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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리 Dec 09. 2022

이런 신발

신발로 쓴 여행기

'맞다, 나 신발 신고 있었지’


살면서 신발 신고 있다는 감각을 인식해본 적이 있는가?

아마도 신발을 사서 신기 시작한 며칠을 빼면 없을 것이다.

신발이 패션의 완성 또는 전부라는 사람도 있겠지만

목적지를 생각하며 걷다 보면 신발의 존재는 금세 잊힌다.


그런데 유독 신발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발이 불편할 때다.


사이즈가 안 맞을 때

예상치 못한 환경을 만났을 때

이를테면 갑작스런 비나 헛디딘 물웅덩이,

어쩔 수 없이 장거리를 걸어야만 할 때가 그렇다.


나는 주로 여행지에서 신발을 느낀다.

‘맞다, 나 신발 신고 있었네.’




#2017. 도쿄 닥터마틴

도쿄는 처음이니까. 어울리는 신발을 신고 싶었다. 닥터마틴으로 정했다. 누군가 잘 어울릴 거 같다고 추천해준 모델이었다.

여행 마지막 날 밤 8시쯤 도쿄타워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친구도 나도 무계획 방랑자라 걸을 수 있는 하루치 걸음수는 이미 초과한 상태였다. 창밖에 토독 빗방울이 묻더니 밖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내렸다.

역에 내리니 도로 위로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뭐지? 태풍이었다. 신발과 옷이 다 젖은 게 아까워서라도 도쿄타워 야경을 보러 가기로 했다. 가죽이 발을 괴롭히는 소재인 줄 그날 처음 알았다. 감옥을 신은 것 같았다. 태풍 맞는 도쿄타워 야경은 끝내줬다. 내 닥터마틴도 끝났다.


#2017. 블라디보스토크 나이키

인턴 근무가 끝났을 때였다. "인턴 연장할ㄹ?..." "아니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 배틀트립같은 여행 프로그램에서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보여줬다. 인턴이 끝난 기념으로 나에게 선물을 하기로 했다. 새신을 신고 튀어보자 블라디보스토크로.

영화 <포레스트 검프> 하면 초콜릿 상자를 얘기하지만, 나에게는 주인공 톰 행크스가 신고 달린 신발만 보였다. 흰색 바탕에 빨강 파랑이 들어간 나이키 코르테즈. 클래식한 태극기 같아..

한 달을 뒤져서 찾아냈다. 딱 한 족 남은 230 사이즈, 내 발보다 한 사이즈 작았다. 근데 지금 안 사면 영원히 못 신을 것 같은데. 여행 가서 2박 3일 정도 신다 보면 좀 늘어나지 않을까?... 는 2박 3일짜리 블라디보스토크 행군이었다. 전족은 역시 몸에 나쁜 풍습이다.


#2018. 유럽 차코

여행을 가면 기념품을 잘 안 산다. 대신 기념으로 안 하던 짓을 하나씩 해본다.

월드컵이 한창일 때였다. 벨기에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 맥줏집 테라스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했다. 캐리커쳐 그려주는 사람, 악기 없이 목소리만으로 버스킹 하는 사람, 광장 맨바닥에 앉아 웃고 떠드는 사람들. 독일 국기를 몸에 두르고 응원가를 부르며 다가오는 독일인 중학생과 하이파이브를 했고 맥주를 털고 일어나 광장 한복판 돌바닥에 누웠다.

친구가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놀리더니 비실비실 웃으며 같이 누웠다. 구경꾼에서 구경거리가 된 우리는 샌들 신은 발을 들어 하늘을 밟아봤다. 돌바닥에 등이 배겼다. 와 여기서 캐리어 끌면 박살 나겠는데.


#2020. 제주 반스

입사한 해에 처음 써본 휴가였다. 스마트폰은 금지. 파랑이랑 초록만 볼 거야.

청록색 반스를 신었다. 여행 첫날, 제주도 게스트하우스를 빌려 장기휴가를 보내고 있는 친구들과 만났다.

"내일 스노클링 할 건데 같이 갈래?" "당연하지."

서울로 출근하는 날까지 신발은 마르지 않았다. 바닷물에 절여진 제주산 반스 장아찌.


#2022. 후쿠오카 컨버스

광고 회사 3년 차. 크록스만 신는 단켤레 인간이 됐다.

입사할 때는 멋으로 산 사무실 실내화였지만, 지금은 발에 익어 제일 편한 신발이다. 어차피 회사에 오래 있으니까... 겸사겸사(몰래몰래 맨발로) 출퇴근화로 신었다.

유럽 돌바닥에 함께 누웠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어디든 갈 때 된 거 같아."

직장인이 된 우리는 돌아오는 날 반차 근무에 유리한 일정에 맞춰 후쿠오카 항공권을 끊었다.

후쿠오카에서 신발만 두 켤레를 샀다. 친구 따라 사봤다.

"뭐야 웬일이래?" 친구가 묻길래 “그냥.”

실은 하나는 선물할 얼굴이 떠올라서,

다른 하나는 아침에 신발을 골라본게 언제였더라? 싶어서.


올해가 가기 전에 맘 써준 사람들에게 인사해야지




어떤 사람을 알고 싶으면 함께 여행을 가보라고 말한다.

갑작스럽고 불편한 상황은 서로의 바닥을 짚어보고 수위를 맞춰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신발을 신어보는 일처럼.

신데렐라에서 반지도 옷도 모자도 아닌 신발로 자기 존재를 증명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지 모른다.



신발이 느껴질 때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커서 꽉 묶어 신어야 하는 신발,

끈이 자주 풀리는 신발,

막 꺾어 신는 신발,

낡고 해졌지만 자주 찾는 신발,

모셔뒀다가 중요한 날에만 꺼내는 신발

안 맞아서 숨 막히는 신발,

달릴 때 신는 신발,

예전엔 좋아했었던 신발


 어때. 대충 아무거나 신자.

고작 아침에 신고 나갈 신발을 고르는 일이지만 나를 신경 쓰는 것도 남을 신경 쓰는 것도 포기해버린  같았다. 편한  좋다. 근데 편하기만   쓸쓸하다. 그래서 늦기 전에 신발을 고쳐 신어 보려 한다. 조금 불편할  숨은 내가 드러나고  보였던 남도 다시 보게 된다.





P.S.

2년 전에 서랍에 넣어둔 글인데,

얼마 전 휴가로 여행 다녀오면서 생각나서 꺼내봤다.


 icloud 사진첩을 뒤져서 여행 신발 샷도 찾아 올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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