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노잼기 곱씹기
“이은정 변태 같아~”
학생 때는 이 말을 최고의 칭찬으로 생각했었다. 좋아하는 걸 왜 좋아하는지, 그 디테일을 콕 집어 설명할 수 있는 내 모습. 좀 멋지(변태 같)잖아? 누군가는 그걸 ‘은정이스럽다’는 말로 표현해줄 만큼 내 취향은 꽤 분명했었다.
그러다 그 좋아하는 게 너무 많아져버렸다.
그러면 결국 좋아하는 게 없는 거 아닌가?
예를 들어 무슨 영화를 좋아하냐고 물으면, 영화 장면들과 음악, 캐릭터, 그리고 감독의 인터뷰 텍스트들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휘몰아치면서 말문은 막혀버린다.
중학생 때는 교내 문집 전면에 3장짜리 감상문을 실을 정도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좋아했었다. 아직 오지 않은 세상을 보여주는 마이너리티 리포트나, 있음 직한 가상세계들인 매트릭스, 아일랜드, 가타카 같은 SF에 열광했었고, 망해버린 세상에서 인간들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디스토피아물을 좋아했었고, 나랑 똑같은 생각 하는 사람이 있네? 그럼 나도 천잰가?(아님.) 하며 크리스토퍼 놀란의 세계관을 탐닉했었고, 토마토 케쳡 짜듯 푸슛 푸슛 사람을 쏴 죽이면서도 웃기는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좋아했었고, 개짱쎈 원펀맨 언니들 킬빌과 레지던트 이블 시리즈도 좋아했었고, 종로 3가 어느 허름한 술집 옆 테이블에서 찌질하게 질척대는 사람들을 뜯어다 박제해놓은 거 같은 홍상수 영화를 좋아했었고, 남녀가 손가락 하나만 스쳐도 다 벗은 것보다 짜릿했던 오만과 편견을 좋아했었고, 아 쪽팔려.. 제발.. 공감성수치 유발하며 뚝딱거리지만 그래도 진심만 보여주는 90년대 초반 한국 멜로물을 좋아했었고, ‘내가 이 새끼랑?’에서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로 바뀌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를 좋아했었고, 오직 두 사람의 대화만으로 사랑의 타임라인을 보여준 비포 시리즈를 좋아했었고, 내가 이렇게 병신같이 구는 건 내 잘못만은 아니라고 말해주는 굿윌 헌팅을 좋아했었고…
그런데 너무 많아 다 적을 수도 없는 좋아했었었었던 것들이, 이제는 그때만큼 좋지가 않다. 좋은 델 가고, 좋은 걸 보고 듣고 먹어도 시큰둥, 와~ 지루해.
좋아했던 것들은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는 왜 이따구가 됐을까? 고장 났나? 늙은 건가? 이제 영영 재미를 느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건가? 내가 그걸 왜 좋아했었지? 사실은 안 좋아하는데 거짓말 친 거였나?
아니야.
같은 여행지에 시간 차를 두고 다시 여행을 가보면, 풍경은 그대로지만 감상은 달라진다. 그 차이로 눈에 보이지 않는 성장치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나 이제 이거 알아.
좋아했던게 시시해지는 것도 자극에 무뎌진 게 아니라, 자극을 거뜬히 소화해 근육이 된게 아닐까. 시큰둥함은 이제 충분히 채워졌다는 신호인지도 몰라. 이제 내거니까. 취향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이 채워진 흔적이었다.
그 많던 취향은 사라지지 않았다. 몸 어딘가에 버튼처럼 남아 이따금 활성화와 비활성화를 반복한다. 두근두근 두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