로 살고 싶은데
나는 구름으로 살고 싶은데
아아 들판 싱그러운 풀로
살고 싶은데
순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하동을 들렀다. 목적지, 도착지만 찍고 돌아오는 아스팔트 길이 지루했는데 하동이라고 적힌 이정표를 보는 순간 갑자기 ‘토지’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몇 년 전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분명히 온 적이 있었는데 주차장에서 드라마 촬영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익숙한 광경이 하나도 없었다. 나의 장기기억 저장소 용량은 1MB도 안 되는 게 확실하다.
촬영장을 거니는 동안 오래전 TV에서 보았던 등장인물과 장면들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나는 배우 최수지 씨가 출연했던 드라마를 보았던 세대이다. 어린 서희의 찢어 죽이고 말려 죽일 거라는 대사가 회자되던 때가 열다섯 살 중학교 때니까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촬영장을 둘러보고 토지문학관으로 향했다.
커피와 관련된 일을 하다 보니 내 눈이 제일 오래 머문 것은 박경리 작가가 사용하던 커피 추출 기구들이다. 핸드밀과 커피를 담아두는 통, 그리고 프렌치프레스. 작가가 직접 커피를 추출해서 마셨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작가와 나는 아무런 인연이 없지만 커피라는 이름으로 동지가 된 것 같았다.
원두를 갈고, 뜨거운 물로 커피를 불려 맛을 음미하는 순간까지 작가와 커피를 즐기는 우리 모두는 아마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시간의 때가 묻은 커피 추출 기구와 여러 유품들이 쏟아내는 묘한 기운은 그 옛날 작가의 시간을 마치 내가 살았던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들게 했다.
몇 달 전 현대미술에 관한 글을 읽으면서 자본주의 사회의 예술가와 예술작품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무명작가들의 작품 속에도 인간이 삶을 사는 동안 느끼는 희로애락이 모두 녹아 있는데 왜 세상은 특정한 작가와 작품들만 조명을 하는 것일까? 작품에 대해 좋고 나쁘다고 평가하는 것은 마치 누구의 삶이 더 뛰어나고 누구의 삶이 더 못났는가 하는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을 텐데.
작가와 작품의 가치는 돈의 논리로 결정되는가? 유명한 상을 타거나 많이 팔린 작품의 가치는 한 점도 판매되지 않은 작품에 비해 더 높은 가치를 가진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역사에 남을 유명한 문학가나 예술가를 꿈꾸는 사람은 폐쇄된 공간에서 배를 곯아가며 창작활동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작품을 들고 열심히 마케팅을 해야 한다. 창고에 처박혀 있던 그림을 꺼내 들고 나체 상태로 광화문을 뛰어다녀보라. 조금 쪽팔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경범죄로 구치소 신세를 지기도 하겠지만 작품의 가격은 SNS를 타고 폭등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씁쓸하고 황당한 생각이 생활의 대부분을 지배하지만 고통스럽게 쓴 글을 다시 쳐다보기도 싫다는 박경리 작가가 남긴 말을 되뇌는 순간 세상의 질서는 그렇게 엉망진창인 것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받는다. 이런 감정은 태백산맥 문학관에서 사람의 키보다 높이 쌓인 조정래 작가의 원고를 보면서도 느꼈던 것이다.
그렇다. 가치라는 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 그 일을 했는가?’ 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간'은 ‘얼마나 많은 사람이 좋아하는가?’라는 지표보다 훨씬 더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사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