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회 한미수필문학상 출품 예정작]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이불 밖으로 의식이 반쯤 고개를 내밀었다. 잠에서 깼지만 아주 잠깐 이곳이 어딘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휴대폰 알람소리로 Two ton shoe의 [Medicine]이 흘러나오고 있다. 아파서 약 좀 달라고 소리 지르는 노래인데, 알람소리로는 이만한 노래가 또 있을까 싶다. 좋아하는 노래였는데 알람으로 쓰는 바람에 싫어진 것이 문제지만. 알람을 바꿀 때가 된 것 같다. 싫어지는 노래만 늘어간다. 그나저나 지금 몇 신데 전화를 하는 거지? 이 시간에 누가? 누구긴, 일하러 오라고 부르는 거겠지. 운 좋게 눈 좀 붙였을 뿐이고 나는 당직 중이니까. 정신이 없어 당연한 사실을 떠올리는데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손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고 아직은 감고 있는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댔다. 성가신 휴대폰 액정의 불빛을 정면으로 받으며 눈을 반쯤 간신히 뜬다. 흐릿한 초점을 맞추기 위해 필사적으로 찡그린다. 2년 차 레지던트다. 좋지 않은데. 무려 새벽 3시다. 전화받았습니다. 외과 인턴입니다.
좋지 않은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는다. 응급수술이란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내려와 발을 질질 끌며 숙소를 나섰다. 병동에서 간호사가 호출했다면 대부분 간단한 일이겠지만 수술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지금 수술이 시작된다면 오늘 수면은 여기까지다. 수술이 끝나면 하루가 시작된다. 즐거운 월요일이. 인턴에게 좋은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월요병이 없다는 것이다. 매일이 월요일 같아서 병이 날 일이 없다. 오히려 주말 당직으로 밤을 하얗게 지새우면 월요일이 오는 게 더 좋기도 하다. 좋은 점이 맞나?
숙소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지나며 창문 밖을 힐끗 본다. 온통 어두운 주차장에 불빛이 켜진 차는 한 대도 없다. 학교 건물에도 대부분의 창문에는 불이 꺼져있고 꽤 높은 어느 한 층에만 몇 개의 불빛이 보였다. 아마 도서관일 것이다. 너희도 못 자고 있구나. 그렇지만 그때가 좋은 거란다. 거리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자동차도 건물도, 모든 세상이 잠을 자는 시간인 것 같은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오늘따라 더욱 현실감이 없다. 현실이 아니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으슬으슬한 바람이 어딘가에서 스며들어와 몸을 움츠리게 하고, 반팔 당직복만 입고 나온 것을 후회하며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지났다.
본관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서성거렸다. 조용한 병동 복도에는 삐쩍 마른 중년의 남자 환자가 드르륵 소리를 내며 수액걸이를 끌고 어슬렁 거리고 있는데, 걸음걸이에 힘이 없어 수액걸이가 오히려 그를 끌고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불면증이 있는 걸까. 잘 시간이 충분할 텐데 왜 안 자고 있을까. 아까운 시간에 안 자고 깨어있는 그가 부럽기도 하고 이유 없이 밉기도 하다.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 3층을 눌렀다. 삐그덕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고 곧 문이 열렸다. 수술방이 있는 3층에는 비상구 안내판에서 새어 나오는 작은 불빛과 수술실이라고 쓰여있는 큼지막한 글자를 밝히는 하얀 형광등만이 힘겹게 어둠을 쫓아내려 노력 중이었다. 수술방 입구의 좌측 하단부에 있는 홈에 발을 집어넣으니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바로 오른쪽에 보이는 탈의실문으로 들어가 수술복으로 환복을 하고 수술방으로 들어갔다. 수술방 내부는 너무 춥다. 너무 추워서 나는 수술하는 과의 레지던트를 절대 하지 않겠다고 일찌감치 정했을 정도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된다. 평생 추운 곳에서 일할 수는 없다. 마음도 추운데 몸까지 추울 수는 없다.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외과 전용 수술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 끝에 다다라 우측으로 방향을 돌리니 저 멀리 응급수술이 진행될 수술방에서만 밖은 불빛이 쏟아져 나오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하며 수술방에 들어간다. 수술방에는 달그락거리며 수술도구를 준비 중인 수술방 간호사 한 사람과 마취도구를 준비하는 마취과 간호사 한 사람, 컴퓨터 앞에 거의 누워있다시피 앉아서 차트를 쓰고 있는 마취과 당직 레지던트가 있다. 아무도 내 인사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잠깐 들어 누군지 확인하더니 각자 자기 할 일을 다시 한다. 마취과 레지던트는 뭐라 중얼중얼 혼잣말을 하다가 만다. 자기 할 일은 철저히 하고 있는 듯 보였지만 제정신인 사람은 없어 보였다. 전문가를 양성하는 이유가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다. 곧 내게 전화했던 외과 2년 차 레지던트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응. 빰빼*야."
수술은 4~5시간쯤 걸렸다. 60대 남자 환자의 장천공에 의한 복막염이었다. 장천공은 암 때문에 생겼다. 대장암이 자라면서 장이 괴사되어 천공이 생긴 것이다. 장 외부의 공간(복강)은 항상 깨끗하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장이 천공되면서 대변이 복강으로 유출되었고, 온갖 세균에 의해 오염되어 염증이 생겼다. 환자는 극심한 복통과 발열로 응급실에 왔을 것이었다. 복강을 여러 차례 씻어내고 암이 자라 괴사가 진행된 대장을 넉넉하게 잘라낸 후 이어주는 것이 수술 방법이다. 나의 역할은 '견인기'라고 부르는 국자 같이 생긴 기구로 복강을 넓게 벌리고 고정하고 있는 일인데, 그게 전부다. 집도하는 교수님이 씻어내고, 자르고, 확인하고, 이어 붙이고, 레지던트를 혼내고, 등등 바쁘게 뭔가를 하시는 동안 나는 견인기를 두 손에 각각 하나씩 잡은 채 힘을 주고 서있다. 그저 서있다. 고문이 따로 없다. 이럴 거면 새로운 기구를 개발하든가 로봇을 하나 만들어 시키든가 할 일이지. 내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가만히 서있기만 하니 더욱 졸음이 몰려왔지만 졸다가 기구를 놓치거나 수술부위를 오염시키는 행동을 하나라도 했다간 나는 수술방에서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온 힘을 다해 졸음과 사투한다. '쫓겨나면 오히려 좋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가지만 애써 무시하고 정신을 집중했다. 다행히 큰 일 없이 수술이 완료되었다. 아, 나에게는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환자에게는 꽤나 큰 일이다. 대장암이 상당히 오래전부터 있었고, 발견이 늦어져서 장에 구멍이 났고, 그래서 장을 잘라냈다는 비현실적인 세 가지 소식을 환자는 한 번에 듣게 될 것이었다. 더구나 염증이 심한 상태로 시행한 응급수술이어서 암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한 추가수술이 필요할 가능성도 높았다. 항암치료도 당연해 보였고.
모두가 잠든 사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수술대에 눕는 사람이 있었고, 영혼이 빠진 사람들처럼 수술을 준비하는 사람과 영혼을 다해 수술을 집도하는 이, 졸린 눈을 부릅뜨고 기구를 잡고 서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새벽은 한 사람의 생에 깊숙이 관여했던 귀중한 순간이자, 살아보려고 살려보려고 몸부림치던 역동적인 순간이었다. 고문받던 기억은 훌훌 털어 뿌듯한 마음으로 글에 녹여낸다. 그 정도의 고문을 받고 생명을 살리는데 일조했다면 만족이다. 생의 중요한 순간을 잠시나마 공유했던 그가 지금은 건강히 계시기를 기원한다.
*빰빼: panperitonitis(복막염)의 앞부분 발음인 'panpe'를 한국식 발음으로 줄여서 부르는 용어, 결국 복막염이라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